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과 ‘자연’ 속에서 인간과 역사를 살핀 지리학자, 최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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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과 ‘자연’ 속에서 인간과 역사를 살핀 지리학자, 최영준
  • 김락기
  • 승인 2024.04.2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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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34) 지리학자 故 최영준 교수 - 김락기 / 문학박사

 

“인간은 자연의 은혜를 망각하며 살고 있다.”

몇 년 전 어느 학회에서 논문 심사를 의뢰해서 원고를 봤더니 입론의 전제가 완전히 잘못되어 게재 불가라는 의견을 보낸 적이 있다. 강화군 교동도를 고구려와 백제의 전장터로 보는 근거로 교동이 너른 섬이라 고구려의 중장기병을 활용하기 쉬웠다고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동이 현재와 같은 큰 섬으로 변모한 것은 주로 고려 후기 이래의 지속적인 대규모 간척사업의 결과였다. 삼국시대의 교동은 화개산, 율두산, 수정산 등 각각의 산봉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고, 주변에 갯벌이 형성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현재의 모습을 과거에도 그랬는 줄 알았으니 결론이 제대로 날 리가 없다. 교동뿐만이 아니다. 강화도 역시 적어도 조선 후기 선두포에 제방을 쌓기 전까지는 마리산 일대가 고가도라는 섬과 강화 본섬으로 구별되는 곳이었다.

이런 경향을 예견이라도 한 듯이 이미 오래전에 연구의 기초를 자연 또는 땅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 이가 고려대학교 지리학과 교수를 역임한 최영준(1941~2019)이다.

 

“인간은 자연의 은혜를 망각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향토연구를 수행할 때 연구의 기초를 자연 또는 땅에 두지 않고 역사, 정치, 경제 등 비가시적인 속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당연시한다. 지역연구가 특정 사건과 그 사건의 주역이었던 인물 중심으로 전개될 뿐 대다수 백성들의 생활은 소홀히 취급되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어떤 방법으로 농토를 넓혀 농사를 지었으며, 어떤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어 살아왔는지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지배층의 입장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일상적인 일은 기록할 가치가 별로 없었고, 백성들 자신은 기록하고 보존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최영준, 《국토와 민족생활사》, 1997, 한길사, 서문 중)

 

지리학자로서 최영준을 세상에 깊이 각인시킨 것은 1990년 가을에 펴낸 《영남대로(嶺南大路)》(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였다. “한국고도로의 역사지리적 연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 발간 후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에는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는 도로문명이 없었던 것처럼 왜곡하고 있으나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도로를 비롯 아주 오랜 시절부터 우리 나름대로의 도로문명이 있었다”면서 “이제는 일본인들이 만든 경부가도(京釜街道)라는 명칭은 우리식으로 고쳐져야 한다”는 발언이 실려있다.

 

최영준 교수의 《영남대로》 발간 소개 기사
(〈조선일보〉 1990년 11월 7일)

 

지금에야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최영준이 ‘영남대로’에 착목하여 차근차근 연구를 진행해 나가던 1970년대만 하더라도 반신반의하던 분위기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지리서와 고지도 등에 대한 실증적 연구는 물론이고 꾸준한 현장답사를 통한 검토와 고증이 결합되어 ‘가설’이 ‘통설’이 된 전형이라고 할 수도 있다.

현장답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사실 현장 수집만큼 의미 있는 작업도 없을 겁니다. 죽은 기록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 선인들이 다녔던 실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만큼 정확한 사료(史料) 연구가 없는 거죠. 또한 그 신빙성에는 다소 의심이 가더라도 고로(古老)들의 고증은 주관적 요소가 개입된 사료와 비교해 실제 역사와의 불가피한 거리는 비슷하다고 봅니다.”(정소연, 〈저자인터뷰-"영남대로" 펴낸 최영준 교수〉, 《출판저널》74권, 대한출판문화협회, 1990)라고 직접 밝히기도 했다.

이런 경험과 성과를 가진 학자로서 지리학과 연관되어 늘 논란이 되는 ‘풍수지리’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990년을 전후하여 풍수지리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자 《한국사 시민강좌》제14집(1994)에 〈풍수와 『택리지』〉란 논문을 싣고 “풍수는 땅이 형세를 인간의 길흉화복에 관련시키는 동양적 자연관의 하나로 이성을 통해 자연을 객관적으로 규명하기보다 직관에 의존하는 태도를 갖고 있어 경험과학이 될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최영준 교수의 풍수지리설 비판 관련 기사
(〈동아일보〉 1994년 3월 8일)

 

1997년에는 《국토와 민족생활사》라는 저서를 통해 국토에 대한 지리적 인식 변화를 바탕에 두고 남한강 수운(水運)의 성쇠, 강화지역의 간척과 경관 변화 등 구체적으로 다루었으며, 도시와 촌락의 경관 사례로서 조선시대 한양 근교와 개항기 인천의 도시화 등을 고찰했다.

 

강화지역 간척사업의 전개과정
(최영준, 《국토와 민족생활사》, 1997, 한길사, 186~187쪽)

 

강화도와 주변 섬들의 간척에 따른 경관 변화를 알기 쉽게 표현한 위 그림은 조수간만의 차가 큰 인천과 인근 섬에서 간척에 의한 지형변화가 얼마나 큰 것이었으며, 그것이 주민의 생활에 다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을 간결하게 보여주고 있다.

《국토와 민족생활사》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강화지역의 해안저습지 간척과 경관의 변화〉와 〈개항기 인천의 도시화와 경관의 변화〉라는 논문 두 편이 실려있는데, 인천에 대한 최영준의 학문적 관심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억지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이 책을 펼치면 순서대로 '강화 용두포대', '화도진도(花島鎭圖)', '대불호텔', '강화부 전도의 부분(마리산과 정족산성 일대)', '한강 뗏목'이란 제목의 컬러 사진 다섯 장이 실려있는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네 장이 인천과 관련된 것이다. 인천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없다면 이렇게 사진을 배열할 리가 없다.

 

중학생 지리박사

최영준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서울과 평양이라는 엇갈린 언급이 있으나 1948년 인천에 정착하여 인천중학교를 제7회로, 제물포고등학교를 제4회로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에 진학했다. 지리학을 공부하게 된 연유는 인중 재학시절 길영희 교장의 권유에 의한 것이라 하는데, 여기에 대해 본인이 다음과 같이 직접 남긴 글이 있다.

 

“고 길 교장선생님은 지도를 잘 그리고 외국의 풍물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의 소질과 능력을 발견하시고 지리학도가 되도록 이끌어 주신 분이다. 중학교 학생의 능력이란 믿을 만한 것이 못되고, 그 소질 역시 나이가 들면서 변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장선생님은 필자가 만든 지도책 한 권과 육교적 위치에 있는 국가의 역사발전과정에 관한 글 한 편을 보시고 격려 말씀을 해주셨다. 동시에 서울사대 지리과의 최복현 선생님께 말씀하셔서 내가 지리학을 공부하도록 유도하셨다.

길 교장선생님께서 이러한 사실을 조회 시간에 말씀하신 후 친구들은 때때로 나를 지리 박사라 부르고, 서울사대 입학이 거의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인정하였다.”(최영준, <지리학도의 길>,《길영희선생추모문집》,1986, 법문사, 314~315쪽)

 

까까머리 중학생들 사이에서 교장선생님이 직접 친구 이름을 거명하면서 칭찬을 하고 대학교수에게 소개해 공부하도록 할 거라고 하니 주변 반응이 뜨거웠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의외의 변수가 있었다.

 

“서울대 입학 요강에 색맹(色盲)․색약자(色弱者)는 사대 지리과에 입학할 수 없다는 내용이 있었다. 수채화를 즐겨 그렸기 때문에 내 눈이 색각이상(色覺異常)이라고 생각한 적이 전혀 없었는데, 신체검사 결과 이상자로 판명되었으니 합격이 취소될 판이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신속하게 친분이 있으신 교수들께 어려운 청을 드리는 한편, 고태흠 선생님으로 하여금 직접 지리과를 찾아보시도록 하셨다. 고 선생님께서는 여러 차례 나를 데리고 서울 출장을 다니셨는데, 서울사대 교수회의 때마다 회의장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셨다. 길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모교 은사님들의 정성에 힘입어 역사과에 등록하고 후에 지리과로 전과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사대 지리과의 색각이상자에 대한 규제조항은 삭제되었다.”(최영준, 〈지리학도의 길〉, 앞의 책, 316쪽)

 

한 학생의 장래를 위해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선생이 흔치는 않을 것이다. 또 길영희 교장이 이렇게 신경 쓴 학생이 최영준만도 아니었다. 이제는 먼 과거의 일화(逸話)가 되어버린 스승과 제자다. 반전의 반전은 미국 루이지애나대학 환경연구소 신체검사에서는 이상 없이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길영희 교장이 그렇게 나서지 않았다면 당시 한국의 검사기법, 기술의 문제로 훌륭한 지리학자 한 명을 잃을 뻔한 셈이다.

이렇듯 지리학자로서 최영준의 삶은 이미 인중 재학 시에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인천은 그에게 ‘길’을 주제로 연구하는 ‘길잡이’가 되었다. 스스로도 어린 시절의 경험과 대학 시절 경인가도(京仁街道)를 오가며 쌓은 추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교적 자세하게 밝혔다.

 

“6․25 전쟁 때 나는 초등학교 3학년생이었다. 우리 집은 인천 부근에 있었는데, 형과 함께 주안을 거쳐 소사(현재의 부천시)까지 심부름을 다녀오게 되었다. 마침 신고 갔던 고무신에 구멍이 뚫렸던 터라 조그만 돌이나 왕모래가 신 속으로 들어오면 발바닥이 쓰리고 아팠다. 결국은 신을 벗어 들고 길을 걷게 되었는데, 길 가장자리에 수북이 쌓인 먼지를 밟을 때는 감촉이 부드러웠으나 자갈이 깔린 길에서는 고통이 적지 않았다.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는 부천시까지의 거리가 아득히 멀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전철로 20여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친구들과 서울역에서 만나 인천까지 도보 여행을 여러 차례 해본 적이 있다. 한 학기를 마치는 날이나 크리스마스 날 저녁에 출발하여 길을 가면서 구멍가게마다 들러서 술을 한 잔씩 마시고 얘기를 나누며 걸었던 즐거움은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도 당시의 경인가도변의 경관을 머릿속에 상세히 그려 볼 수 있는데, 나는 그 당시의 경험을 통하여 두 발로 길바닥을 핥듯이 가면 많은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최영준, 〈길의 역사, 길의 사상〉,《한길역사기행》1, 한길사, 1986)

 

“대학 졸업을 앞두고 세배를 드리러 가니 길 교장선생님께서 『최 군은 지리학의 대가가 되어야 해』라고 하셨다. 졸업 후 3년간 모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다가 입대하여 월남에 파견되면서 공부하고자 하는 의욕을 갖게 되었다”(최영준, 〈지리학도의 길〉, 앞의 책, 316쪽)고 하는 데 1964년에 학사학위를 받고 인중․제고를 비롯한 여러 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군 복무 후인 1971년 3월에 교사 생활과 병행하여 서울대 교육대학원 지리교육전공에 입학해 1974년에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학위논문의 주제는 다름 아닌〈개항을 전후한 인천의 지리적 연구〉였다.

미국 루이지애나대학에 유학 후 귀국하여 1982년에 고려대 지리교육과 교수로 자리 잡고 다양한 분야에서 착실한 연구 성과를 쌓아갔다.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84년 3월 1일 길영희 교장이 세상을 떠났다. “길 교장선생님 빈소에서 만난 동창생들은 나를 가리켜 교장선생님께서 예언하시고, 또 나 자신이 가졌던 소망을 이룬 사람이라고 말하였다.”(최영준, 〈지리학도의 길〉, 앞의 책, 314쪽)며 ‘대가가 되어야 해’라는 스승의 말씀을 꿈결에 들을 정도로 인연의 각별함이 있었던 것 같다.

스승의 당부를 실천한 그의 성과는 “한국 역사지리학은 ‘최영준’이라는 이름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초석을 다진 선학이 없지 않으나 밀도 있는 연구를 통해 독립된 방법론을 정립함으로써 인문학 내 확고한 위상을 구축한 그의 역할이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홍금수, 〈여천(如泉〉최영준(1941~2019)의 역사․문화지리학〉, 《문화역사지리》32-1,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2020, 211쪽)라는 후학의 평가에 모두 들어있다.

 

최영준 교수(〈경향신문〉 2010년 9월 13일)
최영준 교수(〈경향신문〉 2010년 9월 13일)

 

 

“농사는 내 삶과 학문을 깊이 들여다보는 수신의 길입니다”

2010년 9월 13일 자 〈경향신문〉에는 “홍천강변에서 20년째 농사짓는 ‘농사꾼 교수’ 최영준”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1989년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의 홍천강변에 집과 땅을 마련한 뒤 주중에는 교수로서, 주말과 방학에는 농사꾼으로 살아온 ‘이중생활’을 담은 책 《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이란 책을 내어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이다.

“정년퇴직한 교수로서 지금의 농촌 생활이 휴식이나 현실도피의 의미가 없지는 않지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바깥세상 소식에 귀를 막고 조용한 곳에서 땀 흘려 일하며 공부한 것을 더욱 다듬겠다는 생각은 있지요. 그렇지만 나에게 농촌은 막연한 이상향이 아닙니다. 생산과 노동의 삶이지요. 농사야말로 욕망을 내려놓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겸손하게 사는 법을 실천하는 일이자 내 삶과 학문을 깊이 들여다보는 수신(修身)의 길입니다. 밭 갈고, 씨 뿌리고, 김매고, 거두면서 팔다리에 알이 배는 힘든 노동은 ‘무소유’만큼이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요.”라는 답을 했다.

“지리학자로서 땅의 의미와 자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요.”라는 질문에는 “지리학이란 학문이 땅과 땅 위의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것이죠. 땅에서 나서 땅이 베푸는 대로 살다가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잖아요. 농사짓는 사람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땀을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앉아 있는 지모(地母)에 대한 애정과 감사 때문에 땀을 흘리는 겁니다. 일본 농부들은 평소에 농사짓던 땅에서 쓰러져 그곳에 묻히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내가 떠나면 밭모퉁이에 묻어달라고 아들들에게 말했어요. 땅과 자연을 살아 있는 존재로 인식하면 함부로 훼손시킬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땅과 자연을 살아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인간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꿈꾸며 생활 속의 실천으로 보여준 지리학자다운 답이다. 해방을 전후하여 인천에 모여든 많은 사람 속에서 나라의 동량이 된 수많은 인재가 길러졌고, 그 속에 웃터골의 인중, 제고도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한국 지리학, 특히 역사지리학 부분에서 인천에서의 배움과 경험을 바탕삼아 학문적 단계를 끌어올린 최영준의 업적이 오래도록 기억되면서 후학들이 최영준의 업적을 바탕삼아 인천의 역사지리에 대한 괄목할만한 성과를 일구어가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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