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이자, 인천중·제물포고 교장을 지낸 길영희 선생의 일제하 재판기록을 담은 『길영희 교장선생 재판기록』이 출간됐다.
길영희 신문조서(訊問調書), 길영희 의견서(意見書), 예심종결결정서(豫審終結決定書), 공판시말서(公判始末書), 판결문(判決文)의 번역문과 일본어 원문이 각각 수록돼 있다.
연세대학교 허경진 명예교수가 옮기고 엮었다. 길영희 선생의 만세운동 참여 이야기는 잘 알려져지만, 재판기록은 잊혀져 있었는데, 길영희 선생 서거 40주기를 앞두고 정리하여 책으로 펴냈다.
길영희 교장선생은 경성의학전문학교 1학년에 재학중 이던 1919년 삼일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 인천중학교를 세우고 제물포고등학교를 설립하여 명문으로 육성한 뒤 65주년 삼일절 새벽에 서거했다.
『길영희 교장선생 재판기록』은 길영희 교장선생이 경성의학전문학교 1학년 학생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체포, 구속, 기소되어 신문받고 판결 받는 과정까지의 일체 기록을 수집하고 번역하여 출판한 것이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선배와 동급생들이 함께 신문받았는데, 이 가운데 백인제, 한위건, 길 영희 세 학생이 함께 옥고를 치렀지만 석방된 뒤에는 다른 길을 걸었다.
3학년이던 백인제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퇴학당한 뒤 에 복교하여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서울 저동에 백외과를 개업하였으며, 재단법인 백병원을 설립하였다.
2학년이던 한위건은 후배 길영희에게 만세운동에 참 하라고 연락하였으며,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학생대표 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퇴학 당한 뒤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내무위원이 되었으며, 귀국하여 조선공산당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학년이던 길영희는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퇴학당한 뒤에 사립 배재고등보통학교에 4학년으로 편입학하여 졸업하고,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에 유학하여 교육자로 서의 길을 걸었다.
『길영희 교장선생 재판기록』은 길영희 선생 개인의 재판기록이지만, 우리 사회 여러 지도자들의 젊은 시절 애국심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