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여행과 진짜 여행의 다른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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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여행과 진짜 여행의 다른 점
  • 최원영
  • 승인 2023.10.3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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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의 책갈피] 제128화

 

 

지난 시간에는 강신주 교수님의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에서 스승인 운문 스님이 제자인 동산 스님에게 “세 차례 후려쳐야겠지만 너를 용서하마”라는 선문답을 풀어보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스승의 이 말씀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제자가 다음 날 아침 다시 물어보니 “이 밥통아, 강서로 호남으로 그런 식으로 돌아다녔던 것이냐?”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때 동산 스님이 크게 깨달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동양철학의 뿌리 중 하나는 ‘하나에서 둘이 나왔다.’라는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서로 달라 보이는 둘은 원래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기쁜 일과 슬픈 일 모두 원래 하나였던 겁니다. 삶의 시계추가 슬픈 일에 또는 기쁜 일에 잠시 머무르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괜찮습니다. 언젠가는 추가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달을 보고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는 것이나 이별의 아픔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것도 사실은 달이 즐거움과 아픔을 준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내 마음이 어떤가에 따라 즐겁게 또는 고통스럽게 느끼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이 순간순간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행복의 문을 여느냐, 불행의 문을 여느냐가 결정됩니다. 시계추가 기쁨 쪽에 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시계추가 아픔 쪽에 있다고 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잠시 멈춘 시계추를 지금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의 저자인 강신주 교수의 설명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임제 스님이 말한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라는 속내는 이렇다.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는 것은 현재 삶에서 주인이 된다는 것, 그리고 서 있는 곳마다 참되다는 것은 현재 삶에서 주인이 되면 자신 앞에 펼쳐진 모든 것과 ‘있는 그대로’ 관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 출발했던 곳과 도달해야 할 곳, 과거와 미래를 끊어야 한다. 그때 현재를 영위하는 주인이 된다. 운문이 동산에게 몽둥이질을 하려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 밥통아. 강서로 그리고 호남으로 그런 식으로 돌아다녔던 것이냐?’라는 꾸중은 어느 곳에서나 삶의 주인이 된다면, 그게 해탈이고 그게 성불하는 것인데도 어찌 너는 깨달음을 얻으려 이곳저곳 다닌 것이냐? 그러니 불호령 내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여행에는 두 종류가 있다. 가짜 여행과 진짜 여행이다.

가짜 여행은 출발지도 있고 목적지도 있다. 그래서 여행 도중 항상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느라 여행 자체를 못 즐긴다. 서둘러 가야 하고 서둘러 돌아와야 하니까 당연히 도중에 만나게 되는 수많은 꽃향기, 애무하는 바람들, 개천의 속삭임들을 놓칠 수밖에 없다. 아니, 오히려 저주할 거다. 목적지에 가는데 장애가 되니까. 결국 여행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출발지와 목적지가 될 것이다.”

“장자(BC369~289)는 진짜 여행을 ‘소요유’(逍遙遊)라고 표현한다. 소요란 ‘아무 목적도 없이 한가롭다’는 뜻이다. 진짜 여행을 하는 사람은 항상 도중에 자유롭게 행동한다. 멋진 곳이면 며칠이라도 머물고, 아니면 그냥 과감히 떠난다. 출발지와 목적지의 노예가 아니라, 매번 출발지와 목적지를 스스로 만드는 주인이 ‘나’이니까.”

“인간의 삶 자체가 여행이다. 한 번밖에 없는 소중한 삶을 제대로 영위하려면 기원, 목적, 과거, 미래, 출발지, 목적지에 집착해선 안 된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니, 내딛는 걸음마다 자연스럽고 여유로울 수밖에 없다. 임제 스님의 말처럼 모든 게 참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목적지에 가느라 혹은 출발지로 돌아오느라 분주한 사람에게 어떻게 ‘자신을 돌보고’ ‘타인을 돌보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자비의 마음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삶은 시계추처럼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왔다 갔다 합니다. 좋았다가도 나빠지고, 나빴다가도 좋아지는 것이 삶입니다. 성공했다가도 실패하고, 실패했다가도 성공하는 게 인생입니다.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성공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해 교만해지고, 실패가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해 불행한 삶을 살아갑니다.

삶이라는 시계추는 때가 되면 반드시 방향을 바꿉니다. 그러니 지금의 힘겨움을 조금만 견디면 됩니다. 우리가 견딜 수 있는 것은 삶의 시계추가 반드시 방향을 바꾼다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래서 견디는 순간조차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하나에서 둘이 나온 겁니다. 내 삶이라는 하나에서 희망도 절망도 나온 겁니다. 그러니 희망이 보일 때도 절반의 내 삶이고 절망에 빠졌을 때도 절반의 내 삶일 뿐입니다. 결국 희망과 절망은 하나입니다. 그러니 그냥 견뎌내야만 하고, 이왕 견딜 바에야 즐겁게 그리고 기꺼이 견뎌보는 겁니다.

이런 태도가 삶이라는 100년 동안의 긴 여행을 놀이처럼 즐겁게 사는 지혜이고, ‘내’가 주인이 되어 진짜 여행을 할 수 있는 깨달음입니다. 그저 이 순간 내가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픈 일이라고 해도 그저 가슴으로 안아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순간순간마다 아프지만 배울 것이 보입니다. 높은 산을 오를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이 산을 천천히 내려올 때 보이는 것처럼, 잘 나갈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이 아플 때 비로소 보입니다. 이것이 삶을 놀이처럼 즐기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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