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해전이 시작된 곳, 이순신대교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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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이 시작된 곳, 이순신대교를 바라보며
  • 허회숙 객원기자
  • 승인 2022.08.1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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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기획]
불멸의 이순신을 그리며 봉화산을 오르다

이순신대교.   왜적과 7년 전투를 이끈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해전이 시작된 곳. 

여수 10경 중 하나로 꼽히는 이순신대교는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노량해전이 펼쳐졌던 묘도와 광양시 금호동 사이 바다 위에 건설되었다. 순수 우리 기술로 시공되어 2013년 2월 7일 개통된 국내 첫 현수교다.

여수에서 북동쪽으로 30분쯤 달려 묘도대교를 건너니 이순신대교 홍보관과 봉화산 봉수대가 있는 묘도에 도착한다.

묘도는 섬 모양이 고양이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섬 중앙에 봉화산(246m)이 있고, 구릉성 산지로 되어있다. 남쪽으로 경사가 완만하여 촌락과 농경지를 이루고 있어 주민들은 어업보다는 농업에 더 많이 종사한다고 한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의 격전지로 유명하며, 이때 쌓은 도독산성이 남아있다. 주위에는 성곽과 포대를 설치했던 흔적이 있다.

봉화산 중간쯤 까지는 꼬불꼬불 조금 위험한 길을 따라 승용차로 올라갈 수 있다. 산 중턱에 볼라드가 설치돼 있어 이곳 간이주차장에 차를 두고 걷기 시작했다.

전망대까지 500m라고 하는데 꽤 가파른 길이어서인지 멀게 느껴진다.

길가에 이름 모를 온갖 풀꽃들이 어울러져 아련한 향기를 풍긴다.

왼쪽으로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고 멀리 이순신대교의 위용도 아스라이 보인다.

인적이라곤 없는 호젓한 산길에서 소슬한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산속 공기가 유난히 맑고 달콤하다.

가파른 길에 지쳐 발걸음이 무거워질 즈음 도착한 봉화산 봉수대는 임진왜란 때 큰 역할을 하며 역사의 현장을 지켜왔다.

얼굴과 목의 땀을 씻으며 무대처럼 멋지게 앞으로 돌출시킨 나무 전망대에 올라 노량 앞바다를 바라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오느라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스레 확 트인다.

아~ 이래서 이곳을 여수 10경 중 하나라고 했구나 싶다.

해상을 지나는 수만톤급 컨테이너 선박이 장난감처럼 보일 만큼 거대한 모습이다. 총 길이가 2천260미터로 국내에서는 가장 길고, 세계에서는 네 번째로 긴 다리다.

주 케이블을 설치하기 위해 해상 위에 세워진 두개의 콘크리트 주 탑은 63빌딩과 서울 남산보다 높다.

주 탑 사이 거리는 충무공 탄생년도인 1545년에 맞춘 1천545미터이며 7.0 규모의 지진과 초속 90미터의 강풍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됐다고 한다.

 

요즈음 이순신장군의 한산대첩을 그린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이 누적 관객 500만을 넘어섰다.

한산대첩은 1592년 (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이다.

당시에는 견내량대첩(見乃梁大捷)이라고 불리웠던 이 한산해전의 승리로 평양까지 진격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추가보급 및 병력지원을 받을 수 없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다른 해전들에 비해 군사학적으로 가치가 높은 전투로, 해상에서의 포위섬멸전을 이 정도로 정교하게 선보인 전투는 세계사적으로도 드물다.

2014년에 개봉한 ‘명량(鳴梁)은 극장에서만 1,760만명이 관람했다.

1597년 9월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전남 진도군 군내면에 위치한 좁은 수로, 명량에서 왜선을 격파한 전투이다.

왜군이 133척의 배로 공세를 취하자 조선수군은 불과 12척의 배로 울돌목의 좁은 수로에서 일자진(一字陣)을 치고 적의 수로 통과를 저지했다.

조류의 방향이 바뀌면서 서로의 진영이 뒤엉키기 시작하자 조선군은 적장 구루시마의 목을 베어 사기를 높이며 총공격을 감행했다. 이에 당황한 왜군은 30여척의 배를 잃고 퇴각했다.

이 싸움으로 조선군은 다시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왜군은 수군을 이용해 전라도로 침입하려던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년에는 이순신 삼부작에 마침표를 찍는 ‘노량: 죽음의 바다’가 개봉된다고 한다. 바로 이 일대가 노량해전의 무대였다. 이순신 장군의 최후를 담은 장엄한 순간은 역사에 길이 남아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린다.

한산대첩에서 세계 해전 사에 유례가 없는 대승으로 전세를 역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모함에 휘둘리어 파직되고 죄인이 되어 한양으로 압송당한 이순신 장군. 거북선은 물론이고 쓸 만한 전함은 모두 잃고 불과 12척 남은 배를 이끌고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은 이순신 장군.

어떻게 그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의 순간에,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의 각오로 임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신 한마디 말은 대대로 우리 한국인들의 '불굴의 혼'을 일깨우고, 호국의 정신으로 하나로 만들어 주셨다.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왜군은 400여척의 전선을 격파당하고 남해 방면으로 도망쳤는데 이순신 장군은 한 명의 왜적이라도 살아 돌아가면 반드시 또 쳐들어 올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추격전을 펼쳤다. 이순신은 이 추격전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봉화산에서 내려와 이순신대교 홍보관과 이순신장군 전공탑을 살펴본다. 홍보관 앞 뜰에 보라색 꽃이 소복히 피어 아름답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난세에 이순신이라는 영웅이 없었다면 조선은 어찌 명맥을 유지할 수가 있었을까?

충무공 이순신의 일대기는 막막한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길을 밝혀주고, 오늘의 고통을 가라앉히는 진통제이기에 '명량'과 더불어 '한산'까지 이순신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는 개봉되는 즉시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난세는 영웅을 만들어 낸다'고 했던가?

다시한번 이 나라에 영웅이 출현하여 갈갈이 찢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기적처럼 일궈놓은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지켜주기를 기대하며 귀가길을 서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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