나는 섬놈, 배로 세상을 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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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섬놈, 배로 세상을 산 사람
  • 이재은
  • 승인 2013.10.30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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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섬마을조사단> 인터뷰 - 소야도 최창립 노인회장
소야도_최창립.JPG
 
최창립 할아버지(73. 현 노인회장)는 오랫동안 배를 탔다. 그때는 배에 소음장치가 없어서 의사소통을 하려면 서로 악을 써야 했다. 이삼십 년 간 엔진을 돌렸더니 귀에 이상이 왔다. 주변에서는 보청기를 끼라고 하지만 ‘누가 낀 걸 보니 보기 싫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조사단 일행은 큰 소리로 질문했고, 할아버지는 조사단의 물음에 우렁찬 음성으로 대답해 주셨다. 덕분에 인터뷰 내내 활발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살아오신 얘기 좀 들려주세요
 
- 이 섬에서 태어나셨어요?
여기서 태어나서 여기서 그냥 살고. 그래서 인천 가면 버스 노선도 모르고, 무슨 동이 어디 붙은 걸 모르니까 택시만 타요. 부천을 가도 택시 타고, 서울 가도 택시 타고. 싫으니까, 어디 가서 물어보고 하는 게 서투르니까. 그렇게 세상 살아요.
 
- 성함을 다시 한 번 여쭤 봐도 될까요.
제 이름이요? 최자 창자에 리을, 비읍 받침 립자. 최창립. 끝자가 그래서 ‘입’이라고 쓰는 사람, ‘임’이라고 하는 사람, 뭐 그렇더라구요. 요새도 소포가, 보냈다는데 안 들어왔어요. 그래서 이상하다, 연락해봤더니 줬다 그래. 너 최창임이 갖다 준 거 아니냐, 그랬더니 맞아요, 그 집 한 번 가 보세요, 그러더라구. 최창임이라고 있어요, 옆에. 그렇게 딴 데로 가고 그런 수가 많아요.
 
- 배 타셨다고 들었어요.
아들들 군대, 대학 다 끝나고 쉬운 살 먹은 해에 그만 뒀지. 아들이 군대, 대학 다 끝나고 들어오니까 아버지 내가 하께요, 그러더라구. 핸들을 뺏고…. 아들 형젠데 큰아들은 요 너머서 배 사업 하면서 펜션하고, 해오름 펜션이라고. 작은 놈은 덕적도에서 한전 다니고 있어요.
 
- 주로 뭘 잡으셨어요?
우리 배 탈 때는 새우하고 갈치, 조기, 그런 것…. 동지나 해역 있죠? 중국 양자강 앞에요. 지금 중국 배가 우리 쪽으로 넘어와서 붙잡고 그러잖아요. 그때 중국서도 매 한가지였어요. 우리를 잡아들였어요. 밤 아홉 시나 열 시 되면 들어가는 거예요. 중국을요. 개 짓는 소리 닭 우는 소리 다 들려요. 수심을 재보면 8미터, 9미터에다 어장을 주는 거예요. 병어가 그렇게 많았어요, 병어가. 그거 한 배씩 싣고 새벽에 떠나는 거예요. 붙잡히면 고기 다 뺏기니까. 잡히면 그물도 뺏기고 고기도 뺏기는 거지. 빈 배만 보내고 그랬어요. 어장 해 쓸은 것도 다 줘야 하고. 즈그덜이 다 가져요. 칼 들고 총 맨 놈들이.
 
- 걸린 적은 없으셨어요?
우린 없었어요. 운 없는 사람들은 말려 들어가기도 하고, 끌려 들어가기도 하고. 매도 맞고, 뺏기기도 하고. 지금은 우리나라에 와서, 좁은 곳에 와서 지들이 싹쓸이 하니까 우리 해경이 강력하게 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이런 사고도 나고 저런 사고도 나고. 그런데 개덜 보고 나쁘다는 말도 못하고, 우리 보고 나쁘다고도 못하고. 먹고 사는 사회에선 헐 수 없는 거예요. 고기가 많으니깐 들어가죠. 잡을려고.
 
- 배는 언제부터 타신 거예요?
몇 년도에 인천서 내려왔나? 그건 내 날짜를 모르겠네. 햇수도 모르고. 집사람하고 인천으로 갔었어요, 살러. 전세 하나 얻어가지고. 섬놈이 인천 가니께 뭘 해 먹을 게 있어야죠. 이 골목 들어가면 이 놈이 패지 저 놈이 패지. 자기 구역 들어왔다구. 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래서 도로 배를 탄 거예요. 배 안 탈라 그랬다가. 친구덜이 너 한 번 다시 배 시작해 봐라. 배로 세상을 산 사람인데. 그래 친구덜이 밀어줘가지고.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꽃게 수출을 했잖아요. 그러다가 그게 끊어졌는데 그때부터 국내 시판이 좋아졌어요. 사람들이 먹고 살만 해진 거지. 뭐 200원, 300원 하던 게, 6,000원, 7,000원 하는 거예요.
 
- 1킬로그램에요?
1킬로에. 그러더니 삼만 원 이래 막 올라가요. 딴 배덜 7,000원 받을 때 나는 삼만 원 받았어요. 그때 당시 운이 텄는데, 여튼 하루 600킬로, 800킬로, 1,600킬로까지 잡고 했으니까. 엄청나게 벌었죠. 그래가지고 쉰 살 먹고 그만 둔 것도, 형편이 좀 폈으니까. 그때 당시엔 야, 이거 가지고 내 손주 대까진 먹고 살겠다 싶더라구요. 그래도 그런 세상도 살아보고, 울기도 많이 울고, 이혼도 할라 그랬었고. 그런 타격 저런 타격이 있었어요. 하루아침에 내 이러고 사는 게 아니고. 그만한 힘든 고통도 있었고.
 
- 지금도 배를 갖고 계세요?
자가용처럼 갖고 있는 배가 한 대 있어요. 내가 안 팔지요, 그건. 아침에도 내다보고 저녁 때도 한 번 내다보고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배 부리던 사람이 그거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지금도 못 버려요.
 
소야도 얘기 좀 들려주세요
 
- 소야도에 다리가 놓인다던데 어느 쪽에 생기는 거예요?
다리 놓는 거요? 부둣가, 오면서 내린 데 있죠? 거기서 저쪽 진리 면소재지 넘어가려면 주유소 있죠? 우측으로. 주유소 있는데서 여기 마루터기 올라가려면 컨테이너 박스 있는 데. 거기가 끄트머리로 떨어진다고 하더라구. 이차선으로 그렇게 헌다고 그러더라구요. 내년부터 시작되는 모양이에요. 두어 달 전에 지질 검사도 했어요.
 
- 회장님 의견은 어떠세요?
그냥 좋기도 허고 글르기도 허고 그래요. 무슨 얘기나면요, 지금 봐도 등산객들이 무쟈게 쏟아지는데요. 덕적면에서 소야리보다 손님 많이 오는 데가 없어요. 많이 와요. 해양쓰레기 청소하는 게 있는데 해양쓰레기만 하질 않아요. 올레길, 등산로 다 댕긴다고요. 우리 주민들이 한 열댓 명, 스무 명씩 모여가지고 넌 일루 돌아라, 너희는 일루 돌아라 하면은 지금도 쓰레기를 한 푸대씩 주워요. 땅 파고 안 묻은 사람이 없어요. 대부분 먹고 묻어버렸어요.
우리집이 민박 스타트로 허고 제일 오래 헌 집인디. 내가 민박을 많이 해서 점수를 매기자면 구십 프로는 좋아졌어요. 그 전에는 쌀도 한 말쯤 그냥 쓰레기통에다 집어넣는 거예요. 라면 다섯 개 들었어도 다 내버리고 담배도 갑 채 집어넣는 사람 있고. 그 전에는 식용유도 이만 한 거 안 갖고 와요. 지금은 요만한 병에다 따라 갖고 오잖아요. 그 전에는 식용유, 참기름은 일 년 내내 안 사 먹어도 됐어요. 요즘엔 파 남잖아요? 대파. 마늘, 고추 이런 거 몇 개 남으면 식탁에다 놓고 가요. 그런 사람들은 완전히 된 사람덜이에요. 지금도 무방비 상태로, 안 보면 묻고 가는 사람들 많아요. 다리 놓이면 내가 차 타고 다녀서 좋은데, 면소재지도 댕기고. 그런데 또 좀 껄쩍지근헌 게 있기도 하고.
 
- 손주들이 학교는 어떻게 다녀요?
덕적으로 건너가요. 여기 소야 초등학교 없어졌잖아요.
 
- 언제 없어진 거예요?
한 십 년 되나 봐요. 그때 내가 이장이었는데 교육청에서 나왔드라구요. 그래서 없애선 안 된다. 아직도 학생이 두 명 있지 않느냐. 뭐 분교 이런 거면 없어져도 뭐라고 말 안겠다, 근데 소야 초등학교 아니냐, 여기서 다 졸업까지 하고 하는데 한 명 있어도 해야 된다 그랬거든. 그랬는데 무슨 조건을 내거는고 허니 일 인 당 당시 삼십만 원씩 주겠다 그러더라구. 저쪽으로 보내면은. 그러니까 부모가, 아이가 둘이면 육십만 원 나오니까. 그때 당시 걔들 아버지가 선장이고, 그래 본인이 좋다 그러니께. 그냥 학교 없어졌어요.
 
- 학교는 지금 어떻게 사용되고 있어요?
공부래도 할 수 있는 그런 시설을 만들자고 교육청을 졸랐어요. 군청도 조르고. 군청에서 교육청에 졸라가지구 교육청이 그걸 매각할라하는 걸 여기서 좀 배운 사람들이 말렸죠. 까딱하면 넘어갈 뻔했어요. 학교에 사람들이 어른거리니께 교육청에 뛰어 올라간 거예요. 어떻게 된거냐니께 매각할라한다 그러는 거야. 이 자식 저 자식하고 욕지거리하고 난리 났단 말여. 이게 무슨 짓이냐고. 군에서 맡는다, 그치만 일시불로는 못 끊고 내년 예산으로 할 테니 일단 잡아두는 걸로 하자. 그래 갖고 샀어요, 그걸. 사서 동네에 기증했다 그럴까여 뭐랄까여. 그 학교 임시 관리자가 지금 이장이 됐어요. 아주 잘 됐어요.
 
- 수양원으로 쓴다는 말도 있던데요.
문구는 멋있지. 민박이 무슨 상록수 수양원이야. 소야 초등학교를 민박을 한다면 말이 아니죠. 있을 수 없는 일을 했던 거죠. 난 노약자들 그냥 쉬고 그럴 줄 알았지 거기서.
 
- 말씀 잘 들었습니다.
지식 있는 얘기, 덕적 유래 같은 거 얘기하면 내 나이 같고는 안 돼요. 도시에 나가면 한 수 위에 말씀 하시는 분 많아요. 나보고 덕물도가 어디냐고 물어 봐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이 양반아 덕적이 덕물도여 그래요. 소야리는 소정방이 다녀가서 소야리라고 지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웃어요. 아니라는 거지. 우리가 아는 견지에서 말하면 다 어긋나. 우리가 사투리잖아요. 말할 때 덕적면 소야리 삽니다, 안 하고 수예리 이런다구. 근데 이거는 우리 세계에서는 맞는 발음이에요. 건방진 놈들이 뭐라고 고치는고 하니 요 앞에 섬이 무풀이 섬이거든요. 미국 사람이 물어보니께 푸레섬이라 그랬어요. 틀리는 게 많아요. 국사봉 국사봉 그러죠. 여긴 국수봉이거든요. 내가 그런 것 시비 좀 했어요. 야 이걸 왜 묵도로 해놨어. 덕적서 지어 놓는 먹염이니께 먹염이라고 해 놔야지. 사투리를 썼건 뭘 썼건 조상들이 지은 거, 소소한 건 그대로 써야죠.
 
할아버지는 당신의 얼굴을 두고 ‘절단 났다’는 표현을 쓰셨다. 뱃일 하면서 땡볕에 노출돼 피부가 나빠진 것이다. 도시에 볼 일을 보러 가면 높은 사람들이 잔뜩 들어앉은 데는 들어가기가 꺼려진다. 얼굴 생각하고 돌아서면 전화를 해서는 왜 들어오지 않느냐고 난리를 친다. 하는 수 없이 들어가지만 괜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수술도 두 번 했는데 의사가 “어디는 하고 어디는 안 합니까? 연세도 많으시니까 그만 두세요.” 하더란다. 할아버지를 배려하는 의미로 사진은 흑백 처리했다.
뱃일 할 때 뱃사람과 가족을 거두려는 목적으로 크게 지은 집으로 지금은 펜션을 운영하고 있다. 소야도 펜션 1호다. 오십 넘어서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편안하게 살고 있다고 자평하시는 최창립 할아버지가 지금처럼 건강하고 기운차게 오래오래 사시길 바란다.
 
-인천섬마을조사단 : 문경숙, 박상미, 박인숙, 이규원, 이재은
-녹취 풀이 : 박인숙, 이규원
-글/사진 : 이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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