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바다가 선사한 '작은 인천'의 빛나는 연대기
상태바
황금 바다가 선사한 '작은 인천'의 빛나는 연대기
  • 김주열 섬마을조사단
  • 승인 2013.10.28 23: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천섬마을조사단> 인터뷰 - 강명선 목수/덕적도 목선 건조 기술자
덕적도_강명선.jpg
 
 


낯설지 않았다. 십여 년 전, 구비문학 채록을 하러 왔다가 풍랑에 발이 묶여 이틀을 더 있었던 곳이기에 그런 줄 알았다. 딴에는 섬마을 조사단 활동을 하며 섬 몇 곳을 가본 깜냥 때문이라고도 생각했다. 기다림도 지루하지 않았다. 이덕선 님과 이형주 님의 정다운 안내로 덕적도 이곳저곳을 답사하고, 인터뷰 할 분이 바다에서 돌아오기까지 한참을 서성이던 북리의 한 고샅에서 만난 할머니는 제주가 고향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조개를 까면서 우리는 모르고 당신만이 아는 사람들의 됨됨이에 대해 촌평을 했다. 그리고 당신의 인생 여정과 덕적가(歌)라는 창가를 잠시 들려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할머니와의 짧지만 강렬한 그래서 아쉬운 만남 때문은 아니었다.
 
마침내 바다에서 돌아온 그분을 따라 집으로 들어서자 왼편에 보이던 작은 공간, 그 공간을 정갈하게 장식하고 있는 공구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까 그 할머니가 말했던 “아, 강 목수 찾아왔어?”라는 말 때문에 낯섦도 지루함도 없이 묘한 설렘으로 덕적도에서 반나절을 보냈다는 것을 알았다.
 
목수. 일반명사가 분명한 이 말이 내겐 고유명사다. 아버지도 목수였다. 다만 장롱이나 문 등의 집안 물건을 만들었던 차이가 있을 뿐, 아버지의 작은 공장 한편에도 곱게 정비한 공구들이 늘 가지런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손때로 반질반질 윤이 났던 공구 자루와 그것을 차마 만지지는 못하고 나무토막만 가지고 놀던 꼬마인 내가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들 때문이다. 목선을 만들던 목수(!)를 만난다는 것 때문이다.
 
2013년 10월 5~6일. 올해 섬마을조사단의 마지막 활동지인 덕적도에서 과거 목선을 건조한 강명선(71, 덕적면 북리 거주) 목수와의 만남은 특별한 것이었다. 흔히 목선이라고 하면 돛을 달았던 풍선(風船)을 생각하지만, 강명선 목수가 만들었던 것은 기관을 달았던 목선이다. 이제 그 실체는 물론 그것을 기억하는 이조차 거의 없지만, 자신이 만든 배가 물살을 가르며 끝없이 삶을 건져 올렸던 바다. 그 찬란한 시기는 아직도 선명해 보였다. 황금의 바다가 선사한 빛나는 시절 이야기를 들어봤다. 아래 인터뷰는 녹취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 많던 배들은 누가 다 탔을까
 
- 예전에 배를 만드셨다고요.
조선소에서 일했어요. 조선소가 있었죠. 이곳 북리에 두 군데 있었어요. 저기 선창 쪽 하나 있고, 노인정 쪽 거기 두 군데 있었어요.
- 일하던 조선소 이름이 기억나시나요?
음....... 대덕기업사.
- 몇 살에 처음 시작하셨어요?
18살에 일을 시작했지요. 일본말인데 데모도(てもと : 자기 주위, 손이 미치는 범위, 공사장 등에서 기능공의 조수)라도 하죠. 데모도로 들어와서 도목수한테 일을 배우는 거죠. 3년간을 용돈 정도 받으면서 일을 배워요. 도목수 마음대로죠. 3년 되어야 도목수가 평가를 하는 거예요. 70% 짜리냐 90% 짜리냐.
-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어요?
고모부 때문에 하게 되었어요. 해주에 시멘트 공장에 있었어요. 조선소도 있고 시멘트 회사도 있고. 거기서 일본 사람 있는 데서도 조선인인데도 도목수 일을 했어요. 그 분이 혼자만 나와서 서포리에 와 살다가 여기 와서 우리 고모랑 재혼했어요. 조카니까 먹고 살라고 배웠지요. 그 분을 목수가 많은 덕적에서도 선생님으로 추대했어요.
- 그때는 배 만드시는 분들이 많았나요?
덕적도에는 유별나게 조선공 목수가 많았어요. 왜냐하면 왜정 때 그 징용 있지요, 징용. 결혼 안 하면 위안부 데려가고, 좀 젊은 사람들 징용 데려가고. 그런데 목수 일을 하면 징용이 면제 되는 거예요. 섬나라라 그런지 특대우를 한 거예요. 예전에는 교통수단이 좋지 않았잖아요. 그래도 목수가 어디 일 가면서, 연장끼라고 그러는데 연장통 박스로 가지고 가면 운임을 안 받았대요. 나는 그때 어렸으니까 자세히는 모르지만, 우리 아저씨들 선배분들이 징용 면하기 위해서 목수 일을 배웠고, 그 때 당시에 그런 대우를 받았다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 보통 1년에 몇 척 정도 배를 만들었나요?
그것은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 없어요. 주문이 들어오면 그것을 받아서 짓는 거예요. 그런데 한 7명이서 2달 반에서 3달 동안 한 척 만드는데 전부 수작업이었죠.
- 배가 비쌌겠네요. 한 척에 얼마 정도 되었나요?
그럼요. 그때는 천하지대본이라고 농사가 최고라 했는데, 사는 형편이 수산업 하는 사람이 형편이 좋았어요. 농민은 보리밥 먹는데 어업 하는 사람들은 쌀밥 먹었어요. 배 한 척이, 화폐개혁 되고 뭐고 했으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지금 시가로 한 1~2억 정도 되었을 거예요. 한 집에서 배를 하면 3~5척씩 부렸어요. 여기 세대가 500세대였고 유권자도 2,000명 되었어요.
- 배를 언제까지 만드셨어요?
한 30년 전이요. 목선에서 어떻게 이어졌냐면 강선, 철선. 그리고 철선에서 FRP(fiber reinforced plastics(섬유 강화 플라스틱))선으로 넘어갔고, 현재 FRP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목조선 사양길이 된 지 한 30~40년, 그 정도 될 거예요. 그 이전인지도 몰라요.
- 목선 만드실 때 어떤 나무를 썼나요?
수입이지요. 일본 스기나무(삼나무)라고 참 물러요. 무른데 강도는 높지만 쿠션이 좋아서 어디 가서 충돌이 일어나도 유동성이 있어가지고 부러지거나 깨지지 않고 부드러워서 비닐 마냥 쑥 들어갔다가 튀어 나가고 신축성이 참 좋은 거지요. 물에 썩지 않고. 그런데 단점은 육지에도 나무 먹는 좀 있잖아요. 바다도 똑같아요. 스기나무인데 좀 먹으면 겉은 말짱한데 속은 다 비어있어요. 잘라보면 한과 마냥 속이 비어 있어요.
- 배 만드는 일을 할 때는 그 일을 생계로 하신 거죠? 월급을 받으신 건가요?
그렇죠. 그런데 월급이 아니라 배 하나당, 예를 들어서 도목수가 천만 원에 맡아요. 하루에 지으면 하루에 다 나눠 먹어도 되는데, (배 한 척 건조하는 데 필요한 사람 수가) 대략 한 250~300명. 250명에 완성하면 단가가 좋고 300명에 마치면 단가가 떨어지고. 적은 인원이 만들면 그 만큼 많이 떨어지는 거죠. 그래서 그때도 일당 좋은 데로 목수가 모였어요.
- 아까 말씀하신 고모부님은 배 많이 만들 때 일 하셨으니까 그걸로 부자 좀 되셨어요?
그럼요. 형편이 좋았죠. 그런데 지금도 그분을 존경해요. 왜냐하면 강선도 그렇지만 FRP는 통째잖아요. 나무는 쪼개고 쪼개서 붙여 가지고 연결해서 박을 쳐 가지고 어우러져서 배를 만드는데, 나무 손실을 적게 하기 위해서 목수들이 이렇게 맞췄다 저렇게 맞췄다 하죠. 최대한 재료를 아끼는 거예요. 그래서 데마(てま[手間] : (일을 하는 데 드는) 품, 수고, 시간)가 많이 들어가요. 다른 사람들은 일당 만원을 버는데 나하고 고모부가 하는 조선소 목수들은 7~8천 원이예요. 도목수로 인기는 좋지 않아요. 근데 사실은 국가차원에서 볼 때는 그 양반이 진짜였어요.
- 배를 주문하는 분들은 대부분 어떤 분들이셨어요. 덕적도 사시는 분들인가요?
주민이 많이 주문하셨어요. 옛날 얘기니까 다 돌아가시고. 사장님들이었죠, 말하자면. 한때 70년대 60년대. 삼태기라고 있죠. 쓰레기 받기라고. 마당 쓸어서 삼태기 담아 내다버리죠. 여기 형태가 그렇게 생겼죠. 많이 담아다가 버리는 형국이래요. 여기가 배가 한 백 척이 되었어요. 안강망이 백 척. 안강망이 꽉 차니까 인천으로 다 나갔어요. 그 때 웬만한 사람은 전부 인천으로 나갔어요. 그래서 여기가 텅텅 비었어요. 지금 나도 여기 떠난 지 40년 만에 나이 먹으니까 들어왔는데 옛날 살던 사람 없어요. 열 손가락 미만이예요.
 
 
양자강 하구까지 나갔던 안강망
 
- 인천에 나가 배를 부리신 거예요?
인천 나가 화수부두랑 연안부두에서 수산업을 하는 거죠. 안강망 자체가 옛날에는 일중(重)선이라고, 일 많이 한다고 해서 일중선이라 했는데, 일 많으니까 따라가서 했다가 딴 직업으로 전환하고. 또 고기가 너무 남획되어서 없어 가지고 안강망 없어졌어요.
- 안강망 어선이 어디까지 나가서 조업을 하신 건가요?
그러니까 해구도를 보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제주도에서 350해고 400해고 제주도 남쪽이란 말이에요. 기상관측 하는 이어도 그 정도에서 하는데, 자꾸 고기가 고갈되니깐 500해고라고 저 양자강 하류 그 아래 남쪽으로 내려갔어요. 거기 양자강 하류 가면은 양자강이 큰 강이니 유난히 뻘개요. 바다가 흙탕물이에요. 황톳물. 그러면 바다에 뱀이 엄청 많아요. 그래서 그거 잡아다가 팔았잖아요.
- 안강망 어선치고는 꽤 먼 거리까지 조업을 나가신 거네요. 목선 가지고 한 번 나가면 며칠 동안 조업을 하셨어요?
음력으로 한 사리가 보름인데 예를 들어서 일주일 가서 작업을 하고 한 3일간 걸려서 와요. 5일은 보름 중에 열흘은 작업하고 오는 것도 작업에 들어가잖아요. 5일은 항내에서 어판하고 어구 재정비하고 보름에 두 단계로 하는 거예요.
- 여기서 목선 안 만들게 되면서 배를 타고 나가시면서 뱃일을 하게 되신 거예요?
배를 만드는 목수를 하다가 선주 노릇을 했기 때문에 배는 안타고 안강망에 폐업이 되니까 직업전환을 해서 낙농업자로 젖소 그거 하다가 이쪽 덕적도로 왔어요. 낙농은 경기 시흥에서 했지요.
 
 
덕적의 무속과 민어 파시의 시대
 
- 덕적도에서 예전에는 뱃고사나 풍어제도 많았겠네요?
그럼요. 그런데 잡아갔어요, 순경들이 잡아갔어요, 무당이요. 민속신앙, 예수님도 부활하고 그랬는데, 다 소용없는 거예요. 내 마음에 있는 거란 말이에요, 민속신앙도 신앙이에요. 옛날엔 순경들이 잡아갔어요. 신앙이라는 것은 똑같다고 봐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 기도하잖아요. 굿도 똑 같은 거예요, 우리 풍어제 지내는 것도 고기 잘 잡혀달라고 비는 것. 그러면서 마음이 위안을 얻고. ‘그렇게 빌었으니까 잘 되겠지.’ 그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지고 풍요로워져요.
그런데 섣달 그믐날. 29일이거든요. 29일 때도 있고 30일 때도 있는데, 엄동설한이죠. 그러면 배에 화장이란 사람이 제일 하빠리에요. 걔는 그 엄동설한에 가서 바닷물에 목욕재배를 해야 돼요. 그렇게 정성을 들이는 거예요. 그만큼 열과 성의를 다해서. 우리가 앞으로 잘 살자, 잘 되게 하자, 이렇게 마음이 중요하잖아요. 옛날에 그랬어요.
**인터뷰에 함께한 이덕선님에 따르면 김금화 만신(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 서해안배연신굿, 대동굿 기능보유자)을 비롯한 인천에서 활동하는 만신의 대부분은 피난 나온 후 덕적도에 머물었다고 한다. 강명선님도 이를 확인해 주었다.
- 파시에 대해 좀 말씀해 주세요.
파시요? 파시. 조기 파시, 민어파시. 파시라는 것이 있죠. 조기 파시는 연평도고 민어파시는 덕적도예요. 민어 성수기가 복 때에요. 지금도 복에 보신탕을 먹는데, 사실 부자들은 보신탕이 아니라 민어탕이란 말이에요. 전라도 사람들이 민어 파시 때 배 갖고 올라오는데 여기에 배가 한 오백척이 왔어요. 왜냐하면 축항이 그때 보다 좀 나갔어요. 그러면 배들이 접안해서 들어오면, 배를 딛고 이 선창에서 저 선창까지 갔어요. 배가 배끼리 연결 돼가지고. 그리고 아저씨나 아버지가 배를 타면 일요일 같은 날, 날씨 좋으면 “나 민어 잡는 것 좀 구경 갈래.” 그러면 “그래라.” 그럼 가요. 가서 내릴 때, “너 가지고 갖고 싶은 대로 힘대로 갖고 가라.” 그래요. 엄청 잡혔어요. 꽃게 있죠? 꽃게. 꽃게는 민어 잡이 하는 데에 꽃게가 많아요, 그런데 꽃게를 누가 먹어요. 민어 먹지. 물이 나가면 바닷가를 나갈 수가 없어요. 꽃게 뿔에 찔려 위험해서. 너무 많아서 다 내버리는 거예요.
- 민어 말고, 다른 것으로 파시 열리는 그런 것은 없었나요?
딴 것 없죠. 그러고 이젠 새우젓 잡고 뭐, 조개잡고 뭐, 투망 그러는데. 그건 파시라고 할 수 없어요. 파시라는 것은 엄청 규모가 큰 거예요.
- 한 번 열리면 기간이 며칠 정도 걸렸나요?
조기파시는 절기가 있어요. 24절기 있죠? 춘분사리 하면서 한식 이렇게 해가지고. 소만사리, 하지사리 하면은 조기파시는 끝나고. 또 민어파시는 이젠 하지사리부터 이어져서 추분 되면 끝나는 거예요. 그 기간이 있어요. 일 년 내내 하는 것이 아니에요.
- 파시는 언제쯤까지 열렸어요?
60년대라고 봐야 돼요. 기억도 없어요. 지금.
- 왜 파시가 중단이 되었을까요?
남획했어요. 너무 고기를 무자비로 잡았어요. 없어진 거죠, 왜냐하면 산란기 금어기가 없었죠. 지금 꽃게 금어기가 있잖아요, 그런데 옛날에 무지막지해서 그게 없었단 말이에요. 자원을 고갈되게 만들었어요. 자원보호를 해야 하는데.
 
 
번성한 어촌 덕적도로 기억되길
 
- 개인적인 바람 있으면 한마디 해주세요.
뭐 한 마디로 얘기할 수가 없네요. 여기 어촌이었잖아요. 면사무소 2층 회의실 가면 그 섣달 그믐날 깃발 달린 배들, 다 정박해있는 사진, 지금도 그걸 보면 진짜 장관이예요. 엄청 배가 많았어요. 옛날 농기구는 어디 관광 가면 썼던 거 볼 수 있어요. 농사는 어떻게 짓는지 알아요. 그런데 어구라든가 어부 박물관은 없잖아요. 그래서 덕적도가 어촌으로서 과거에 유명했다 그런 거라도 조금 이미지나 흔적을 남겨줬으면 합니다.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나온 북리는 이미 어둑어둑하다. 그렇지만 어슴푸레 보이는 속에서, '작은 인천'이라고도 불렸다던 북리의 한때를 상상해 본다. 그야말로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을 뿐이다.
 
만선으로 북리항에 들어오는 자신의 배를 이층 창문 너머로 여유 있게 바라봤을 선주의 집과, 절망보다 강하게 용접 불꽃을 쏘아대는 용접공이 있었을 철공소와, 항구를 감싸고 있는 산기슭 가득 들어섰다던 어민들의 초가에 넘쳐났을 질퍽한 생기와, 밤새 마신 술을 겨우 게워내고 빼꼼히 열린 방문 사이로 스며들던 석양을 속치마 바람으로 멍하니 바라봤을 작부의 초점 없는 눈빛과, 소금기 가득한 피로가 뜨끈한 수증기에 섞여 뭉게뭉게 피어올랐을 공중목욕탕의 비누냄새와, 개구멍으로 들어와 영화 장한몽(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과 별들의 고향을 몰래 봤을 덕적도의 어린 토토가 좋아했던 천막극장이 보이는 듯하다. 한때 이것은 적어도 상상이 아닌 현실이었을 것이다.
 
북리는 근현대 생활사에 중요한 한 지점이 되기에 충분하다. 황금 바다가 선사한 빛나는 삶의 연대기는 이제 몇몇의 기억 속에서마저 희미해지고 있다. 이것은 비단 덕적도 북리만의 사정은 아니다. 그간 섬마을조사단 활동을 하며 인터뷰한 주민들의 오래된 기억 속에서 역사의 행간을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것들의 개연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보다 전문적인 활동이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인천섬마을조사단 : 김주열, 서은영, 심영보, 신운섭
-녹취 풀이 : 서은영, 심영보
-글 : 김주열
-사진 : 박주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