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박경순 시인의 시집 『그 바다에 가면』에서 몇 편 같이 읽어 보기로 한다. 시집은 제 4부로 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작품이 바다를 주제로 하고 있다. 제 1부에서는 후포리에 대한 시편이 주를 이루는데 후포리는 경상북도 울진군에 있는 바닷가 마을로 후포항이 있다. 1부에 수록된 17편의 시에서 제목에 <후포>가 들어가 있는 시가 9편이다.
나머지 작품도 울진, 영덕의 지명이 나오거나 그곳 바다를 주제로 한 시편들이어서 시인이 이 지역에 머물며 시상을 가다듬었음을 짐작케 한다. 시인은 우리나라 <여성1호상>을 수상한 해양경찰로 해경 역사상 최초로 총경으로 승진하여 울진해양경찰서장을 지내기도 했다.
바다에서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니 그의 임지는 바다였을 것이고 그의 시도 당연히 바다를 주제로 하였을 것이다. 경찰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그의 시는 무척 서정적이며 파리 한 마리의 목숨도 소홀히 하지 않는 섬세하고 여린 모습이 나타나 있기도 하다. 그가 얼마나 섬세하고 여린 감성의 소유자인지 다음 시 두 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이런 여린 감성을 시로 표현해 낸 것은 역으로 그가 얼마나 고된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지를 나타내 주는 증표가 될 수 있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일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치열한 일상 속에 시인이 끝까지 붙들고 있는 순수한 시심 혹은 훼손되지 않은 서정이 이 시집의 시편들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파리
하루 종일
내 책상 근처
귀찮게 날아다니는
파리 한 마리
퇴근 무렵
신문지 돌돌 말아
내려치자니
녀석과
하루 종일 지낸 정 때문에
두 눈 감고
그냥
지내기로 했네
전단지
현관 앞
수북한 전단지
읽어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린다
어느 누구의
간절한 바람임을
애써 모르는 척
감은 눈,
겨울이
한
창
이
다
이런 섬세하고 따뜻한 시심이 시인을 고위직으로 이끄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근래 들어 인문학적 사고가 각광 받는 시대가 되었다. 대기업에서도 인문학적 소양을 직원 채용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는 얘기가 있다. 법을 집행하는 수사기관이나 국토방위 임무를 띠고 있는 군에서도 그런 소양과 자질은 필수적이다.
2017년도 국회 청문회 때 이진성 헌법재판소장 내정자가 청문회 모두 발언에서 김종삼 시인의 시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를 읊어 잔잔한 감동을 안겨 준 일이 있다. 그만큼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적 소양이 현 사회에서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는 걸 나타내 주는 사례다. 그럼 박 시인의 시를 통해 직접 시인의 시 정신에 동참해보자. 제 1부에 수록되어 있는 후포라는 지명이 들어가 있는 시다.
후포 5일장
귀하던 오징어는
가격 겨우 내려
서너 마리 바구니에
올려지고
지나간 옛 노래 반주에 맞춰
오카리나 버스킹은
들어줄 사람 없어도
열심히 연주를 하고
풍랑주의보 강한 바람에
후포 바다는
첫사랑 기억처럼
내 가슴 마구
후벼 파고 있는데
소중하게 따온 단감
따사로운 가을볕에
주인을 기다리는
여기는 정이 가득한
후포 5일장
후포 5일장이 서는 시장을 둘러보는 한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4개 연 중에 3연엔 시인의 정서가 담겨 있고 나머지 3개 연은 후포 5일장의 풍경이 나타나 있다. 오징어 값이 올라 금징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런 오징어가 값이 내려 서너 마리가 바구니에 담긴다는 시어에서 서민의 애환과 함께 하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오카리나를 불며 거리 공연을 하고 있는 시끌벅적한 풍경이 보이는가 하면 단감을 따가지고 와 소쿠리에 담아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시골 노파의 모습도 정겨워 보인다.
한편 3연에서는 시인 자신의 심정이 담겨 있다. 첫사랑의 추억은 누구에게나 짜릿하다. 첫사랑의 기억이 평온하고 고요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거친 바다의 파도처럼 그 기억은 격정적이다. 이런 격정적인 기억을 안고 후포 5일장을 돌아보며 시인은 아주 평화로운 서민들의 삶의 모습을 보고 있다. 어쩌면 아무런 사고 없이 바다가 늘 활기차고 평화롭기를 바라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창포 바다에서 보내는 봄편지
바람에 잔뜩 비가
담겨져 붑니다
오늘 부는 바람에는
그리움도
담겨 있습니다
봄이 지나갑니다
여기저기 꽃잔치도 다 끝나버리고
꽃 진 자리에는 팥알 만한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버드나무 연한 잎도
변하고 있습니다
매화꽃이 피고
산수유가 피고
목련이 피고
벚꽃이 피고
복사꽃이 피고
라일락이 피고
이제 아카시아꽃이 피기 시작하면
봄이 다 지나가고 맙니다
계절이 지나가는
창포* 바다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저 나무들처럼
오늘은
당신이 오실까봐
또 하루
하얗게 지새웁니다
*경북 영덕군 영덕읍 창포리에 있는 어항
이 시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시인의 일상이 바다에서 영위되고 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항상 바다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의 안전을 생각하며 지내는 시인의 봄 편지에 무엇이 담겼을까. 봄비를 잔뜩 머금고 있는 바람이 제일 먼저 호명된다. 꽃 잔치가 펼쳐지고 다시 길게 꽃들의 이름이 호명된다. 봄을 장식하는 대표적인 봄꽃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지나가는 봄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시인이 기다리는 당신을 호명하고 있다. 봄을 환하게 밝혀놓고 이내 떠나가는 꽃들처럼 세상만사의 이치는 회자정리(會者定離), 곧 만났다가는 헤어지는 것이다.
시인이 호명하는 당신은 누구일까. 아마 실체가 없는 그리움의 대상일지 모른다. 매일 대하는 망망대해의 대척점 어딘가에 있는 그리움의 대상, 그것은 시인만이 알 수 있는 영원한 비밀일 수도 있고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향수와 동경의 대상일 수도 있다. 이렇듯 바다에서 띄우는 시인의 봄 편지엔 그리움을 잔뜩 머금은 봄바람이 있고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가는 계절의 변화가 있고 꽃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보는 곡진함이 있다. 그리고 얼른 규정하기 어려운 그리움의 대상이 거기 있다.
태안 연가戀歌·2
흙 한 평 없는
APT 베란다에서
언젠가 산으로 돌아가면
키우리라
화분에 손가락만 한 나무를 심는다
칠자화, 병꽃, 백일홍, 가죽나무
그때
연못 하나 만들고
창을 열면
사방, 사계절
꽃을 볼 수 있는
정원에
저 나무들 옮겨 심어
새소리
양식 삼아
그저 산처럼 살다 가면
어떨까
연포 바다
솔섬 위로
해 떨어지는 저녁
돌아갈 집 아직 멀고
꿈 이루어질 날 더 멀고
시집의 제 2부엔 태안 연가 연작시 8편이 있다. 짐작컨대 시인이 태안 쪽 어느 항구에 근무했을 당시에 쓴 시편들이 아닐까 싶다. 이 시도 바다에서 육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인은 지금 연포 바다가 내다보이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이 아파트에서 화자는 갖가지 꽃나무 묘목을 화분에 키우고 있다. 그러나 그 꽃을 키우면서 화자가 품고 있는 생각은 먼 미래에 가 닿아 있다. 먼 미래라 하면 꿈속의 고향 같은 곳이 될 수도 있다. 화자가 시에서 그리고 있는 이상향은 첫째 산골이다. 바다의 대척점을 이상향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 산골 집엔 연못이 있고 사철 사방에서 꽃을 볼 수 있는 정원이 있는 집을 장만해 지금 기르고 있는 꽃나무를 옮겨다 심어 놓고 온갖 새소리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내고 싶은 간절함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닌 것이다. 그러한 집 아직 멀고 그 꿈 이루어질 날 아직 멀다며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박경순 시인은 한국해양경찰의 고위직 현역 경찰관이다. 언뜻 생각하면 화려해 보이고 만인의 부러움을 사는 성공 사례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여성 1호라는 영광이, 유리천장을 뚫은 성공사례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시인의 행복과 삶의 만족으로 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부딪치기도 했을 것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다. 죽음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로마시대에 세상을 모두 얻은 듯 수많은 인파의 환호를 받으며 개선하는 장군의 뒤를 따르며 두 명의 노예가 <메멘토 모리>를 연호했다고 한다. 지금 승리에 도취해 있지만 당신도 언젠가는 죽게 되고 그 영광이 끝난다는 것을 알라는 자만심의 경계주문이었던 것이다.
엉뚱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박경순의 시를 읽으며 나는 시인이 유한한 삶을 의식하고 썼음직한 표현을 여러 군데서 발견했다. 유사한 표현이 몇 번 나타나서 그 구절들을 따로 모아 보았다.
자식들 다 떠나보내고
아쉬움 없이 산 이승
이별 기다림도 행복하면
얼마나 좋을까
-<기다림은 행복하다> 5연
새 소리
양식 삼아
그저 산처럼 살다 가면
어떨까
-<태안 연가·2> 3연)
이제는 나도 모르게
나의 부음訃音
그렇게 실릴 날이 남아 있는데
-<부고訃告·2> 3연
문득 새 집으로 오면서
그동안 내가 버린 것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내가 이다음
모두 버리고
이 새 집마저 버리고 갈
그날이 떠올라서
새 집을 나와
그저
오솔길을 걸었다
말없이 걸었다
-<이사> 3연
가야 할 때
갈 줄 아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검버섯> 5연
시를 읽다가 이런 시행을 자꾸 접하면서 시인도 이제 나이를 의식하고 죽음에 대비하기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이 자신의 죽음을 의식한다는 것은 매우 엄숙하고 경건한 제의(祭儀)와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인생에 임하는 가장 겸허한 자세이며 삶을 가장 아름답고 숭고하게 가꾸려는 자신과의 약속 같은 것이 아닐까. 이 시집의 4부엔 바다에서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다가 순직한 동료들에 대한 추모시가 여러 편 나온다. 시인은 그런 위험 요소 가득한 현장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런 곳에서 임무를 수행하다보니 늘 죽음을 의식하고 목격하게 되고 결국 무의식의 영역에까지 각인되어 이런 시행들을 낳게 된 것은 아닐까.
한편 로마의 장군들이 환호를 받으며 개선할 때 뒤를 따르며 메멘토 모리를 연호하던 노예들의 외침을 시인 스스로 자신에게 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박경순 시인은 인천에서 출생하여 인하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 《시와 의식》으로 등단하여 《한국수필》 신인상, 인천예총예술상, 제 24회 인천문학상, 2017 여성 1호상, 제 27회전국성인시낭송대회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새는 앉아 또 하나의 시를 쓰고』, 『이제 창문 내는 일만 남았다』, 『바다에 남겨 놓은 것들』이 있다. 울진해양경찰서장을 지냈으며 현재 중부지방해양경찰청에 재직 중이다. e-mail:111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