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재미있어야 한다. 오감을 즐겁게 해주어야 하고 영혼을 달구어 용약하게 해야 한다. 문학이 다른 목적에 이용되는 것도 보통이다. 명예를 위해서 이름표가 되기도 하고 약점을 카무플라주(camouflage 위장)하기 위해서 장옷이 되기도 한다. 돈벌이가 최우선 목표가 되기도 한다. 모두 합당한 동기가 된다 해도 본래의 사명과 역할을 망각해선 안 된다. 그 사명과 역할은 긍정적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용납되는 한계가 있어야 하고 지켜야 할 수칙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문학이 본래 자유를 추구하지만 보편성을 상실한 아집이나 방종으로 흐르는 건 금물이다.
문학이 재미있어야 하는 것은 문학이 예술이기 때문에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이다. 감각기관에 호소하여 금세 반응을 유도하는 말초신경 자극의 재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격예술도 어떤 방식으로든 소통의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소통하려면 재미있어야 한다. 김기택 시인은 즐겁기 때문에 시를 쓴다고 했다. 재미가 없으면 무엇 때문에 시를 쓰겠느냐며 반문한다. 나의 경우에도 시가 재미있기 때문에 읽고 쓴다.
필자가 오래 전 문학개론 책을 읽던 때가 떠오른다. 문학의 여러 갈래를 설명하면서 서정시의 갈래를 감정의 시, 정서의 시, 정조의 시로 구분했던 것이 잊히지 않는다. 같은 서정시라도 내용상으로 차별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의 서정시인들도 감정에 북받쳐 시를 쓰기도 하고 비장하게 내면의 소리를 엄숙한 어조로 정조의 시를 쓰기도 할 것이다. 어느 경우에도 소통의 문제를 소홀히 하면 예술로서의 생명에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가장 좋은 소통의 방법은 재미다. 어느 독자에게 재미있는 시가 다른 독자에겐 재미가 없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독자의 관심사, 연령, 취향에 따라 재미를 느끼는 요인도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러나 한 독자가 재미있게 읽었으면 다른 독자도 그렇게 읽을 개연성이 높다. 그러나 재미에도 여러 층위가 있다. 내가 가장 많이 느끼는 재미는 깨달음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철학적 인식, 종교적 깨달음, 예술적 감흥에서 오는 즐거움인데 시의 오묘한 언어에서 오는 감동이 가장 크다.
시는 철학이 아니면서 철학이고 종교가 아니면서 종교다. 시 속엔 있는 듯 없는 듯 종교가 있고 철학이 있다. 우리 고전문학엔 해학적인 작품이 많다. 춘향전과 심청전만 봐도 배꼽 잡는 대목이 많다. 우리 전통문화를 다룬 '정(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꽃을 시샘하는 여인의 얘기를 읽고 고전 문학의 해학에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고전문학엔 문외한이니 생략하고 내가 읽은 현대시중에 재미있는 시 몇 편 함께 읽기로 한다.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문정희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2004 민음사)
남편은 참 가깝고도 먼 사이라는 건 안다. 아내도 그렇다. 시인은 가깝고도 먼 사이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 제시한다. 늘 마음속엔 느꼈겠지만 시인이 열거하는 여러 정황을 읽고서야 아, 그렇구나 맞장구를 치게 된다. 부부지간을 일심동체라 하지만 필자의 생각엔 그건 당위성을 말한 것이고 실제 생활에서 부부지간엔 갈등과 대립이 많은 것도 흔한 예이다. 원수 같다가도 아이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가다듬기도 할 것이다. 싸움을 가장 많이 하고 밥을 가장 많이 함께 먹은 남자. 모든 얘기를 다 나누어도 연애를 함께 의논할 수는 없는 남자. 아주 시시하고 싱거운 것이라고 해도 시인이 구체적인 언어로 제시하기 까지는 막연하거나 모호했던 것을 비로소 깨닫고 독자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부처 / 오규원
남산의 한 중턱에 돌부처가 서 있다.
나무들은 모두 거리를 두고 서 있고
햇볕은 거리 없이 부처의 몸에 붙어 있다.
코는 누가 베어 갔어도 코 대신 빛을 담고
언제나 웃고 있다.
곁에는 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고
지나가던 새 한 마리가 부처의 머리에 와 앉는다.
깃을 다듬으며 쉬다가 돌아 앉아
부처의 한 쪽 눈에 똥을 뉘 놓고 간다.
새는 사라지고 부처는
웃는 눈에 붙은 똥을 말리고 있다.
오규원 시집 『두두』(2008 문학과지성사)
오규원 시인은 날이미지의 시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시도 그런 류의 시라고 할 수 있다. 날이미지의 시는 은유를 거부하고 환유를 도입한다. 인접한 사실들을 결합하고 접속시키는 환유법을 사용한다. 이 시에서 은유는 없다. 남산의 한 중턱에서 발견한 돌부처와 그 인접 사물들을 단순하게 배열하여 한 편의 시를 완성하고 있다. 남산 중턱에 서 있는 돌부처. 나무들은 거리를 두고 서 있고 햇빛은 부처의 몸에 붙어 있다. 코는 누가 베어 갔지만 코 대신 빛을 담고 있다. 주변에 돌들이 있고 새가 날아와 앉는다. 앉아 쉬던 새가 똥을 누고 떠나고 부처는 웃는 눈에 붙은 새똥을 말리고 있는 풍경. 이 시도 인간이 정한 관념으로 굳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정하지 않은 살아 있는 날이미지를 시에 도입한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이 시에서 제일 재미있는 부분은 2연의 “코는 누가 베어 갔어도 코 대신 빛을 담고//언제나 웃고 있다.”는 부분과 마지막 시행 “웃는 눈에 붙은 똥을 말리고 있다.”는 부분이다.
잠지 / 오탁번
할머니 산소 가는 길에
밤나무 아래서 아빠와 쉬를 했다
아빠가 누는 오줌은 멀리 나가는데
내 오줌은 멀리 안 나간다
내 잠지가 아빠 잠지보다 더 커져서
내 오줌이 멀리멀리 나갔으면 좋겠다
옆집에 불나면 삐용삐용 불도 꺼주고
황사 뒤덮인 아빠 차 세차도 해주고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호호호 웃는다
-네 색시한테 매일 따스한 밥 얻어 먹겠네
오탁번 시집 『벙어리장갑』 (2002 문학사상사)
오탁번 시인의 해학은 상당수의 시에 나타난다. 매우 경쾌하고 때론 속물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외설적인 듯 속물적인 듯한 데에 삶과 시의 진실이 있다. 남자들은 가끔 소변을 보면서 오줌 빨을 힘껏 쏘아본다. 경쟁심리가 발동하여 더더욱 멀리 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그런 남자들의 장난기가 고스란히 시에 담겼다. 아주 터무니없는 과장법도 동원된다. 오줌발로 불을 끄고 세차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어린 화자로서는 상상 가능한 상황이다. 백미는 마지막 연에 있다. 호호호 웃는 엄마의 웃음 속에 많은 것이 들어 있다. 가장 원초적인 속내가 들어 있고 훌륭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염원이 담겨 있다. 몇 번을 읽어도 얼른 이해되지 않는 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감동이 있다. 쉽고 재미있게 시를 쓰는 시인의 작품을 읽게 되면 그 시인의 이름이 금세 마음에 각인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흰 토끼 일곱 마리는 / 고영민
청보리밭을 보면
나는 왜 흰 토끼 일곱 마리가 떠오를까
우리 밭의 보리 싹을
누가 뭉텅뭉텅 낫으로 베어가고
아버지가 그 집을 찾아가
어린 토끼를 한 마리씩 우리에서 꺼내
귀때기를 잡고
마당 한가운데 힘껏
내동댕이치는데
토끼가 먹었으니 토끼를 죽여야지!
어린 토끼는 땅을 맞고
바르르 떨다가 죽고
죽고
죽고
또 죽고
어스름 녘 일곱 마리 토끼가 죽어 있는
그 집 마당
그 집 식구들
아버지가 내 손을 잡아끌며 큰 소리로
집에 가자!
토끼가 먹었으니 토끼를 죽인겨!
싹둑 베어진 청보리밭을 지날 때쯤
뒤돌아보았던
그 집 마당의 작고 어린
흰 토끼 일곱 마리는
고영민 시집 『봄의 정치』(2019 문학과 지성사)
우연히 고영민 시인의 시집 『겸손한 손』을 읽었다. 참 재미있었다. 그날부터 고영민 시인의 이름을 보면 반가웠다. 문예지를 읽다가도 금방 눈에 띄곤 했다. 이번에 신작 시집 출간 소식을 듣고 얼른 구입해 읽은 것도 그 기억 때문이다. 종종 유명한 문학상을 탄 작품집을 구입하여 읽어보곤 재미가 없어 그대로 사장되는 경험을 했다. 내 시 읽기의 기본 수련이 덜 된 탓도 있지만 문단의 풍토 탓도 있다. 해설을 읽으며 또 한 번 절망한다.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비춰지는 것이다. 수십 년 시를 읽고 써온 시인에게 그렇다면 일반 독자들의 기분은 어떨까. 당연히 시인을 백안시 하게 되고 혹시나 하고 시집을 펼쳤다가 역시나 하고 덮을 것이다. 그리고 차츰 시에서 멀어질 것이다. 이 시에서 재미있는 시행 하나를 뽑으라면 나는 7연의 “토끼가 먹었으니 토끼를 죽인겨!”를 뽑겠다. 투박한 사투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단호함이 시 전체에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있다. 시 속의 사상과 정서는 나중의 문제다. 발레리의 사과처럼 시는 일단 재미가 있어야 한다.
배춧잎 줍는 여자 / 임경묵
새벽 청과물 도매시장 한편에 서서
경매 끝나기를 기다리는
한 여자가 있었네
경매가 끝나자마자
손수레로 옮겨지는 푸른 배추 더미 뒤를
졸졸 따라가
상인들이 떼어 내버린 배추 거죽을 한 잎 두 잎 줍는
한 여자가 있었네
푸르죽죽한 배추 거죽
거무죽죽한 배추 거죽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배추 거죽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 짓이겨진 배추 거죽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 짓이겨져 푸른 물이 배어나오는 배추 거죽에서
가장 깨끗한 것만 골라
한 보따리 짊어지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는
한 여자가 있었네
보따리 안에서 늙은 빨래 같은 배추 거죽들을 꺼내
찬물에 헹궈
비틀고 꼬옥 짜서
처마 밑 빨랫줄에 가지런히 널어놓고
우려낸 멸치 국물이 없어 솥에 반쯤 맹물을 붓고
어슷하게 썬 파 쪼가리와
다진 마늘 약간
묵은 된장 한 숟갈 휘휘 풀어
연탄불에 은근하게 한솥 배춧국을 끓여 놓는
한 여자가 있었네
푸르죽죽한 배추 거죽 같은거무죽죽한 배추 거죽 같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배추 거죽 같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 짓이겨져 푸른 물이 배어나오는 배추 거죽 같은
한 여자가,
임경묵 시집 『체게바라 치킨집』 (2019 문학수첩)
이 시는 어렵지 않다. 아주 평범한, 초라하고 남루하기 까지 한 주변의 한 풍경을 한 편의 시로 재구성하였다. 이 시를 읽으면서 서민들의 애환을 알게 되고 그 애환을 고통이나 비극이 아니라 경쾌하게 희망으로 받아들이는 생활인의 철학을 읽게 된다. 시를 읽으면 선명한 영상이 하나 떠오른다. 한 편의 독립영화 같은 줄거리가 읽히는 것이다. 경매가 끝난 시장바닥에 버려진 배추 거죽을 주워 한 솥 가득 배춧국을 끓여내는 가난한 서민의 삶을 목도하고, 그 엄숙한 제의와도 같은 경건함에 독자는 전율하게 된다. 반복법과 점층법을 도입하여 극적 효과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 시를 읽으며 박두진의 시 <해>가 떠올랐던 것은 그 표현 양식 때문이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해>의 1연). 내용은 달라도 표현 양식은 유사하여 효과적으로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좋은 시가 반드시 어려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쉽고 재미있는 시가 생명력이 강하다.
오늘의 할 일 /김기택
가만히 앉아 숨쉬기 모든 구멍에서 나오는 구리고 비린 나를 들이마시기
제 못난 곳을 악착같이 감추어오다 감춘 사실마저 낱낱이 들키기
생긴 대로만 앉아 있어도 저절로 웃기는 놈, 비열한 놈, 한심한 놈이 되기
머리통에 피가 몰리는 기억을 꺼내 터진 뇌혈관 다시 터뜨리기
단단한 벽으로 된 입과 귀에다 깨지기 쉬운 간절한 말을 쑤셔 넣기
욕이 되려는 분노를 억지로 우그러뜨려 누르고 밝게 웃으며 대답하기
터져 나오는 비명을 녹여 나에게만 들리는 진한 한숨으로 바꾸기
숨구멍 막는 끈끈한 가래 같은 숨을 조심조심 뚫어가며 숨쉬기
긁으면 더 가려워지는 가려움, 긁느니 잘라내고 싶은 가려움을 긁어 키우기
고삐를 잡아 쥐고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겨도 안 오는 잠을 강제로 자기
그냥 있기만 하기
김기택 시집 『갈라진다 갈라진다』 (2012 문학과지성사)
필자는 이제 내가 할 일을 “새들과 식물이 놀라지 않게 산에 오르는 것, 술을 끊을 때도 되었다고 과음을 한 다음날 생각해 보는 것…” 하며 혼자 산책길에 중얼거려 본 적이 있다. 이 시 <오늘의 할 일>를 읽고 엇비슷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럼 시의 화자가 제시한 오늘 할 일을 하나씩 짚어 보자. 첫 행부터 예사롭지 않다. “가만히 앉아 숨쉬기”다. 독자는 그만 허를 찔리고 만 기분이다. 이어질수록 점입가경이다. “제 못난 곳을 악착같이 감추어 오다 감춘 사실마저 낱낱이 들키기”라고 하지 않나, “욕이 되려는 분노를 억지로 우그러뜨려 누르고 밝게 웃으며 대답하기”를 하고, “긁으면 더 가려워지는 가려움, 긁느니 잘라내고 싶은 가려움을 긁어 키우기”를 하고 있는 이 화자는 어떤 사람일까. 어쩌면 우리 모두일 것이다. 의식하건 안 하건 우리 모두는 이 시 속의 화자처럼 이런 무미건조한 일을 반복하며 하루하루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재미가 없는데 시를 읽을 수는 없다. 억지로 읽는다면 그것은 위선일 수도 있다. 교양인을 가장하기 위해서, 문화인을 증명하기 위해서 억지로 시를 읽는다면 그것은 위선 일 수도 있다. 재미가 없으면 읽지 않는 게 당연하다. 그게 떳떳하다. 문제는 읽고 싶고 읽어야 하는데 읽을 수 없는 경우다. 읽고 싶고 읽어야 하는데 읽을 수 없는 비극, 그것을 초래한 사람은 바로 시인들이다. 시인들은 시 읽을 권리를 독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그 그림 속에 있는 한 편의 시가 색과 선의 형태로 다가온다. 음악을 들으며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오감을 자극하며 영혼 깊숙이 스며드는 선율이 우리의 감흥을 일깨우고 미의식을 자극한다. 김기택 시인의 시를 읽으며 시 읽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그림과 음악과는 다른 오로지 시만의 재미를 알게 된다. 그 재미의 원천중의 하나는 의외성일 것이다. 너무 뻔한 일상적이고 사소하여 얘기꺼리로 삼기에도 적절하지 않을 사물이나 현상을 한 편의 시로 구성해 낼 때 독자는 자기 속에 있는 의외성에 놀라게 된다. 거기에서 코페르니쿠스적 발견처럼 자기 발견의 충격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시를 읽고 쓰는 재미이고 시의 효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