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선생의 옛집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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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선생의 옛집을 찾아
  • 허회숙 시민기자
  • 승인 2022.01.06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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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기획]
박경리 문학공원을 둘러보며

      2021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아침 원주로 향했다. 지난 가을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대지와 하늘을 사랑으로 연결하려는 철학을 형상화한 원주 뮤지움 산(Museum SAN)에서 받은 감동을 손주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또한 새해 첫날은 지난번에 못 들린 박경리 문학공원을 찾아 청소년들인 손주들에게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인 박경리 선생을 깊이 알게하고 싶었다.

      지난 한 해 우리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경험했다.  ‘기생충’과 '미나리'의 성공과 더불어 BTS가 세계 대중 음악계를 제패하더니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 넷플릭스를 장악하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옛날 한국 어린이들의 마당 놀이와 길거리 간식까지 세계인의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되는 현상을 보았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는 1969년부터 시작하여 26년에 걸친 집필기간 끝에 1994년 8월 15일 새벽 2시에 완성한 5부 20권 분량의 대하소설이다.

     이 소설은 한국 근대사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한말의 몰락과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지주계층이었던 최씨 일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당시 한국인의 고난과 항일 투쟁과 8.15광복까지를 그리고 있다.

     경남 하동 평사리라는 전형적인 한국 농촌을 비롯하여 지리산, 서울, 간도, 러시아, 일본, 부산, 진주 등에 걸치는 광활한 국내외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하였다.

     원고지만 3만매가 넘는 분량의 역작인 동시에 역사와 운명의 대서사시로서, 한국인의 삶의 터전과 그 속에서 각고의 인내와 용기로 다양한 운명을 개척해 간 주인공들을 통해 한국인의 민족적 삶을 꿰뚫은 빼어난 작품이다.

     필자는 여러 비평가들로부터 현대 한국문단에서 가장 특출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토지」야말로 우리나라에서 노벨문학상을 받아 마땅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박경리 문학공원(강원도 원주시 토지길 1. 033-762-6843, 737-4766)은 박경리 선생이 18년간 살면서 소설 ⸀토지」를 완성한 옛집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그 일대 삼천여 평을 3개의 테마공원(평사리마당, 홍이동산, 용두레벌)으로 꾸며 놓은 곳이다.

    주차장 입구에 마련된 박경리 문학의 집은 2층과 3층이 전시실, 4층은 자료실, 5층을 세미나실로 꾸며져 있다.

    2층 전시실에는 박경리 선생의 삶의 흐름을 따라 연표와 사진, 시로 구성한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3층 전시실은 ⸀토지」의 역사적, 공간적 이미지와 등장인물 관계도, 하이라이트, 영상 자료 등을 통해 1부 부터 5부까지의 이해를 돕는 공간이다.

    평사리의 사진이 인상적이었다. 

   4층 자료실은 전시공간에서 미처 접하지 못한 박경리 선생의 삶과 작품을 연구하는 공간이다.

   5층은 박경리 선생이 사시던 옛집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이곳에서 각종 세미나가 열린다.

   박경리 문학의 집 바로 앞에 원형으로 지어진 2층의 멋진 북카페가 있다.

   개관시간은 10시부터 17시까지이다. 1층 안내실에서 열람할 도서를 고른 후 신분증을 맡기고 도서를 받아 2층 북카페에서 열람한다.

   열람 후 1층 안내실에 도서를 반납하고 신분증을 받으면 된다. 도서의 외부 반출은 금한다.

   박경리 선생께서 친필로 쓰신 에세이를 액자화 하여 전시하고 있는 것도 좋았다. 

  박경리 문학공원에서 가장 감동을 받은 곳은 박경리 선생의 옛집이었다.

   옛집으로 들어서는 출입구부터 어느 산사에라도 들어가는 듯 호젓한 분위기였다.

  큰 나무들과 작은 연못이 있는 마당에 들어서니 널직한 흰 바위에 박경리 선생님이 앉아 반기시는 것이 아닌가? 그 옆에 고양이 한 마리도 있고 호미까지 놓여 있다.

  환하게 불이 켜진 선생님의 옛 집 현관문은 잠겨 있었지만 이리저리 돌며 안의 집필실, 거실, 안방과 부엌의 따뜻하고 정갈한 모습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장롱이 있는 안방 한 옆으로는 붉은 고추를 말리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집필실의 낮은 책상 위에는 원고지와 만년필, 안경과 사전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방금 선생님이 드셨을 것 같은 찻잔까지 놓여 있다.  

   집을 한바퀴 돌아본 후 다시 마당에 서서 이곳에서 18년간 집필을 하시며 텃밭을 가꾸시던 박경리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아벨서점 곽현숙 사장님의 회고에 의하면 제90회 시낭송회 때 박경리 선생님을 모셨다. 그날 박경리 선생이 하신 말씀을 시 낭송회 후 인천in에 발표하였다.

   박경리 선생은 6.25 사변 직전 부군이 인천으로 발령을 받아 금곡동에서 1년 여간 사셨다. 결혼 후 처음으로 시댁에서 분가하여 남편과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금곡동에서 살던 그 시절, 박경리 선생은 헌책방을 운영하며 가장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 그러나 6.25 후의 혼돈의 세상에서 남편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그 후 어린 아들을 잃는 참척을 당했다. 서울을 거쳐 원주로 거처를 옮기신 후 박경리선생에게는 글을 쓰는 것만이 고통과 한을 삭일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방법이 되었다.

   박경리 선생은 2008년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박경리 문학공원을 뒤로 하면서 인천 금곡동에도 박경리 선생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옛집 복원 사업이라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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