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방향의 재설정 - 시대의 한계에 갇히지 않았던 실학자 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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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방향의 재설정 - 시대의 한계에 갇히지 않았던 실학자 소남
  • 인천in
  • 승인 2023.08.3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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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남 인문학 12강을 듣다]
(8) 시대의 한계에 갇히지 않은 자, 소남 선생 이야기
- 박혜민 연세대학교 강사
[인천in]이 소남학회, 계양도서관과 함께 5월10일부터 9월20일까지 12차례에 걸쳐 계양도서관이 진행하는 '길위의 인문학' - 소남 윤동규를 탐구하는 인문학 강좌를 요약해 연재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의 수제자로 성호학파를 인천으로 확산시킨 소남을 통해 인천의 역사와 정신적 문화유산을 함께 탐구하며 인천 역사를 지평을 넓혀본다. 여덟번째 순서는 박혜민 연세대학교 강사의 '시대의 한계에 갇히지 않은 자, 소남 선생 이야기’다.

 

30일 오후 7시 계양도서관에서 <길위의 인문학' - 소남 윤동규> 8번째 강좌가 열렸다. (사진 = 계양도서관 제공) 

 

『곤여도설』(坤輿圖說). 벨기에 태생의 예수회 수사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1623-1688)가 1672년 한문으로 펴낸 상·하 2권짜리 세계 지리서다. 현재 한국에는 소남 윤동규가 필사한 상권(자연지리)이 종손 집에, 하권(인문지리)은 목판본이 규장각에 각각 유일하게 남아 있다. 소남이 『곤여도설』을 필사한 것은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사고 방향의 재설정이었다. 주자학적 자연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여러 자연현상에 대해 실학자 소남은 다른 관점을 통해 이해를 시도하고 있었다.

계양도서관이 진행하는 <길위의 인문학' - 소남 윤동규> 8번째 강좌가 ‘시대의 한계에 갇히지 않은 자, 소남 선생 이야기’를 주제로 30일 오후 7시 계양도서관에서 박혜민 연세대 강사의 강의로 열렸다.

 

소남 윤동규의 『곤여도설』 필사본
소남 윤동규의 『곤여도설』 필사본(소남 윤동규 종가 소장본)

 

예수회의 극동 선교는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가 일본 가고시마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고, 1579-1582년에 미켈레 루지에리(1543-1610)와 페드로 고메즈(1535-1600), 마테오 리치(1552-1610)가 마카오로 들어가면서 중국 선교의 문이 열렸다. 그들은 종교와 학술이 결합된 포교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입국 직후인 1580년부터 여러 한문 문헌을 만들었고 그 목록에는 종교서적은 물론 천문학, 지리, 수학에 관한 학문서적도 있었다. 그 중 서구의 학문에 대해 소개하는 일은 중국 외에도 우수한 문명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방법이었고, 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하는 포석으로 기획된 것이었다. 이러한 선교의 방향성은 명말 1582년에서 1644년 명청교체 시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중국어에 능통했던 마테오 리치는 세계지도를 간행하며 중국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마테오 리치가 만들어낸 주요한 번역어 중 하나가 ‘대서양’이다. 그는 유럽의 번역어로 ‘大西’ ‘大西洋’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기존 중국에서 사용되었던 ‘서양’, 즉 인도양 연안의 지역보다 ‘더 멀리’ 있으며 그 지역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大가 泰와 통용되어 極, 遠, 甚을 의미하는 것을 응용한 것이다.

당시 널리 읽힌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한 세계 지리지는 알레니의 『직방외기』(초판 1623년)와 소남이 필사한 페르비스트의 『곤여도설』(초판 1672년)이다. 페르비스트는 2년 후 1674년에 세계지도 『곤여전도』(坤輿全圖)를 제작하였다. 이 지도는 동서양의 양반구도(兩半球圖)에 오대주와 사대양이라는 시각적 정보 외에도 각 지역의 지리정보 및 기이한 동물, 어류 등에 대한 기사를 삽입하였다. 지도와 『곤여도설』의 내용을 결합한 것이었다. 곤여도설

이전에 간행된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에 비해 인문지리를 많이 수록하였는데 마테오 리치가 황제 및 고위관리를 대상으로 지도를 제작하였다면, 페르비스트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흥미를 끌만한 요소를 보다 추가한 것이다.

소남은 출전을 『난중잡록』이라 하였으나 해당 내용은 『속잡록에서 인조 1631년 진위사(進慰使)로 갔던 정두원의 장계 중 「서양국 기별(西洋國奇別)」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포르투갈 신부 요하네스 로드리게즈(1561~1634)가 중국 등주로 온 정두원 일행을 만나게 된다. 그는 정두원을 통해 서양화포, 화약, 천리경, 자목화 등 물품과 천문학 관련 한역서적(『천문략(天文略)』, 『이마두천문서(利瑪竇天文書, <原題>渾蓋通憲圖說)』) 등을 인조에게 보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미 한역서학서를 통해 마테오 리치에 대해 간접적으로 알고는 있었으나 직접 만난 서양인의 경우 로드리게즈가 처음이었다. 즉 정두원의 장계는 곧 조선인이 서양인을 공식적으로 처음 만난 사건의 기록이고, 소남 윤동규는 이를 필사본 첫머리에 부기하였다.

소남은 필사본에서 알레니의 『직방외기』의 내용을 추가하여 기록하였다. 소남은 『곤여도설』을 읽기 전에 『직방외기』를 먼저 읽었던 것이다.

 

조선 태종 2년(1402)에 제작된 세계지도(중국 중심으로 아라비아와 유럽대륙이 크게 위축돼 있다) - 그림출처: Original: 권근 외 이찬 교수 채색묘사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사실, 성호학파의 서구 천문학 관련 논의는 천동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지동설은 1543년에 발표되었으나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인들에게 전달한 천문학은 르네상스 시대의 수준(천동설)에 머물러 있었다. 1758년 예수회에서 지동설 유포 해금을 한 후에야 미셸 베노아(1715-1774)가 1761년 『곤여전도』를 저술하여 중국에 처음으로 지동설을 소개하였던 것이다.

박혜민 강사는 당시 예수회에 의한 서구의 지식 수용 여부, 혹은 이해 수준으로 당대 지식인들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한 관점은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한 지식이 옳고 참되며 우월한 것이라는 전제의 오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서학 탐구의 시대적 의의는 서학을 통해 이 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하려는 기존의 방법, 즉 주자학적 관점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소남 선생의 『곤여도설』 필사는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사고 방향의 재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주자학적 자연철학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았던 여러 자연현상에 대해 다른 관점을 통한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고의 전환은 특정 문화에 속한 사람이 모든 면에서 방향을 재설정하는 것이고 연속적인 과정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남 선생의 『곤여도설』 필사가 시대 변화를 이끌어내는 수많은 사고 전환의 행위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비록 그의 세대에서는 세계의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알 방도가 없었겠지만 현재 우리는 역사라는 조감도를 통해 그의 행위의 유의미함을 발견할 수 있다며 박혜민 강사는 시대에 갖히지 않았던 실학자 소남의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곤여전도(좌; 출처-고려대학교 소장본)와 천하도(출처-한국학중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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