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편 술이(述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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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편 술이(述而)
  • 이우재
  • 승인 2010.04.12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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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편 술이(述而)

1, 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옛 것을 조술(祖述)할 뿐 새로이 창작하지 않으며, 옛 것을 믿고 좋아하니, 가만히 우리 노팽에게나 비유할거나.”

  <해설> 술(述)은 조술(祖述)로 도(道)를 이어받아 전하는 것이고, 작(作)은 새로이 창작(創作)하는 것이다. 옛 것이라 함은 요순으로부터 전승되어 주공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선왕(先王)의 도이다. 노팽(老彭)은 은나라의 현인 노팽이라는 설(說)도 있고, 『도덕경(道德經)』을 쓴 노자(老子)와 요(堯)임금의 신하로 은(殷)나라 때까지 팔백 년을 살았다는 전설적인 인물 팽조(彭祖)를 가리킨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공자는 스스로를 항상 옛 선왕의 도의 전승자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학문이 옛 선왕의 도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술이 19), 그 도에서 벗어나 스스로 창작한 바는 없다고 하였다(蓋有不知而作之者 我無是也―술이 27). 뿐만 아니라 그는 옛 선왕의 도가 자신에게 있으며, 그것을 후세에 전달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또한 그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자한 5). 그러나 그가 전하는 옛 선왕의 도라는 것은, 그의 복례(復禮)와 마찬가지로, 그 내용에 있어서는 사실상 그 자신의 창작물이다. 그는 단지 자신의 사상을 옛 것의 틀을 빌어 표현했을 뿐이다. 
  竊比於我老彭의 아(我)는 주자에 의하면 친(親)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청의 황식삼(黃式三)은 『논어후안(論語後案)』에서 혹자(或者)의 말을 인용하여 竊比我於老彭의 아(我)와 어(於)가 뒤바뀌어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참고> 공자가 옛 것을 좋아했다는 말은 술이 19에도 있다.
또 술이 27에서는 자신이 스스로 창작한 바가 없음을 밝히고 있다.
 
2, 子曰 黙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묵묵히 옛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배우되 싫증내지 아니하며, 남을 가르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라면 내게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해설> 지(識)는 기(記)로 기억하는 것이다.
  何有於我哉에 대해서는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주자는 내게 무엇이 있겠느냐의 뜻으로 이해한다. 즉 아무 것도 능한 것이 없다는 겸손의 말로 파악하는 것이다. 고주의 정현(鄭玄)은 남들은 하지 못하나 자신은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약간 과장이 있는 표현이다. 청(淸)의 환무용(宦懋庸)의 『논어계(論語稽)』에서는 이것 이외에 달리 무엇이 있겠느냐는 뜻으로 해석한다. 일본의 이또진사이(伊藤仁齋)의 『논어고의(論語古義)』도 같은 입장이다. 한편 우리나라의 다산(茶山)은 겨우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정도이니 어찌 그런 것이 있다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청(淸)의 황식삼(黃式三)의 『논어후안(論語後案)』은 내게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는 뜻으로 해석한다. 위의 세 가지 일 정도는 내게 별 어려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인 13, 29, 옹야 6, 자로 13에 나오는 何有도 모두 이런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여기서는 이 입장을 따랐다.
  공자는 평소 자신이 학문을 좋아하고(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공야장 27),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抑爲之不厭 誨人不倦 則可謂云爾已矣―술이 33)에 불과하다고 자임하고 있다. 물론 겸손의 말이나, 여기에는 공자 자신의 강한 자긍심이 깃들여 있다. 공자에게 학문이란 단지 지적 능력의 고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군자는 학문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완성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천하 만백성을 평안케 한다. 또 남을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학문을 더욱 깊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도(道)를 세상에 널리 전파할 수 있게 한다. 그러니 이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어찌 작은 벼슬 따위와 비교할 수 있으랴. 그러기에 자공은 『맹자』 「공손축(公孫丑)상」 2에서  말하길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요,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인(仁)입니다. 인(仁)과 지혜를 겸비하고 계시니 선생님께서는 이미 성인이십니다.”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할 때, 세상으로부터 쓰임을 얻지 못하고, 고향에 눌러앉은 말년의 공자로서는 이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리라. 학이 1에서 보이는 것처럼, 공부하고, 제자를 가르치며, 벗과 교제하는 일이 그에게는 사회 생활의 거의 전부였을 것이다. 어찌 보면 공자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는 슬픔이 잔잔하게 배어 나오는 구절이기도 하다.
 
  <참고> 술이 33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다.

3, 子曰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덕을 닦지 않는 것과 학문을 익히지 않는 것, 의를 듣고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 나쁜 것을 능히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나의 걱정이다.”

  <해설> 공자는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오를 수 없을 정도의 도덕적 경지에 오른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한시도 자만하지 않고 이처럼 정진을 거듭하고 있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본받아야 할 그의 위대한 점이 아닐까?

4, 子之燕居 申申如也 夭夭如也.
  공자께서 집에 한가로이 계실 적에는 단정하시면서도 온화하셨다.

  <해설> 사람이 집에 한가로이 있을 때에는 마음의 자세가 흐트러져 방만하기 쉽다. 그러나 공자는 집에 한가로이 있을 때에도 마음을 방만하게 갖지 않았다. 申申如也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는 모습을 말하고, 夭夭如也는 그 얼굴빛이 온화한 것을 말한다.

5, 子曰 甚矣 吾衰也. 久矣 吾不復夢見周公.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심하구나, 내 몸이 쇠약해진 것이! 오래되었구나, 내가 꿈 속에서 다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

  <해설> 주공(周公)은 성은 희(姬), 이름은 단(旦)으로,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성왕(成王)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그를 도와 섭정하여 주나라의 문물 제도(周禮)를 완성했으며, 후일 성왕이 장성하자 그에게 왕권을 돌려주었다. 후세에 성인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았다. 특히 공자가 추앙한 사람으로,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는 성왕이 그의 공적을 기려 분봉한 나라이다.
  주공이 이룩했던 태평성세를 이 땅에 실현도 하지 못한 채 덧없이 늙어만 가고 있는 자신에 대한 한탄의 말이다.

6, 子曰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도에 뜻을 두고, 덕에 바탕을 두며, 인(仁)에 의지하고, 예에서 노닌다.”

  <해설> 예(藝)는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의 육예(六藝)를 말한다.   
  선왕의 도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덕을 바탕으로 하며, 널리 사람을 사랑하는 인(仁)에 의지하고, 여러 가지 기예를 즐긴다. 간결한 문장으로 공자의 진면목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7, 子曰 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스스로 속수의 예를 행하는 이상, 나는 누구도 가르치지 않은 바가 없다.”

  <해설> 속수(束脩)의 수(脩)는 육포(肉脯)이며, 속(束)은 열 개를 묶은 것이다. 제자가 스승을 첫 대면할 때 가져가는 예물이다. 제자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표시하면, 빈부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제자로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속수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도 있다. 황식삼(黃式三)의 『논어후안(論語後案)』에 의하면 속수(束脩)는 속대수식(束帶修飾)으로 능히 의관을 정제하고 예의를 행할 수 있는 나이를 말하며, 정현(鄭玄)에 의하면 15세 이상이라고 한다.

  <참고> 위령공 38에는 가르침을 베푸는 데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8, 子曰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깨달으려고 분발하지 않으면 깨우쳐 주지 않으며, 배운 바를 말로 나타내려고 애쓰지 않으면 말문을 틔워 주지 않는다. 한 모퉁이를 들어 보일 때, 나머지 세 모퉁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다시 가르쳐 주지 않는다.”

  <해설> 분(憤)은 깨달으려고 분발하는 것, 계(啓)는 개(開) 즉 그 실마리를 열어 주는 것이다. 비(悱)는 입으로 말하려고 하나 잘 되지 않는 것이며, 발(發)은 말문을 열어 주는 것이다. 우(隅)는 사각형의 한 모퉁이다.
  본인이 애쓰고 노력하지 않으면 다시 가르치지 않는다는 말이니, 무릇 학문이란 가르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배우는 사람의 노력이 우선이다.

9, 子食於有喪者之側 未嘗飽也. 子於是日哭 則不歌.
  공자께서는 상을 당한 사람 옆에서 식사를 하실 때 배부르게 잡수시지 않으셨다. 조문 가시어 곡을 하신 날에는 노래를 부르시지 않으셨다.

  <해설> 어진 마음이 남에게 두루 미쳐, 상을 당한 사람과 슬픔을 같이하려는 것이다.
  무릇 인간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과 공동체를 이루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남이야 어떻든 내 마음대로라는 태도는 옳지 않다. 그런 행위는 설사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공동체 내부에 위화감을 조성하여, 자칫 공동체 전체의 평화를 해칠 수 있다. 옛 말에 흉년이 들면 하수구에 쌀 한 톨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삼간다는 말이 있다. 밥을 굶는 자의 아픈 심정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이 바로 인(仁)의 시작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짓밟으려고만 하는 우리들이 깊이 새겨 두어야 할 대목이다.  

10, 子謂顔淵曰 用之則行 舍之則藏 惟我與爾有是夫. 子路曰 子行三軍則誰與. 子曰 暴虎馮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
  공자께서 안연에게 이르시기를 “써 주면 도를 행하고, 써 주지 않으면 물러나 도를 간직해야 하느니, 오직 너와 나만이 그럴 수 있다.”
  자로가 말하길 “선생님께서 삼군을 거느리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맨주먹으로 호랑이에게 달려들고, 강을 맨발로 걸어서 건너다 죽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자와는 함께 하지 않는다. 굳이 같이한다면,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고, 계교를 잘 생각하여 성사시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해설> 행(行)은 도를 행하는 것이고, 장(藏)은 물러나 도를 간직하는 것이다. 用之則行 舍之則藏은 세상에 대한 군자의 자세이니, 쓰이면 세상에 나아가 도를 행하지만, 쓰이지 않을 때는 조용히 물러나 학문에 열중하는 것이다. 오직 자신과 안회만이 그러한 덕을 지녔다고 공자는 말하고 있다.
  신주의 사량좌(謝良佐)는 말하길 “성인은 행하고 간직하는 사이에 특별히 의도하는 바도 없고, 또 꼭 해야 하는 것도 없다. 그 행함은 지위를 탐내는 것이 아니며, 그 물러나 간직함은 혼자만이 옳다는 독선적인 것도 아니다. 만일 욕심이 있다면, 쓰여지지 않을 경우 반드시 행할 것을 찾아 구하려 할 것이요, 또한 쓰여지지 않더라도 물러나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오직 안자(顔子)만이 이처럼 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적절한 해설이라고 생각된다.
  곁에 있던 자로가 일종의 질투가 났던 것 같다. 그리하여 자신의 용맹함을 믿고, 그렇지만 군사 문제는 제가 적격이 아닙니까하고 물었다. 군(軍)은 12,500명으로 구성된 군대이다. 따라서 삼군(三軍)은 37,500명이다. 큰 제후국만이 삼군(三軍)을 가졌다.
  暴虎馮河는 호랑이를 맨손으로 상대하고, 강을 배도 없이 맨발로 건너는 것이다. 용기는 혈기(血氣)만 갖고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의(義)에 맞아야 한다. 군자가 용기는 있되 의롭지 못하면 난(亂)을 일으키게 되고, 소인의 경우는 도적이 되고 만다(君子有勇而無義爲亂 小人有勇而無義爲盜―양화 23). 뿐만 아니라 깊은 생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무턱된 용기는 만용(蠻勇)에 불과할 뿐이다. 공자는 자로가 만용을 부리며 매사를 너무 쉽게 자신하는 것에 대해 타이르고 있는 것이다.

11, 子曰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부를 추구해서 얻을 만한 세상이라면, 내가 비록 채찍을 손에 잡는 일이라도 하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

  <해설> 執鞭之士는 채찍을 잡는 사람이니 천한 사람이다. 청(淸)의 전점(錢坫)의 『논어후록(論語後錄)』에 의하면 시장(市場)에서 문을 지키는 문지기나, 또는 천자나 제후가 행차할 때 길을 정리하는 하인이라고 한다.
  공자가 벼슬하는 도(道)에 대해 설명한 말이다. 옛날의 부(富)는 신분이나 벼슬에서 나오는 것으로, 富而可求也는 벼슬을 해서 부를 얻을 만한 세상이라면의 뜻이다. 즉 세상에 도가 행하여져 벼슬길에 나아가 부를 얻어도 좋을 때라면 비록 채찍을 쥐는 천한 벼슬이라도 하겠지만, 도가 행해지지 않아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안될 세상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공부나 계속해야겠다는 뜻이다. 다산의 『논어고금주』, 청의 송상봉(宋翔鳳)의 『논어발미(論語發微)』, 유보남의 『논어정의』 등의 설(說)이다.
  주자는 부를 추구해서 얻을 수만 있다면의 뜻으로 해석한다. 부와 귀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死生有命 富貴在天―안연 5). 추구해서 얻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으나,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 내가 하고 싶은 것이나 해야겠다는 뜻이다.
  富而可求也를 부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으나, 논어의 어디를 보아도 공자가 부를 천시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무리가 있다. 공자는 부와 귀(貴)는 인간이면 누구나 다 원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富與貴 是人之所欲也―이인 5). 공자가 천시한 것은 불의(不義)의 부이지 부 자체가 아니다.

  <보충> 공자가 살던 춘추 시대는 철기의 도입으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부의 집중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혈연공동체가 와해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공동체 내에서의 공동 생활이 이제 각 가족을 단위로 한 개별적 생활로 바뀌어 갔다. 그에 따라 만인 대 만인이 투쟁하는 약육강식이 일반화하기 시작했다. 경쟁에서 뒤진 자들은 굶주림으로 내몰렸고, 경쟁에서 승리한 자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변화는 춘추 시대 내내 전개되어 갔다.
  논어 안에 보이는 부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은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신분제가 붕괴되면서 누구든지 새로운 시대 상황에 잘 적응하고,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부를 손에 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귀(貴)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부귀(富貴)는 이제 출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노력과 기타 여러 가지 재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다. 자공이 부를 축적한 것은 미래에 대한 탁월한 예측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賜不受命而貨殖焉 億則屢中―선진 18). 그러나 이렇게 자공처럼 부를 축적한 사람이 있는 이면에는 경쟁에서 낙오되어 쓰러져 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소수의 부의 축적을 위하여 다수가 희생되어야만 하는 사회, 그러한 사회가 당시 공자가 살던 사회였다.
  공자가 부(富)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기본적으로 부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상에서 기인하였다. 부의 집중은 많은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파괴하였고, 나아가 공동체적인 삶도 파괴하였다. 즉 인(仁)을 해쳤던 것이다. 인(仁)을 해치는 부(富)의 집중을 공자는 인정할 수 없었으리라.
 
12, 子之所愼 齊戰疾.
  공자께서 삼가신 일은 제사와 전쟁, 질병이었다.

  <해설> 제(齊)는 목욕 재계(齋戒)하는 것이니 제사이다. 제사는 국가나 종족의 통일성을 유지시키는 중요한 정치적 행사였다. 전쟁은 나라의 존망과 수많은 사람의 생사가 걸린 문제다. 질병 또한 개인의 생사가 달린 문제이니 삼가 신중할 수밖에 없다.

13, 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 曰 不圖爲樂之至於斯也.
  공자께서 제나라에 계실 때 소악을 들으시고, 석달 동안 고기 맛을 알지 못하셨다. 말씀하시길 “음악이 이런 경지에 이르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하였도다.”

  <해설> 소(韶)는 순임금의 음악이다. 일찍이 공자가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선하구나(子謂韶 盡美矣 又盡善也―팔일 25)라고  말한 바 있다. 석달이라 함은 오랫동안이라는 뜻이다.
  『대학(大學)』 7장에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맛을 모른다(心不在焉 視而不見 廳而不聞 食而不知其味).”라고 하였으니, 바로 이것을 일컬은 말이다.
  『사기』 「공자세가」에는 三月不知肉味 앞에 學之라는 두 글자가 더 있다. 즉 소악을 공부하느라고 석달 동안 고기 맛도 알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참고> 팔일 25, 위령공 10에서도 소(韶)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4, 冉有曰 夫子爲衛君乎. 子貢曰 諾 吾將問之. 入曰 伯夷叔齊何人也. 曰 古之賢人也. 曰 怨乎. 曰 求仁而得仁 又何怨. 出曰 夫子不爲也.
  염유가 말하길 “선생님께서 위나라 임금을 도와주실 것 같습니까?”
  자공이 말하길 “예, 제가 장차 여쭈어 보겠습니다.”
  들어가 말하길 “백이숙제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옛날의 어진 사람들이다.”
  “원망하였습니까?”
  “인(仁)을 구해 인(仁)을 얻었는데 무엇을 원망하겠느냐?”
  자공이 물러 나와 말하길 “선생님께서는 돕지 않으실 것입니다.”

  <해설> 위(爲)는 조(助)로 돕는 것이다.
  위군(衛君)은 위출공(衛出公) 첩(輒)으로 영공(靈公)의 손자이다. 노(魯)나라 정공(定公) 14년(BC 496) 위나라 영공은 아들인 괴외(蒯聵)가 자신의 부인인 남자(南子)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그를 국외로 추방하였다. 그후 영공이 죽자(노나라 애공 2년, BC 493) 남자는 괴외의 아들이자 영공의 적손(嫡孫)인 첩을 임금으로 삼았다. 괴외는 계승권을 주장하며 진(晋)나라의 원조를 얻어 위나라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아들인 첩은 군대를 보내 그를 저지하였다. 부자간에 왕위를 놓고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훗날 공자의 제자인 자로도 이 부자간의 왕위 다툼에 휘말려 희생되고 만다). 이 부자간의 왕위 다툼은 무려 16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낙(諾)은 승낙하는 말이다. 원(怨)은 원망하는 것이다.
  백이숙제도 형제간에 왕위 계승을 놓고 다툼이 있었다. 다만 다른 것은 괴외와 첩이 서로 왕위를 계승하려고 싸운 것과 달리 서로 왕위를 양보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공자가 13년간의 주유 생활 중 위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의 일이다. 염유는 위나라 출공 부자의 왕위 다툼에서 공자가 출공의 편을 들어 줄 것인지 궁금하였다. 그러나 직접 묻지는 못하고 자공에게 대신 질문케 하였다. 자공 또한 직접 묻지 못하고, 백이숙제에 대한 평가를 물으면서, 공자가 괴외와 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려고 하였다.
  이에 공자가 옛날의 어진 사람들이라고 대답하였으나, 자공은 아직 미진했다. 그래 다시 물었다. 원망함이 없었냐고. 즉 나라를 양보한 것을 원망하지는 않았느냐고 물은 것이다.
  백이는 아비가 동생인 숙제에게 대통(大統)을 잇도록 한 것에 대해 아무 원망을 나타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숙제가 자기에게 대통을 양보하려 한 것도 사양하였으니, 아비의 뜻을 충실히 받들은 것이다. 숙제는 비록 아비의 뜻을 어기고 형인 백이에게 양보하려 하였으나, 그것은 형제간의 우애를 상하려 하지 않기 위함이다. 둘 다 임금의 지위를 티끌처럼 여기고, 백이는 아비의 명을, 숙제는 형제간의 우애를 얻었다. 혼자만이 갖겠다는 이기심을 버리고 아비와 형제가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구해 결국 얻었으니 어찌 인(仁)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인(仁)을 구해 인(仁)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괴외는 아비인 영공의 뜻을 어기고 아들과 왕위를 다투었으니, 아비의 뜻을 거역한 것이다. 첩은 비록 조부인 영공의 뜻을 받들었다 하나, 왕위에 대한 욕심으로 아비인 괴외를 배척하였으니, 천륜을 저버린 것이다. 물욕에 눈이 어두워 모두 천륜을 저버렸으니, 어찌 공자가 그들을 도울 수 있겠는가?
  자공은 이에 공자가 위나라 임금을 돕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우회적인 질문에, 완곡하게 돌려 말하면서도 사태의 정곡을 찌르는 대답, 가히 논어에서만 볼 수 있는 문답이다.
  한편 다산은 夫子爲衛君乎의 위(爲)를 돕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 된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염유는 공자가 만일 출공 첩의 입장이라면 과연 임금의 자리에 오를 것인지 궁금하였다. 다만 그런 질문을 직접 하는 것은 스승에게 무례한 짓이 되므로, 자공으로 하여금 백이숙제의 일을 빗대어 공자의 의중을 살피게 한 것이라고 한다.

15, 子曰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거친 밥에 물을 마시고, 팔베개를 하고 자더라도, 또한 즐거움이 그 속에 있으니, 불의의 부귀는 나에게 뜬구름과 같도다.”

  <해설> 새삼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유명한 말이다.
  소사(疏食)는 잡곡 등을 섞어 지은 거친 밥이다. 황간(皇侃)본에는 소(疏)가 소(蔬)로 되어 있다. 채식(菜食)이란 의미다. 뜻은 큰 차이 없다. 曲肱而枕之는 팔베개를 하는 것이다. 

  <참고> 옹야 9에서는 안연이 가난 속에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은 것을 칭찬하고 있다.

16, 子曰 加我數年 五十以學 易可以無大過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몇 년을 더 살아, 나이 오십이 될 때까지 공부할 수 있다면, 또한 큰 잘못은 없게 되리라.”

  <해설> 해석이 학자에 따라 크게 엇갈리는 대목이다.
  먼저 하안(何晏)의 『논어집해』(고주)나 황간(皇侃)의 『논어의소』 등에서는 “내가 몇 년을 더 살아, 나이 오십이 될 때까지 역(易)을 공부할 수 있다면 큰 잘못은 없으리라.”라고 해석한다. 역(易)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역경(易經)』(周易이라고도 함)을 말하며, 五十以學 易可以無大過矣을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로 끊어 읽는다. 이들은 그 근거를 역(易)이 천리(天理)를 궁구(窮究)하고 성(性)을 다하여 천명(天命)에 이르게 하는 책이라는 사실과, 공자 스스로 위정 4에서 五十而知天命이라고 말한 데서 찾고 있다. 황간의 『논어의소』는 공자 나이 45, 6세 때의 말이라고 부연까지 하고 있다.
  주자의 『논어집주』(신주)는 유빙군(劉聘君)의 말을 인용하여 가(加)를 가(假), 오십(五十)을 졸(卒)의 오자(誤字)로 보고 있다. 주자는 그 근거를 『사기』 「공자세가」에 假我數年 若是 我於易則彬彬矣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서 찾고 있다. 가(加)는 가(假)로 되어 있으며, 오십(五十)이란 글자는 없다. 사마천(司馬遷)은 이 말을 공자 만년(晩年)의 것, 즉 공자가 13년 간의 주유 생활을 마치고 노나라로 돌아온 이후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공자 나이는 적어도 68세 이상이다. 따라서 오십(五十)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자도 역(易)을 『역경』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사마천도 이 문장을 공자가 말년에 역(易)에 심취하여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질 정도로 열심히 읽었다는 고사(韋編三絶) 바로 뒤에 기록하고 있다. 주자에 의하면 이 문장은 假我數年 卒以學易 可以無大過矣로 고쳐 읽어야 한다. 그 뜻은 “(하늘이) 내게 몇 년의 수명을 더 빌려주어 마침내 역(易)의 공부를 마칠 수 있다면, 큰 잘못은 없을 터인데.”이다.
  고주(古注), 신주(新注)를 비롯한 대부분의 주(注)가 비록 작은 차이는 있지만, 역(易)을 『역경(易經)』으로 보고, 공자가 『역경』을 공부할 필요성을 강조한 말로 해석하고 있다. 『사기』 「공자세가」에 공자가 역(易)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죽간(竹簡)을 엮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고사(韋編三絶)가 실린 것이 그 결정적인 근거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밀히 살펴 볼 때 무리가 있다. 우선 공자가 그렇게 역(易)을 중요시했다면 논어에 역(易)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논어 안에는 이 곳 말고는 어느 곳에서도 역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자로 22에 지금의 『역경』 항괘(恒卦) 九三의 효사(爻辭)에 보이는 不恒其德, 或承之羞란 말이 인용되어 있으나, 그것은 당시 전해오던 숙어(熟語)를 공자가 역(易)과 상관없이 인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헌문 28에 『역경』 간괘(艮卦) 상전(象傳)에 보이는 君子以思不出其位라는 말이 증자의 말로 나타나 있으나, 그것도 아마 당시 전해지던 숙어로, 『역경』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공자나 증자가 역(易)을 인용하였다면 易曰이라고 해야 한다. 『사기』의 위편삼절(韋編三絶)의 고사와 논어에 역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명백히 상호 모순되고 있다.
  또 공자 사후 약 백여 년 후에 태어나, 공자의 학문을 계승하였다고 자처한 맹자(孟子) 역시 그의 저서 『맹자』에서 역(易)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는 맹자가 역(易)에 대해 몰랐거나 또는 알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와는 무관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또 다른 증거이다.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질 정도로 공자가 역(易)에 심취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맹자가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을 까닭이 없다. 
  역(易)은 고대의 점술에서 기원했으며, 지금까지도 점술서적으로 애용되고 있다. 그러나 논어에 보이는 공자는 그러한 신비주의를 배척하고 있다. 그는 천명(天命)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모든 것은 인간이 인간의 일을 다하고 난 뒤의 문제라는 입장을 굳게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천도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공야장 12), 인간을 넘어서는 귀신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꺼렸으며(子不語怪力亂神―술이 20), 사람도 제대로 못 섬기는데 어찌 귀신을 제대로 섬길 수 있겠느냐(未能事人焉能事鬼―선진 11)고 하였고,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을 요구하는 자로의 청을 거절하였다(술이 34). 그런 그가 점술서인 역(易)을 애독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역(易)과 논어에 보이는 공자는 분명 서로 상반되고 있다.
  공자가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역의 십익(十翼)은 공자의 후대인 전국시대 말에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이 오늘날 역사학계의 통설이다. 공자 시대에 오늘날 전해지는 역(易)의 경(經)이 과연 존재하고 있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그것과 공자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역(易)이 『역경』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은 분명 무리다. 당(唐)의 육덕명(陸德明)의 『경전석문(經典釋文)』과 청(淸)의 혜동(惠棟)의 『구경고의(九經古義)』에 의하면, 한(漢)나라 때까지 전해지고 있던 논어의 세 종류, 즉 공자의 옛집 벽 속에서 발견되었다는 고문(古文) 즉 과두문자(蝌蚪文字)로 쓰여진 『고논어』, 제(齊)나라에서 전해졌다는 금문(今文) 즉 예서(隸書)로 쓰여진 『제논어』, 공자의 고향인 노(魯)나라에서 전해졌다는 역시 금문으로 쓰여진 『노논어』 중, 『노논어』에는 역(易)이 역(亦)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 설(說)에 의하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로 읽지 않고 五十以學 易(亦)可以無大過矣로 읽어야 한다. 여기서는 이 주장을 따랐다.
  
  <보충> 사마천의 『사기』는 그 문장의 빼어남과 탁월한 역사 의식 때문에 고래로 애독되어 왔으며, 그로 인해 사기의 내용은 거의 대부분이 무비판적으로 진실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사기』의 내용 중 적어도 「공자세가」에 관한 한 상당 부분 믿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우선 위편삼절(韋編三絶)의 고사가 그렇고, 또 공자가 노나라의 사구(司寇, 지금의 법무장관) 벼슬을 했다는 기록 역시 그렇다.
  논어에 그려진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위하여 무려 13년간이나 천하를 주유하다 결국 좌절만 한 채, 고향에 은거하여, 제자를 가르치고, 학문을 연마하면서 말년을 다 보낸 사람이다. 만일 그가 정말 노나라의 사구 벼슬을 하였다면, 그가 사구 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의 경륜을 펼친 행적들이 논어 안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행적은 논어 안에 한 군데도 없다. 오히려 자신은 대부의 말석에 있는 자라고 한 기록만 있을 뿐이다(以吾從大夫之後―선진 7). 논어를 편찬한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가 노나라의 사구 벼슬을 한 사실을 은폐하려 했거나 혹은 누락시켰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공자가 말했듯이 써 주면 나아가 도를 행하는 것(用之則行―술이 10)이 유가의 전통적 사상이기 때문이다.
  공자와 비교적 가까운 시대의 문헌 중에 공자가 사구 벼슬을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은 『춘추좌씨전』, 『맹자』, 『묵자(墨子)』 등이다. 『묵자』에 실린 내용은 「비유(非儒)하」편의 공자가 관문의 기둥을 들어 올려 계손씨를 도망가게 하였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뿐이다. 그마저도 크릴(H. G. Creel)의 주장에 의하면 후세에 조작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춘추좌씨전』에도 공자가 사구 벼슬을 하였다는 기록은 정공(定公) 원년에 공자가 사구가 되어 도랑을 파 제후들의 묘를 합쳤다는 기이한 내용뿐이다. 『맹자』에 나오는 내용도 「고자(告子)하」 6의 공자가 제사 때 쓴 구운 고기(燔肉)가 이르지 않아 사구 직을 버리고 떠났다는 이야기 하나이다. 크릴은 이와 같은 것을 근거로 하여, 공자가 노나라의 사구 벼슬을 하였다는 사실을 후대의 인물들에 의하여 가공(架空)된 것으로 보고 있다(H. G. 크릴, 『孔子, 인간과 신화』, 이성규역 지식산업사, p 51~53).
  이밖에 『사기』 「공자세가」의 내용 중 공자가 소정묘(少正卯)를 베어 죽였다는 기록도 가공의 것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공자와 가까운 시대의 문헌 속에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찍이 청(淸)의 염약거(閻若璩)를 위시한 많은 학자들이 그러한 사실이 없었다고 변증하고 있다.
  이러한 가공(架空)의 설화 중 대부분은 공자가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추앙이 높아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공자를 성인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들로 추정된다. 그러나 공자를 폄하(貶下)하기 위한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 공자가 노자(老子)를 만나 그로부터 예를 배웠다는 설화는 도가(道家)가 유가(儒家)를 모해하기 위해 날조한 것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노자는 그 생존 여부조차 불확실한 가공의 인물이며, 그가 지었다는 『도덕경(道德經)』 또한 공자로부터 한참 뒤인 전국 시대의 저술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논어조차 공자의 말이라고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어떤 것은 명백히 공자의 사상과 배치되는 그러한 것들이 뒤섞여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특히 논어의 후반 10편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공자의 행적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문헌은 논어 밖에 없다는 것도 또한 현실이다. 공자에 관한 기록을 접할 때 모두가 주의하여야 할 점이다.

17, 子所雅言 詩書執禮. 皆雅言也.
  공자께서 기휘(忌諱)하지 않고 원문 그대로 바르게 읽으신 것은 『시』와 『서』를 읽으실 때와 예를 집행하실 때였다. 이 때에는 모두 원문 그대로 바르게 읽으셨다.

  <해설> 바르게 읽는다는 것은(雅言) 원문에 임금이나 조상의 이름과 같은 글자가 나오더라도 그것을 피하지 않고(忌諱), 원문 그대로 읽는 것이다. 『시』와 『서』, 그리고 예를 집행할 때 기휘(忌諱)하지 않고 그대로 읽는 것은 본문의 뜻에 어긋남을 경계한 것이다. 고주의 정현의 설(說)이다.
  주자는 雅言의 아(雅)를 상(常)으로 풀이하여 “항상 말씀하시는 것은”이라고 해석한다. 

18, 葉公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에 대해 물었으나 자로가 대답하지 못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너는 어찌하여 ‘그 사람됨이 학문에 분발하면 먹는 것도 잊으며, 얻는 바가 있으면 그것을 즐겨 근심을 잊고, 늙어 가는 줄도 모르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해설> 섭공(葉公)은 초나라 섭 지방을 다스리던 사람으로, 성은 심(沈), 이름은 제량(諸梁)이다. 초나라에서 명망이 높았던 사람이다. 공(公)은 원래 애공(哀公), 위령공(衛靈公)과 같이 제후국의 군주를 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초(楚)나라가 주(周)의 법제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를 왕(王)이라고 칭하였기 때문에, 초의 대부인 섭공도 공(公)이라 칭한 것이다.
  發憤忘食은 아직 이치를 터득하지 못하면 학문에 분발하여 끼니조차 잊는 것이고, 樂以忘憂는 이치를 터득하면 그것을 즐겨 근심을 잊는 것이다.
  자로가 스승을 가까이 모신 지 오래되어 스승에 대해 모를 리 없지만, 갑작스런 질문에 무어라 한마디로 대답하지 못한 것이다. 안연도 공자에 대해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으시며, 뚫을수록 더욱 단단하시다. 바라보면 앞에 계시더니 홀연 뒤에 계신다(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然在後―자한 10).”라고 한 바 있으니, 자로가 공자에 대해 한 마디로 말하기란 실로 어려웠으리라.
  공자는 스스로를 항상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참고> 공자가 자신을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처하고 있었음은 공야장 27, 술이 2에서도 알 수 있다.
    
19, 子曰 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힘써 탐구하는 사람이다.”

  <해설> 민(敏)은 유보남의 『논어정의』에 의하면 면(勉)으로 힘쓰는 것이다.
  앞의 글과 마찬가지로 배움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공자의 학덕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힘써 옛 문헌을 탐구하고 깊이 사고한 노력의 결과이다.

  <참고> 계씨 9에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자가 으뜸이요, 배워서 아는 자는 그 다음이고, 벽에 부딪치고 나서야 배우는 자는 또 그 다음이며, 벽에 부딪쳐서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 자는 가장 못난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술이 1에서도 공자는 자신이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말하고 있다.
 
20, 子不語怪力亂神.
  공자께서는 괴이한 일과 완력에 대한 것,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 그리고 귀신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해설> 청(淸)의 황식삼(黃式三)의 『논어후안(論語後案)』에 의하면 어(語)는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설명하거나 가르쳐 말하는 것이다.
  주자의 『논어집주』에 인용된 사량좌(謝良佐)의 말로 해설을 대신한다. “성인은 정상적인 것(常)을 말하고 괴이한 것을 말하지 않으며, 덕(德)을 말하고 완력을 말하지 않으며, 다스리는 것(治)을 말하고 어지러움(亂)을 말하지 않으며, 사람의 일(人)을 말하고 귀신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
  한편 황간의 『논어의소』에 인용된 이충(李充)의 주장에 의하면 怪力亂神은 怪力과 亂神 두 가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올바른 이치에서 나오지 않은 힘이 괴력(怪力)이며, 바르지 못한 곳에서 유래한 신(神)이 난신(亂神)이라고 한다.

21,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세 사람이 함께 가면, 그 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좋은 면을 골라 그것을 따르고, 좋지 않은 것에서는 나의 허물을 고친다.”

  <해설> 비록 세 사람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그 중에는 무언가 나보다 나은 점이 한 가지는 있을 것이다. 그것을 따라 배운다. 좋지 못한 점이 있으면 그것을 보고 나의 허물을 고친다. 그러니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형병(邢昺)의 『논어주소(論語注疏)』는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언행(言行)이 선한 자이고, 또 한 사람은 선하지 않은 자이니, 선한 자를 따르고, 선하지 않은 자에게서는 나의 허물을 고친다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세 사람 중 꼭 한 사람은 선하고, 한 사람은 선하지 않다는 가정 자체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참고> 이인 17

22, 子曰 天生德於予 桓魋其如予何.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셨는데 환퇴가 나를 어찌하겠는가?”

  <해설> 환퇴(桓魋)는 송나라의 사마(司馬, 지금의 국방장관)로, 성은 상(向)이요, 퇴(魋)는 이름이다. 송환공(宋桓公)의 후예이므로, 환(桓)씨라고도 한다.
  사마천은 『사기』 「공자세가」에서 “공자가 조(曹)나라를 떠나 송(宋)나라로 갔다. 공자는 제자들과 큰 나무 아래서 예에 대해 강습하고 있었다. 그때 송나라의 사마(司馬) 환퇴가 공자를 죽이려고 그 나무를 뽑아버렸다. 공자는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제자들이 말하였다. ‘빨리 떠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는 믿기 어려운 기이한(사람을 죽이기 위하여 큰 나무를 뽑는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가 안 되는 말이다.) 일화(逸話)를 소개한 뒤, 바로 연이어 공자의 이 말을 기록하고 있다. 
  공자가 말한 덕이란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문물(선왕의 도)을 이어받아 후대에 전할 수 있는 능력이다. 공자는 자신의 사명이 선왕(先王)의 도(道)를 후대에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고(자한 5), 그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가졌다. 그러한 자신감이 여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보충> 공자가 말한 하늘(天)이란 원래 주족(周族)의 최고신이었다. 은나라는 자신의 최고신을 제(帝)라고 칭하였고, 주나라는 천(天)이라고 칭하였다. 천(天)은 우주의 최고 주재자, 인간 운명의 지배자로 숭배받았다. 그러나 인격신이라든가, 또는 어떠한 종교적 체계 하에서의 숭배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참고> 자한 5
 
23, 子曰 二三子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是丘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너희는 내가 무엇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숨기는 것이 없다. 내가 무엇을 행하고 너희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나이다.”

  <해설> 이삼자(二三子)는 제자들을 부르는 말로 너희들이라는 뜻이다. 여(與)는 시(示)로 보여주는 것이다.
  학문이란 훌륭한 스승이 가르친다고 해서 결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본인 스스로의 노력이 뒤따르지 않는 한 높은 성취는 불가능하다. 공자의 학덕이 높고 깊어서 제자들이 미치지 못하는 바이나, 제자들 스스로 각고의 노력을 하지 않고, 거꾸로 스승이 무언가 숨기고 가르치지 않은 것이 있지 않나 의심한 것이다.

  <보충> 공자는 흔히 중국 최초로 사학(私學)을 만들어, 제자들을 교육한 사람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공자 이전에는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각 분야의 인력은 직업의 세습을 통해 확보했었다. 당연한 결과로 교육은 가문 내에서만 전해지는 비전(秘傳)의 형태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자의 시대로 내려오면서 세습적인 신분 질서는 점차 붕괴되어 갔다. 또한 각 나라마다 부국강병을 위해, 보다 많은 전문가 집단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비전의 형태로 가문 내에서만 전해지는 전통적인 교육으로는 도저히 이러한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자연스럽게 이들을 양성할 새로운 교육 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공자가 제자들을 모아 가르친 것은 공자 자신의 욕구도 있었겠지만, 또한 이러한 시대적 요청이 반영된 것이었다.
  한편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지식의 습득이야말로 세습의 굴레에서 벗어나 사회적으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그러기에 저마다 훌륭한 스승을 찾아 나섰다. 춘추전국 시대의 제자백가(諸子百家)는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성립한 것이다.

24, 子以四敎 文行忠信.
  공자께서는 네 가지를 가르치셨으니, 학문과 덕행과 성실과 신의였다.

  <해설> 문(文)은 학문, 행(行)은 덕행, 충(忠)은 성실, 신(信)은 신의이다.
  학문과 덕행은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이요, 충신은 밖에 나아가 처신할 때의 규범이다.

25, 子曰 聖人吾不得而見之矣 得見君子者 斯可矣. 子曰 善人吾不得而見之矣 得見有恒者 斯可矣. 亡而爲有 虛而爲盈 約而爲泰 難乎有恒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성인은 내가 만나볼 수 없으니, 군자라도 만나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겠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착한 사람은 내가 만나볼 수 없으니, 마음이 한결같이 변함없는 사람이라도 만나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겠다. 없으면서 있는 체하고, 비었으면서 가득 찬 체하며, 가난하면서 부유한 체하면, 마음이 한결같이 변함없기가 어렵도다.”

  <해설> 항(恒)은 마음이 한결같아 변함이 없는 것이다. 거짓으로 꾸미는 자는 언젠가는 그 거짓이 탄로나니, 한결같이 오래갈 수 없다.
  중간에 있는 자왈(子曰)에 대해 주자는 쓸데없이 잘못 들어간 연문(衍文)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유보남(劉宝楠)은 『논어정의(論語正義)』에서 말을 한 때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子曰이 다시 쓰인 것이라고 한다.
  고주에서는 세상에 명군(明君)이 없음을 한탄한 말이라고 하나, 그냥 그대로 세상에 사람이 없음을 한탄한 말로 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참고> 자로 22에 “마음이 한결같이 오래가지 못하는 자는 무의(巫醫)도 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26, 子釣而不綱 弋不射宿.
  공자께서는 낚시질은 하시되 주낙질은 하지 않으셨고, 주살로 새를 잡되 둥지에서 잠자는 새는 쏘지 않으셨다.

  <해설> 강(綱)은 긴 줄에 많은 낚시를 매어 고기를 잡는 것으로 주낙이다. 익(弋)은 끈이 달린 화살이다. 숙(宿)은 둥지에서 잠들어 있는 새이다. 
  어쩔 수 없어 낚시질과 사냥을 하기는 하나, 도에 어긋나지 않으려는 것이다.

27, 子曰 蓋有不知而作之者 我無是也. 多聞擇其善者而從之 見多而識之 知之次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알지도 못하면서 지어내는 자들이 세상에는 있는 모양이나, 나는 그렇지 않다. 많이 들어서, 그 중 착한 것을 골라 따르고, 많이 보아,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이 아는 것에 다음가는 것이다.”

  <해설> 지(識)는 기억하는 것, 차(次)는 한 단계 못한 것이다.
  많이 보고 많이 듣되 의심스러운 것은 제쳐놓고 그 나머지를 실천하면 후회와 허물이 적을 것이다(多聞闕疑 愼言其餘 則寡尤 多見闕殆 愼行其餘 則寡悔―위정 18). 많이 보고 많이 들어 그 중 옳은 것을 따르고 기억한다면 완전히 아는 것(知)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그것에 다음은 갈 수 있을 것이다.
  고주의 공안국(孔安國)은 知之次也를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것(生知)의 다음가는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28, 互鄕難與言 童子見. 門人惑. 子曰 與其進也 不與其退也. 唯何甚. 人潔己以進 與其潔也 不保其往也.
  호향의 사람들은 더불어 이야기하기 어려운 사람들인데, 그 마을 동자가 공자를 알현하였다.
  문인들이 의아해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허용하지만, 뒤로 물러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어찌 그리 심하게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자기 몸을 씻고 나오면, 그 씻음을 허용하고, 예전의 일은 남겨 두지 않는다.”

  <해설> 호향(互鄕)은 마을 이름으로 확실한 위치는 불분명하다. 이 글로 보아 마을의 풍속이 좋지 않은 곳인 듯하다. 여(與)는 허(許)로 허용하는 것이다. 與其進也 不與其退也는 선(善)으로 나아감을 허용하고, 악(惡)으로 후퇴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왕(往)은 전일(前日)이다.
  자기 몸을 씻는다는 것은 허물을 고치고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누구나 과거의 허물을 씻고 선으로 나오면, 그것을 인정하고 그를 상대해야지, 과거의 허물에 연연하여서는 안된다. 호향의 동자가 공자를 알현하고자 한 것은 도(道)로 나아가고자 한 것이다. 그 마음가짐을 높이 사야지, 과거의 그의 허물에 연연하여 그를 거절하는 것은 너무 심한 짓이다.
  한편 주자는 이 장에 착간(錯簡)이 있지 않나 의심하고 있다. 주자에 의하면 人潔己以進 이하의 14자는 與其進也의 앞에 있어야 한다고 한다.  

29, 子曰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인(仁)이 먼 것이냐? 내가 인(仁)을 하려고만 하면, 인(仁)이 내게 이른다.”

  <해설> 누구나 인(仁)을 멀고 어려운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인(仁)은 결코 멀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누구나 단 하루만이라도 인(仁)에 힘을 쏟을 능력은 다 갖고 있으며(有能一日用其力於仁矣乎 我未見力不足者―이인 6), 하루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가니, 인(仁)을 행하는 것은 나로 말미암지, 남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안연 1). 시작이 반이니, 인(仁)을 행하려고 생각한 순간, 인(仁)은 내게 이른다.

30, 陳司敗問 昭公知禮乎. 子曰 知禮. 孔子退. 揖巫馬期而進之曰 吾聞君子不黨 君子亦黨乎. 君取於吳 爲同姓 謂之吳孟子. 君而知禮 孰不知禮. 巫馬期以告. 子曰 丘也幸. 苟有過 人必知之.
  진나라 사패(司敗)가 묻기를 “소공(昭公)은 예를 알고 계셨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알고 계셨습니다.”
  공자께서 물러가시자, 사패가 무마기에게 읍을 하고 불러 말하길 “내가 듣기로 군자는 편당을 짓지 않는다고 했는데, 군자도 편당을 짓습니까? 소공이 오나라에서 부인을 맞아들였으니 성이 같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부인을 오맹자라고 불렀습니다. 소공이 예를 안다면 그 누가 예를 모르겠습니까?”
  무마기가 이를 고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참으로 행복하도다. 진실로 잘못이 있으면, 남이 그것을 알려주는구나.”

  <해설> 진(陳)은 나라 이름으로 지금의 하남성 회양(淮陽)현 일대에 있던 작은 나라이다. 사패(司敗)는 사구(司寇)라고도 하며, 형벌을 관장한다. 소공(昭公)은 노나라의 임금이다. 무마기(巫馬期)는 공자의 제자로 무마(巫馬)는 성, 기(期)는 자(字)로, 이름은 시(施)이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공자보다 30살 어리다고 한다. 당(黨)은 편당(偏黨)를 지어 서로의 잘못을 감싸주는 것이다.
  주나라에서는 동성(同姓) 간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었다. 오(吳)나라는 문왕(文王)의 큰 아버지인 태백(泰伯)의 후예이고, 노(魯)나라는 문왕의 아들인 주공(周公)의 후예이니 둘 다 같은 희(姬) 성이다. 따라서 소공과 오나라 여인과의 혼인은 법으로 금지된 것이었다. 원래 제후의 부인은 그 본국의 이름과 성으로 부르니, 오나라 출신의 소공 부인은 마땅히 오희(吳姬)라고 불러야만 했다. 오맹자(吳孟子)라고 한 것은 동성임을 숨기기 위해서이다. 사패가 그것을 지적하면서, 공자가 노나라 사람이라 자기 나라 임금인 소공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냐는 뜻으로, 군자도 편당을 짓습니까하고 물은 것이다.
  공자가 소공이 동성의 부인을 아내로 취한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다만 공자는 노나라의 백성된  사람으로서 자기 임금의 허물을 입에 담기 어려웠으리라. 그래서 소공이 예를 안다고 대답했던 것이고, 사패의 날카로운 지적에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것이다.

31, 子與人歌而善 必使反之 而後和之.
  공자께서 남과 함께 노래를 부르시다 그 사람이 잘하면, 반드시 다시 부르게 하시고, 뒤에 화답하셨다.

  <해설> 다시 부르게 하는 것은 그 사람으로부터 배우려고 하는 것이요, 뒤에 화답하는 것은 그 배운 것을 함께 하고자 한 것이다.

32, 子曰 文莫吾猶人也. 躬行君子 則吾未之有得.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학문이야 어찌 내가 남만 같지 못하겠느냐? 그렇지만 몸소 군자의 도를 행하는 것은 아직 이루지 못하였도다.”

  <해설> 막(莫)은 의문을 나타내는 말로 다산에 의하면 豈不, 즉 어찌 ~ 하지 않겠느냐의 뜻이다.
  겸손의 말로 보이지만, 어찌 보면 높은 학덕을 갖고서도 그것을 펼쳐 보일 기회가 없었던 공자의 한탄 섞인 독백일 수도 있다.
  황간의 『논어의소』에는 연(燕)과 제(齊) 지방에서는 힘을 다해 노력하는 것(勉强)을 문막(文莫)이라고 한다는 난조(欒肇)의 설(說)이 소개되어 있다.
 
33, 子曰 若聖與仁則吾豈敢. 抑爲之不厭 誨人不倦 則可謂云爾已矣. 公西華曰 正唯弟子不能學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성(聖)과 인(仁)이야 내가 어찌 감히 바라겠느냐. 다만 그것을 행하기를 싫어하지 않고,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렇다고 할 따름이다.”
  공서화가 말하길 “바로 그것이 제자가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해설> 누군가가 공자를 성인(聖人)이나 인자(仁者)에 비유한 모양이다. 그에 대한 공자의 겸양의 말이다.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학문을 연마하며, 제자들을 양성하는 공자의 모습과, 또한 그 겸손함, 공서화에게는 이런 스승이 존경 이상의 대상이었으리라.

  <참고> 술이 2에도 學而不厭 誨人不倦이란 말이 나온다.

34, 子疾病 子路請禱. 子曰 有諸. 子路對曰 有之. 誄曰 禱爾于上下神祇. 子曰 丘之禱久矣.
  공자께서 병환이 위중하시자, 자로가 기도를 드릴 것을 청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런 것이 있느냐?”
  자로가 대답하여 말하길 “있습니다. 뇌에 이르기를 ‘천지신명께 빈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런 것이라면 내가 기도한 지 오래되었다.”

  <해설> 질병(疾病)은 병(病)이 중한 것이다. 도(禱)는 귀신에게 비는 것이다. 有諸는 기도를 드리는 선례(先例)나 근거가 있느냐란 뜻이다. 뇌(誄)는 죽은 이의 생전의 공덕을 칭송하여 기리는 글이다. 상하(上下)는 천지(天地)이며, 천(天)을 일컬어 신(神)이라 하고, 지(地)를 일컬어 기(祇)라고 한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기도할 곳조차 없으니(獲罪於天 無所禱也―팔일 13), 먼저 도리에 맞게 올바르게 사는 데 힘을 쓸 일이다. 원래 기도라고 하는 것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개과천선하면서 하늘의 도움을 비는 것이다. 도리에 맞게 올바르게 살고자 노력하는 일이라면, 이미 오래 전부터 해 온 것이니, 새삼스레 기도해야 할 이치가 없다. 죽고 사는 것은 명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死生有命―안연 5).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더 나아가 자기의 운명에 대해서까지 초연하였으니, 진정 공자야말로 성인으로 칭송함에 부족함이 없다.

  <보충>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바를 먼저 다한 이후에, 나머지는 운명에 맡기는 것이 진정 인간의 도리일 것이다. 공자는 알 수 없는 신비의 존재에게 인간의 일을 떠넘기지 않았다. 공자는 인간의 차원을 뛰어넘는다고 생각되는 운명, 하늘, 귀신 등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인간의 일 밖의 것이고, 따라서 인간 세상에서 다룰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에게 있어 자기가 어쩔 수 없는 것, 자기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내가 할 수 있는 것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그는 무신론자는 아니었을지 모르나, 인간본위주의자였음에는 틀림없다. 

35, 子曰 奢則不孫 儉則固. 與其不孫也寧固.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치하면 불손해지고, 검약하면 고루해지나, 그 불손한 것보다는 차라리 고루한 것이 낫다.”

  <해설> 불손한 것이나 고루한 것이나 모두 중용(中庸)에서 벗어나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그러나 불손함은 이미 예를 해친 것이고, 고루함은 아직 예에 미치지 못한 것이니, 사치하여 불손한 것의 폐단이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다.

  <참고> 팔일 4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36, 子曰 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편안하고 너그러우나, 소인은 항상 초조하다.”

  <해설> 탄(坦)은 마음이 평안한 것이요, 탕탕(蕩蕩)은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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