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 시집 『톈산 산맥 아래에서』를 읽고 - 최일화 / 시인
지난 9월 한국문학번역원에서는 전 세계 흩어져 있는 우리민족 디아스포라 문학작품에 대한 독후감을 공모했다. 그때 제시된 책이 26종이었는데 그 하나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거주하는 최석 시인의 《톈산 산맥 아래에서》이다. 이 시집을 구입해 읽으며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이 시인이 20세기가 끝나는 시점인 1997년에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다는 점이다. 이 시집을 읽기 전에 먼저 그의 첫 시집 『작업일지』를 구입해 읽었다. 시인은 1958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했으며 부산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하면서 <脫詩>동인으로 활동했다.
시집 발문을 쓴 김영승 시인은 그를 이렇게 평했다. “하루살이와 같은 아슬아슬한 하루하루, 정신과 육체를 탕진해가며 젊음을 소모해가는 엥겔계수 95% 이상의 극빈자로서의 그의 그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삶의 기록인 『작업일지』는 몸으로 때우려는 여자가 있듯이 육체의 일부인 머리로만 때우려는 무매한 인간들에 대한 경종 같은, 상당한 지적 여과 과정을 거친 매우 잘 짜여진 시집이다."
최석은 40세가 되던 해에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다. 이주하기 전 32세 때인 1990년 국내에서 첫 시집을 내고 7년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1997년 홀연히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떠났다. 그곳에 가서도 20년이나 더 침묵한 끝에 첫 시집 이후 27년 만에 두 번째 시집 『톈산산맥 아래서』를 발간했다. 시인은 그곳에서 중앙아시아문인협회를 출범시켰고, 고려인 문예지 《고려문화》를 창간하기도 했다.
1937부터 연해주의 고려인 18만여 명이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유는 일제에 협력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6,000여㎞의 긴 여정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이동 중에 1만5000여 명이 사망했다니 그 참상을 오늘날에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1991년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독립하여 수교가 이루어지자 기회의 땅을 찾아 그곳으로 많은 한국 사람이 떠났다.
오늘은 알마티로 이주한 최석 시인의 시 몇 편 같이 읽으며 고국을 떠나야 했던 한 민족 중앙아시아 디아스포라 문학을 잠시 생각해보기로 한다. 시의 행간엔 고려인의 고난과 역경의 삶이 녹아 있고 시인 자신의 외로운 삶의 풍경이 드러나 있다.
고려인을 위하여
중앙아시아에서는 스스로 고려인이라 부른다
그들에게는 조국이 없다
없어져버렸다
원동遠東에서 기차에 실려
화물칸에 실려
뾰족한 송곳처럼 서서 분노를 세우고
공포를 세우고
도착지도 모른 채 뿌려진 곳
중앙아시아의 눈이 부신 햇살 아래 펼쳐진
소금꽃 핀 광야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곳
아직도 그들이 산다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 살던 그들이
이제는 번듯한 집에서 산다
땅굴 속에서도 죽지 않은 사람들은
장군도 되고 영웅도 되고
가수도 되고 첩이 되기도 했다
그때 핏덩이였던 사람들조차
이제 다 죽었다
원동을 그리며 죽었다
그들의 자식 자식의 자식들이 살아간다
동해물과 백두산을 모르고도 살아간다
그들의 조국은 카자흐스탄이고 우즈베키스탄이다
어쩌면 원동일지도 모른다
원동에 가면 조선이 보이고 한국이 보인다
제발 신파조로 그들을 대하지 마라
고려인은 눈물을 싫어한다
- 시 <고려인을 위하여> 전문
고려인의 삶과 역사를 한 편의 시에 요약하여 담아낸 작품이다. 카자흐스탄 제2의 도시 알마티의 고려인의 삶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강제 이주 당시 핏덩이였던 사람들까지 다 죽고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 살던 사람들이 번듯한 집에서 산다고 했다. 시 <김 가이의 봄>엔 고려인 후손의 삶의 일상이 담겨 있다.
김 가이의 봄
우슈토베의 농법은 진보하지 않는다
한때는 레닌의 이름을 붙였던 골호즈* 언저리에
김해나 경주쯤이 본관이었을 김 가이가
씨를 덮는다 고집도 없이
밋밋한 사람처럼
땅을 헤집고 씨앗을 덮는다
동쪽의 끝에서 기차를 타고 왔을 흑역사를
덮고 또 덮어서 싹을 틔운다
갈무리된 순한 눈빛은 씨감자마냥 동그랗다
남도 어디선가 만났을 법한 동무
김 가이의 덩이줄기가 궁금했지만
캐낼 것이 없는 마른기침뿐
그는 우스토벤스키**
진보하지 않은 저 땅으로 들어갈 것이다
쏟아져 있는 씨감자들이
촉수를 틔우고 있는
김 가이의
텃밭
(*구소련의 집단농장**우슈토베의 사람)
-시 <김 가이의 봄> 전문
김 가이는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된 고려인의 후손이다. 우슈토베는 고려인이 연해주에서 실려와 처음 정착한 곳, 그곳에서 김 가이는 농사를 짓고 있다. 김 가이의 선조는 김해김씨나 경주김씨로 대대로 한반도에 살았을 것이다. 시 속엔 고려인의 착한 심성이 잘 드러나 있다. 김 가이의 덩이줄기가 궁금하다는 것은 그의 살아온 내력이 궁금하다는 것인데 특별히 캐낼 것이 없다고 한다. 오랜 세월 농투성이로 살아온 삶이 특별할 것이 없다는 다소 자조적인 표현 같기도 하다. 그렇게 살다가 김 가이도 선조들처럼 그 땅에 묻힐 것이라며 농투성이의 피폐한 삶을 잘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먼 중아아시아로 이주했지만 떠난 고향을 여전히 그리워한다. 현대에 형성된 새 디아스포라가 고국을 그리워하고 있다. 시인의 향수는 곧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향수다. 꿈속에서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 어딘가에 있을 연해주, 그보다 더 먼 어딘가에 있을 본향 대한민국에 대한 향수, 그 고향산천, 민족에 대한 그리움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최석은 그 디아스포라 집단 속으로 이주하여 다시 신 디아스포라가 되어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나이 40에 이주를 했으니 그는 아마 순도 100%의 대한민국 국민이기도 할 것이다.
여름날
노을 진 들판을 바라보고 있으면
배가 고프다
논에 피사리 간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태 돌아오지 않고
시렁에 놓인 보리밥 소쿠리는 비어 있다
텃밭에 늙은 가지를 따
먹다 집어던지고
아릿한 입맛만 다신다
잠자리를 쫓는 것도
흙장난도 시들해지는 저물녘
뒷집에선 저녁연기 잦아들고
나직한 토장국 냄새
담을 넘어오는데
싸하니 횟배가 아프다
어머니는 언제나 돌아올까?
자꾸만 까치발로 내다보는 들길
저녁 해는 먹다 버린
가지 꽁다리만큼도 안 남았다
땅거미에 젖어드는 빈집
기다림에 지쳐 설핏 잠이 든다
어머니 밥 짓는 소리
초저녁별이 뜨고 있다
-시 <여름날>전문
시인의 개인적인 향수일지라도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향수와 무관하지 않다. 시 <고려인을 위하여>에서 읽은 대로 그들의 고향은 카자흐스탄이고 우즈베키스탄이고 또 원동인지 모른다. 아니 조선이고 대한민국이다. 이 시는 멀리 고향에서의 어렸을 적 모습을 몽환처럼 회상하고 있다. 조국의 음식을 잊지 않고 조국의 명절, 조국의 말과 글을 버리지 못하고 살고 있는 알마티의 고려인처럼 시인은 고향에서의 유년을 잊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 어머니, 지독한 가난, 부모를 기다리는 어린 날의 외로움은 바로 모든 디아스포라의 절박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구기종목 최초로 동메달을 따낸 한국 여자배구의 주역 윤영내 선수가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 <한 여인의 짧은 기록>에서 윤 선수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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껑충거리며 환호하던 승리자로서의
그녀를 기억한다
아름다웠노라고 정령 아름다웠노라고
그녀는 톈산과 광활한 평원이 펼쳐진 언덕 위에
곤한 육신을 풀었다 서러워 곡해줄 자식조차 없어
광야를 맴돌던 말들이 울어주어야 했고 살찐
까마귀들이 떠나지 않는다
-시 (한 여인의 짧은 기록>부분
며칠 전엔 홍범도 장군의 생전 생생한 동영상이 발견되어 KBS 뉴스에 보도되고 특별방송이 방영되기도 했다. 1920년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도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어 그곳에서 고려극장 야간 수위를 하고 정미공장 근로자로 일했다고 하니 우리 민족 영웅의 쓸쓸한 말년이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다. 시인은 시<홍범도를 그리며>에서 잊혀져 가는 그의 행적을 안타까워하며 헌시를 바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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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가지 않았으리
길 잃은 세상 기치 끝에
핏물의 고드름이 반짝거리는데
무리를 이끄는 일
신세계로 나아가는 일
그것이 대장부의 삶이었거늘
애재라
애재라 흔적을 지우는 일
그 또한 삶이 아닌가
- 시 <홍범도를 그리며> 부분
사람이 모이면 어디에서나 문화가 발생한다.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된 중앙아시아에도 그곳만의 고유한 문화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점 한국어가 잊어지는 사회에서 민족문학이 꽃 피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이제 그곳에서는 한국어가 아니라 현지어로 문학작품이 쓰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 탁월한 시인이 그곳으로 이주하여 문학회를 만들고 문예지를 창간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하겠다.
KBS World
바람이 분다, 갑자기
비닐봉지들이 놀라 하늘로 날아오른다
꼭쥬베* 송신탑을 배경 삼아
먹구름이 걸쳐 있고
흙바람이 도시를 덮는다
공원의 나무들은 일제히 허리를 꺾고
쉬콜라**의 여자애들은
치맛자락을 여민다, 결국
비닐봉지 하나가
지붕 위 접시 안테나에 걸려 있다
놀란 새처럼 파르르 떨고 있다
무엇이 두려운 걸까?
최원정 아나운서가 입을 벌린 채
정지화면으로 떠 있고
결국 6시 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시 <KBS World> 전문
(*카자흐어로 푸른 언덕, 한국의 남산처럼 송신탑이 있다
**초중고의 학교)
이 시는 알마티에서 KBS프로그램 <6시 내 고향>을 시청하다가 TV화면이 갑자기 정지 상태가 되어버린 순간을 재치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멀리 고국의 <6시의 내 고향>을 시청하며 향수를 달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생활이 안정되어야 고국에 대한 사랑도 향수도 발현될 것이다. 시인은 알마티 그곳에서 세탁소를 하며 삶을 꾸려가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종종 티브이 화면을 보며 그곳 동포들을 단편적으로나마 보고 듣는다. 시집을 통하여 그곳 소식을 접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는 이 시집의 시를 통해 그곳 실정을 비교적 상세히 전달받는다. 문학작품이 아니라 그곳 현실에서의 삶은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띨 것이다. 이런 향수는 시집 속 다른 시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고 있다. 시 <아버지> <개떡>에서도 이역만리 타향에서 고향과 부모를 그리는 절박한 심정이 나타나 있다. 시 <아버지> 한 편 더 읽는다.
아버지
요 며칠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자주 나타나신다
말이 없으시다
뒷모습만 보여 주신다
아부지 아부지 어디 가?
유년의 나는 목이 메어 부르지만
휘적휘적 사립문 밖으로 나가버리신다
논에 물꼬를 보러 가실 때의 차림
걷어 올린 종아리에 물때가 반질반질하다
생전에도 남루한 옷만 입으시더니
아직도 근심을 벗어버리시지 못하셨는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근심을 쌓아가는 일
이제 내가 그 일을 대신하고 있는데
만 리가 넘는 알마티
묘조차 찾아가지 못하는 아들의 꿈속으로
어이 손수 오시는가
창밖에 이른 봄비가 내리고, 눈물이
베갯잇을 적시는 새벽 나는
버드나무 곱게 늘어선 어릴 적 옛집
사립문 밖에 서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
-시 <아버지> 전문
시인의 고향은 충남 논산시 채운면 새터마을이라고 한다. 시인은 그 마을을 떠올리며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있고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거무튀튀하고 못생긴 쑥개떡을 그리워하고 있다.(시 개떡’에서) 이젠 구소련이 해체되어 위성국가들이 모두 독립했다. 카자흐스탄 동포들도 고국을 오가고 고국에 와서 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도 자유롭게 중앙아시아로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 최석 시인이 언제까지 그곳에 머물며 시를 쓰고 문화운동을 펼칠지는 몰라도 그의 시정신은 그곳 고려인들과 오래 함께할 것이다. 고국을 떠나 멀리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디아스포라 동포문학을 이끌고 있는 시인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시인 최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