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질'로 '정통 이발'의 맥을 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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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질'로 '정통 이발'의 맥을 이어야 한다."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3.07.18 03:06
  •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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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째 '가위질' 하는 '부성이발관' 이동성 할아버지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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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성이발관' 주인장이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다.
 
 
“1957년에 ‘가위질’을 배우면서 일하기 시작했으니까, 올해로 56년째다. 그 당시 이 동네에는 무허가로 운영하는 이발소가 열한 군데나 있었다. 나는 61년부터 무허가로 일하다 71년도부터는 정식으로 일했고, 지금은 우리 집 한 군데만 남았다. 개발지역이라 다 떠났다. 솔직히 리모델링을 할까 싶을 때도 있지만 할 수가 없다. 오는 사람이 없어서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남구 숭의동 숭의깡시장 건너 마을에서 ‘부성이발관’을 운영하는 이동성 할아버지(74). 그는 몇 년 전부터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한 마을에서 반세기 넘게 ‘가위질’을 하고 있다.


처음 ‘가위질’을 배울 때는 ‘업소’에서 배웠다
“나는 이발계에서는 이방인이다. 협회서 오면 ‘대선배님’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모임에 별로 참석하지 않는다. 56년 전, 내가 처음 ‘가위질’을 배울 때는 ‘업소’에서 배웠다. 지금처럼 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직접 찾아다녀야 했다. 맨 처음에는 제물포역 검문소 근처에 있던 이발소에서 배웠고, 두 번째는 장안예식장 혜성이발관에서 배웠다. 혜성이발관은 기술자랑 기술 배우던 내가 시작했다. 당시 주인, 그러니까 사장은 전매청 서무과장이었는데 돈을 대서 이발소 문을 열었다. 이발소를 하면 돈을 벌던 시절이었다. 그 이후에도 수십 군데 다니면서 ‘가위질’을 배웠다. 5원에서 10원, 10원에서 15원, 또 20원… 옮길 때마다 돈이 올랐다. 일당 20원을 받으면 퇴근하면서 국수를 샀다. 식구들이 한 끼는 먹을 수 있었다.”

“61년에 가게 문을 열기 전까지는 구내 이발소에서 일했다. 59년도였나, 처음에 신흥초등학교 이발소에서 일했을 때는 자유당 시절이었다. 답동성당과 신흥초등학교 사이에 있는 답동광장에서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시위가 자주 열렸다. 당시는 나라가 어수선했다. 두 번째는 창영초등학교에서 일했다. 그때는 남자애들은 물론이고 여자애들도 ‘상고머리’로 잘랐다. 학교에서 일하면 빠른 시간에 애들 머리카락을 많이 잘라야 하니까 ‘가위질’ 실력이 팍팍 늘었다.”
 
 
전문계 고등학교에 ‘미용과’를 만들어 '정통이발'의 맥을 이어야 한다 
“창영국민학교에서 일할 때 4.19, 5.16 다 일어났다. 일하면서 고등학생들이 스크램 짜고 데모하는 걸 많이 봤다. 기술을 빨리 익히려고 일부러 학교 구내이발소에서 일했다. 지금 광성학교 자리에 야간고등학교가 있었다. 유충렬이라는 분이 전쟁고아들이나 넝마들을 데려다 공부를 시켰다. 통금이 밤 12시였고, 11시에 수업이 끝났다. 구내이발소에서 일하니까 공부도 할 수 있었다.”

“내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건 담배를 피우지 않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주름이 적어서다. 56년째 이발소 안에서 일했다. 햇볕을 봐야 주름이 생기는 거지, 직업상 햇볕을 많이 못 봐 얼굴이 하얗다. 사람도 햇볕을 봐야 건강하다. 우리 업계 사람들이 대체로 수명이 짧다. ‘가위질’을 정통으로 하는 사람들이 다 죽으면 이 기술은 세상에서 없어질 것이다. 지금은 늙은이들만 일한다. 내가 인터뷰에 응한 건, 부탁이 있어서다. 전문계(실업계) 고등학교에서 ‘미용과’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해달라. 이발과를 만들면 전망이 좋다. 지금처럼 체인점으로 하면 맥이 끊기지 않는다. 이발협회 중앙에서도 기계가 아닌 ‘가위질’ 기술이 맥을 이어가게 노력하지만 잘 안 되는 것 같다. 나처럼 나이 먹은 사람은 앞으로 10년이면 끝난다. 멀어도 여기에서 깎으려고 오는 사람들은 기계가 싫어서다. 나는 면도도 옛날 방식으로 한다. 비누거품을 내서 바르고, 면도해서 신문지에 걷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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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가 아닌 '가위질'을 하는 사람들은 이제 나이든 이발사들뿐이다.


'가위질' 처음 배울 때는 귀를 자르기도
“예전에 여자아이들은 상고머리를 많이 했다. 애들 체구가 작으니까 판자를 올려놓고 그 위에 앉혔다. 배울 때는 귀를 자르기도 했다. 물론 귀가 뚝 잘라지는 게 아니고 살짝 피가 나니까 금방 붙었다. 그러고 보니,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 이 동네에는 빈집이 참 많다. … 어제는 가정동에서 손님이 왔다. 먼데서 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집에서 가까운 미용실을 두고 차를 타고 오는 손님들이 참 고맙다. 이 동네에는 할머니들만 사니까 가게에 도움이 안 된다. 머리카락을 자르러 와야 손님이 되지. 여기서 오래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한다. 장담할 일은 아니지만 그리 오래하지 못할 것이다. 운영도 안 되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그때 손님이 들어온다. 주인장은 얼른 가운을 입고 손님을 맞이한다. 
주인: “어서 와요. 앉아요. 저번에 버스에서 보니 어디를 가던데.”
손님: “그날, 무단횡단하다가 교통경찰한테 걸렸어. 급해서 그랬다고 했더니, 주민등록증 보면서 저승 갈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뭐가 급해요, 하던데.(웃음) 딱지 떼려면 떼라고 했지. 그랬더니 옆에 앉아 있던 경장인가, 이빨 세 개짜리가 그냥 가라고 하더라구.”
주인: “나이 먹은 사람이 조심해야지.”
손님: “그러게 말이야. 나는 여기서 이발을 해야 시원해. 목욕탕 이발사들은 가위질을 안 해. 기계로 몇 번 슥슥 문지르고 끝났대. 그러곤 목욕탕에 집어넣어. ‘가위질’을 전혀 안 한다니까. 기계로 사르르 밀더라구. 옆에 빗을 대고 그 위에 나온 머리카락만 밀더라구. 가위질을 왜 안 하냐고 물으면 손가락에 쥐 난대.”
주인: “우리랑은 다르지. 우리 집에 오는 분들은 그렇게 깎는 게 싫어서 오는 거야.”
 
손님: “참, 지나가는데 그 친구가 김치 주면서 참외 몇 개 먹어보라고 주데. 기막히게 달더라구. 장마철인데 왜그리 달아?”
주인: “저번에 X파일 보고 깜짝 놀랐어. 설탕물을 벌이 먹데. 세상에, 그게 뭔 꿀이야?”

손님: “텔레비전에 어떤 영화배우가 나왔어. 고생 많이 했는데 20억 벌었대. 배우 마누라 하는 말이 자기 신랑은 배짱이 커서 호텔처럼 큰 집을 샀다는 거야. PD들도 그래, 너무 넓다구.”
주인: “지금 집 사면 밑져.”
손님: “그래도 송도는 앞으로 괜찮다고 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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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면 문을 여는 이발관, 찾는 사람이 없어 전화번호는 없앴다.


가위로 해야 층이 없다
주인장이 기자한테 손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위로 하니까 이렇게 층이 없는 거다.” 손님도 응수한다. “전문대 뒤쪽에서 왔어. 거기에 이발소가 세 군데 있지만 꼭 여기로 와.” “우리 이발소는 멀리서 오는 사람이 없으면 당장 문을 닫아야 해. 매스컴도 문제야. 멋진 미용실에서 미용하는 것만 나오지 정통이발관은 안 나와. 유학 갔다 온 사람들이 하는 미용실에 연예인들이 가는 게 나오거든. 정통으로 이발하는 데가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아예 모르지.” "맞아." 입가를 면도하는데도 손님이 계속 말을 잇자 주인장이 짧게 말한다. “얘기하지 마!” 

“지금 학원에서 배우는 사람들은 나처럼 못한다. 어디서 배우질 못하니까 아예 모른다. 오늘 인터뷰 한 거 안 올려도 된다. 다른 사람(업소)한테 지장을 주면 안 된다. 지금도 미용실에서 남자가 머리 하는 거 사진 찍히면 300만 원 벌금 내야 한다. 하지만 50대 이상 된 사람들은 그런 걸 갖고 신경 쓰지 않는다. 또 ‘블루 클럽’이라는 남자이발전문점이 생긴 것도 타격이 컸다. 뒤에 커트만 쳐주는 덴데 참 많이 생겼다. 대만에서 시작해서 우리나라에 상륙한 가게인데, 면도는 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머리 커트만 쳐주는 거다. 기술자가 하는 게 아니라 돈 있는 사람이 학원을 갓 졸업한 친구들 데리고 하는 경우가 많다. 가끔 젊은 미용사가 와서 짧은 스포츠 깎는 걸 눈여겨 보고 간다. 스포츠머리는 기계로 할 수가 없거든.”

“근데, 기자 양반은 인터넷 보고 여길 찾아왔다구? 어떤 녀석이 올렸을까? 어쩌면 여기 드나들던 '노는 애들' 가운데 하나일지도 몰라. 고등학생 때 오던 애들이 가끔씩 오더라구. 거참, ‘제대말년’에 이발소 선전할 것도 없고. 하긴 더 할래도 못한다. 아시안게임이 얼마 안 남아 리모델링해야 하는데 수입을 봐서는 할 수가 없어. 앞으로 얼마나 하겠다고 돈을 들이나.”

“우리 애들 삼남매 머리는 내가 다 잘라줬지. 지금도 자기 동네 미용실에서 머리를 해도, 여기 오면 다시 깎아달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보던 그림이 있는 모양이야. 손주들도 다 내가 깎아준다. 지들이 오면 할아버지한테 머리카락 깎고, 용돈까지 타가니까 얼마나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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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방식으로 거품을 내어 면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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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이 물을 뿌리는 조루도 쓴 지 꽤 오래됐다.

 
‘이발소 그림’은 ‘독도’ 사진
거울 위에 걸린 ‘이발소 그림’은 ‘독도’ 사진이다. 세월을 새겨넣어 누런 빛이 많다.
“30년 된 그림이다. 옛날엔 돼지그림이 있었다. 돼지 새끼가 어미 젖을 먹으며 우글대면 재수가 좋으니까 웬만하면 다 걸었다. 그 그림이 없는 데가 없었다. 내가 그 그림을 너무 오래 거니까 손님이 갖다 주었다.”

이발 의자가 딱 두 개다.
“처음에는 직접 짠 나무의자를 썼는데, 그때는 딱 세 개였다. 기술자 둘을 두고 했으니까 나까지 딱 세 개가 필요했다. 예전엔 손님이 많았다. 사람들이 머리를 자주 깎은 데다, 여자들도 많이 왔다. 그러다 전두환이 대통령 되면서 남자도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을 수 있게 됐다. 대통령 부인 이순자씨가 미용실을 해서 그렇다는 얘기가 많았다. 남자는 이발관에서, 여자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했는데 그때 법이 ‘통합’으로 바뀌었다. 물론 법이 통과되기 몇 년 전부터 퇴폐이발업소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아내들이 남편을 미용실로 데려갔다. 이발업소는 스스로 무덤을 팠다. 그때나 저때나 나는 이렇게 건전하게 한다. 집사람을 가게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한 때도 있다. 여자를 두고 하는 이미지가 안 좋았다. 내가 그걸 무척 싫어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를 끊으면서 할아버지가 활짝 웃는다. “금방 들어올 손님은 용문사에서 오는 거다. 이 분도 우리 가게를 다닌 지 30년 넘었다. 경상북도 풍기, 문경을 거쳐 강원도 삼척에 살 때도 왔다.” 이때 머리카락을 자른 할아버지가 계산을 하고 모자를 눌러쓴다. 기자가 매만진 ‘스타일’이 아깝지 않냐고 물었더니 주인장과 손님이 유쾌하게 말을 주고받는다.
주인: “바람에 날려서 써야 돼.”
손님: “머리카락 몇 개 안 남았는데 잘 가지고 다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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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쓰던 이발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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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그림과, 전성기 때 사람들한테 밀려 깨진 거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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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은 서로 다른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며 차례를 기다린 때가 있었다.
 
 
 
봐라, 지나가는 사람들 발자국 소리 나나
벽에 걸린 ‘이용사허가증’이 눈에 띈다. 1974년도, 발급처가 경기도다.
“경기도 수원에 가서 땄다. 그때는 경기도 인천시였다. …단골손님들은 죽을 때까지 하라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일단 손가락이 아프다. 저린다. 56년 동안 수건을 짜서 손이 무척 아프다. ‘가위질’해서는 돈을 못 번다. 고등학생들이 이렇게 힘든 걸 하겠냐? 하지만 잘 따져보면 망할 염려가 없고 괜찮은 일이다. 가게를 하다가 시설을 넘겨도 남는다. 요새 젊은 사람들은 한방에 많이 벌려고 하니까 이 일을 할 수 없다. 이발관 문 열고부터 이날 입때껏 아침 6시에 열었다. 오늘도 그때 열었는데 11시가 다 돼서 개시한 거다.”

“다 때가 있는 것 같다. 이 동네는 개발이다 뭐다 하면서 어느 날부터 구도심이 되고 사람이 줄었다. 10년 전부터 빈집이 생기기 시작했다. 봐라, 지나가는 사람들 발자국 소리가 나나. 수입이 안 되니까 해마다 문 닫는 집이 많다. 남구만 봐도, 1년에 한 번 위생교육을 가면 20여 군데가 없어진다. 전성기에는 300군데가 넘었다. 올해에는 160군데였다. 내년엔 140개일 것이다. 다들 미용실로 가니까 문 닫고 딴 일을 찾는다. 경비, 공공근로… 그러다가 병들거나 죽는다.”


깡시장이 있을 때는 유동인구 1천명
“70년대 깡시장이 생겼을 때는 유동인구가 하루에 1천명이 넘었다. 골목길마다 사람들로 가득 찼다. 사람 사는 것 같았다. 80년대 퇴폐업소가 극성을 부릴 때만 해도 괜찮았지만, 2000년대 되면서 장사가 잘 안 됐다. 웬만한 사람은 다 미용실로 갔다. ‘좀 논다는 애들’만 우리 가게에 왔다. 저기, 거울 깨진 거 봐라. 저거 사람들이 가게에 꽉 차서 서로 밀리다 깨졌다. 그 당시에는 우리 집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려면, 특히 토요일 일요일에는 두세 시간 기다렸다.”

그때 손님이 들어온다. “이 양반이 용문역에서 2시간 30분 걸려서 온 거다. 원래 인천 사람인데 강원도로 이사갔다.” 손님에게 왜이리 먼 길을 왔는지 물었다. “내 머리는 스포츠머리라 여기서만 자를 수 있어요. 기계로 자를 수 있는 머리가 아니거든. 가위로만 잘라야 하는데, 요새 젊은이들은 못하지. 멀긴 하지만 하루 날 잡고 와요. 여기서 깎아야 깎은 것같으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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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에는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스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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