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여성과 함께하는 조화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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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여성과 함께하는 조화순 목사
  • 이례교
  • 승인 2013.03.24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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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이례교 / 인천여성노동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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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산다”는 것에 고뇌하거나 되새김할 때가 종종 있다. 어떻게? 무엇을 위해? 라는 질문을 던져 보기도 한다.
자신이 어떤 존재로 살기를 원하는지 알고 실천하는 삶에 인생을 맡겨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일하는 여성들과 평생을 함께하는 조화순 목사의 사회적 존재감. 시대적 가치, 개인의 삶 등이 우리를 깨닫게 한다.
어려워 살아가기조차 힘든 곳에서의 '작은 예수'
조화순 목사는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나 인천여자고등학교(사범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용인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았다. 농촌계몽을 위한 정신혁명의 중요성을 깨닫고 23세에 감리교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6년 만에 졸업한 후 서해안 덕적섬에서 첫 시무를 했다. 목사안수를 받은 1966년 10월부터 인천산업선교회(일꾼교회)에서 일했고 긴급조치위반으로 1974, 1978년 2차례 서대문교도소에서 복역했으며 1980년 노동자 선동 등의 이유로 연행되었다.
일꾼교회가 있었던 동네 주변은 인천의 화수동, 만석동, 송현동, 화평동 등이며, 실향민이 많았다. 대부분이 막노동과 공장을 다니고, 아이가 있는 여성들은 굴을 까서 생계를 이어가는 동네였다. 어렵고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교회 예배실을 무료로 사용하게 하고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자립기반의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동일방직에서 깨지며 일어서는 당당한 언니‘조화순’
어여삐 자란‘부잣집 딸’처녀목사였던 그녀는 그 시대 여성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목도하고 그곳에서 시작으로 오늘날의 자화상이 되었다.
여공으로 들어간 곳 동일방직에서“야, 이것 좀 해, 저것 좀 해”, “근무태도가 뭐야” 여공들의 명령에 적잖이 당황했고 화도 치밀었다.
“나는 니들과 달라”라고 위안하며 엉엉 울기도 여러 차례. 그러나 하루 이틀 그들의 삶과 버무려지면서 그는 딴 사람으로 변해갔다. 부잣집 딸도 목사도 아닌 신앙심을 몸소 실천하고 가슴이 뜨거운 노동자가 되어갔다. 이 같은 번민과 갈등이 추후 신앙에 큰 도움이 됐다고 고백했다.
공장에서는 광목을 짰다. 솜에서 실을 빼내 물레로 돌려 베를 짰다. 베 짜는 데는 온도가 중요해서 사시사철 후덥지근했다. 먼지가 수북해 눈을 뜰 수 없었다. 속눈썹에 하얀 솜먼지가 달라붙기 일쑤였다. 눈을 비비느라 일을 못할까 걱정도 했다. 3교대. 불규칙한 식사. 위장병과 결핵에 절어 사는 여공들이 부지기수였다. 너무 긁어서 몸이 헐은 나머지 목욕탕 가는 것조차 꺼렸다. 사람들이 문둥이라고 놀리며 못 들어오게 한다며 여공들은 엉엉 울기만 했다. 그들은 당시 외롭게 투쟁했다. 그리고 사람답게 살고자 했다.
경공업으로 경제발전의 부흥을 일으킨 대한민국이 대기업 총수와 고박정희 대통령 공로만 있었을까? 우리의 역사와 민주화운동사에도 그 이름이 빛나고 아름다운 이들이 있는가 하면 고결하고 순정하게 헌신했으되 이름도 명예도 없는 이는 훨씬 더 많다. 조화순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다.
남성패권주의 한국사회에서 몇 명뿐인 여성목사이며, 스스로 목사의 자리에서 내려와 개발독재의 가장 후미지고 낮은 곳에서 신음하던 가난하고 힘없는 여성노동자가 되어 살다가 그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사단지심(四端之心)으로
유신반대, 노동악법 철폐, 국가보안법 철폐, 양심수 석방, 가족법 개정 등에 참여했다. 감리교 민주화운동 모임을 중심으로 여전도사들에 대한 은급제도, 여성 목사에 대한 성차별제도의 폐지, 교단 내의 비민주적 요소 척결에도 앞장섰으며,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반전반핵과 매매춘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불의와 차별에 많은 사람들이 억압받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신다.
“내 평생소원이 예수를 닮는 것이다. 나는 오늘 소원을 이뤘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은 것은 선동자였기 때문이다. 이제 나를 보고 선동자라 하니 이렇게 기쁜 일이 있겠는가. 고맙고 기쁘다.
당신들이 나를 보고 남미의 해방신학에 도취되고 어쩌구 하지만 난 그 책 읽어 본 적 없는 무식쟁이야. 내가 아는 건 오직 성경, 그리고 해고된 이 애들이 어디서 굶지나 않는지, 어디 가서 자는지, 추운데 연탄은 있는지 그저 그 생각만 할 뿐이야”
최근에는 희망버스타고 비정규직 현장으로 투어하시고, 차디찬 바닥에 앉아서 고공농성하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에게 “미안해”라고 말씀하신다.
80세의 ‘우주’로
최근에 인천으로 다시 오셨다. 가까이에서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깨우침이 일어난다. 그래서 사랑을 알아간다.
흔히,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의 크기로 잣대를 잰다.
그런데 누군가 약간의 용돈을 주면 목사님 주머니에 머물지를 않는다. 더 필요한 사람을 만나 쥐어준다. 우리의 어머니들처럼 하듯이...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애처롭고 필요한 곳에 여지없이 모든 것을 내어 주신다. 그래서 집하나, 그 흔한 차한대도 없다. 구애받지 않는 삶, 구속당하지 않는 영혼으로 흐르는 물처럼 그냥 사신다. 처음에는 뭐라고 하면서 잔소리도 해보지만 오래지 않아 오히려 부끄러워진다. 그래서 배운다.
우주의 기운을 느낀다. 머물지 않는 에너지를 배운다. 우리의 곁에 이런 분이 계신다는 것으로 행복하다. 그런 삶이 우리를 깨어나게 한다. 그리고 일으켜 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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