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행정학의 토대를 정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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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행정학의 토대를 정립하다
  • 김윤식
  • 승인 2023.09.11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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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2) 유훈 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 김윤식 / 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제물포고 교정에서 유훈 전 서울대 교수(가운데). 좌측은 고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우측은 심재갑 전 인하공업전문대학교 교수

 

우리나라 행정학계 초기 학자로서, 또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로서 저명한 유훈(兪焄, 1929~ ) 교수의 평생 활동과 업적에 관해 기록하기 전에, 먼저 유 교수의 성품이 드러나 있는 글부터 소개한다.

내가 참석도 안 한 교수협의회의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마당에 회장을 사퇴한다면 교수협의회의 역사에 바람직하지 못한 전례를 남기게 될 것 같아서 1회에 한하여 회장직을 맡아보기로 작정하였다. 부회장에는 문리대 전광용 교수와 행정대의 유훈 교수가 선출되었고, 간사에는 치대의 손성희 교수가 맡아서 나를 도와주었다.

특히 유훈 부회장은 천성이 원만하며 참을성도 많고 꾸준한 성격이라 성급한 나에게 좋은 완충제 구실을 해주었다. 교수이면서 저명한 소설가인 전광용 부회장은 성미가 나보다도 더 격정적인 함경도 기질이어서 그를 위해서도 유훈 부회장은 늘 적지 않은 배려를 해야 했었다.

 

- 원만하고 온후한 성품

과거 서울대 농과대학 교수를 지낸 원예학자 류달영 선생이 쓴 회고기 부분이다. 1973년, 제13대 서울대학교교수협의회 회장을 맡게 된 경위와 함께, 같이 일하게 된 전광용, 유훈 두 부회장의 성품을 솔직하고 흥미롭게 기록하고 있어 발췌했다. 이 글은 1982년도 교수협의회보에 게재됐던 것이다.

글의 내용대로 유 교수는 1976년까지 3년간 교수협의회 부회장을 지내는 동안 류달영 회장과 전광용 부회장 사이에서 조정 역할을 맡아 하느라 얼마만큼은 수고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미난 이 글을 읽으면서도, 유훈 교수의 성품에 대한 류달영 박사의 언급만큼은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날 인중제고총동문회 석상이나 길영희선생기념사업회 자리에서나 유 교수는 늘 낮은 음성과 함께 단정하고 온후한 학자풍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류달영 박사가 “천성이 원만하며 참을성도 많고 꾸준한 성격”이라 한 것은 조금도 어긋난 표현이 아니라는 말이다.

참고로 교수협의회 외에 유 동문이 몸담았던 학내 기구로는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서울대학교 평의원회 의원을 지낸 것이 전부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 유훈 동문의 평생에 걸친 학업과 연구와 국가 행정제도 발전을 위해 헌신해온 역정(歷程)을 살펴보자.

유 교수는 1949년도 6년제 인천중학교 제2회 졸업생이다.

6월 18일에 인천중학교 6년제 2회 졸업식이 있었다. 졸업생은 전부 25명이었다. 이 2회 졸업생들이 인천 시내에 또 한 번의 낭보(朗報)를 전하게 된다. 전년 1회 졸업생 전원이 대학에 합격한 선례를 똑같이 되풀이해서 2년 연속 졸업생 전원 대학 합격이라는 전무후무한 표석(標石)을 세운 것이다.

졸업생 25명이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 대학에 합격한 사실도 여간만 드문 기록이 아닐 것이다. 광복 후 새 인천중학교가 전한 개교 첫 두 해 연속 대학 전원 합격 소식은 인천 시민들에게 명예롭고 긍지 높은 ‘엘리트 인중(仁中)’의 이미지를 더욱 선명하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기록은 『仁中濟高70年史』 초교 내용의 일부이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새로이 개교한 인천중학교가 두 번째로 치른 1949년도 졸업식에서도 졸업생 25명 전원이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 대학에 합격”함으로써 인천 지역사회에 엘리트 학교임을 과시했다는 자랑스런 내용이다.

그 25명 중의 한 명인 유훈 교수도 서울대 법과대학에 합격했던 것이다. 유 동문의 서울대 법대 입학 기록은 광복 후 인천중학교 출신으로 최초였다. 물론 더 후일의 이야기이지만, 인천중학교 졸업생 중에서 서울대학교 교수가 된 것도 처음이다.

1954년 서울대 법대 4학년을 마친 유 교수는 공부를 더 계속할 결심으로 대학원에 입학해 1957년에 법학석사 학위를 받는다. 6․25 휴전 후 국가 재건을 위해 모두가 뛰던 이 무렵, 미국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나라에 미국 행정학 원서와 번역서들이 전파되고, 급기야 1956년, 정통 행정학 학문 바탕이 없던 우리나라에 한국행정학회가 창립된다.

 

- 행정학 선발학자로 유학길에 오르다

법학으로부터 독립된 행정학 자체로서 관심이 증대되면서 몇몇 대학 안에 행정학과가 개설되고, 서울대에서도 행정대학원 설립 필요와 함께 젊고 새로운 전문 행정학 교수 자원(資源) 양성에 나선다. 유훈 교수 같은 촉망되는 후보자들이 여기에 낙점되는 것이다.

특히 1955년부터 우리나라 정부 각 기관의 원활한 행정 체계 구축을 위한 미국의 행정기술원조사업에 의거해 한국인 학생들이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에서 행정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전후 미국의 대한기술원조계획을 담당한 국제협조처(ICA)의 원조사업의 일환이었다.

이리하여 유훈 교수는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하던 1957년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대학원에 국비 장학생으로 유학해 행정학 석사학위를, 그리고 2년 후인 1959년에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 동문 나이 30세 때의 일이었다.

서울대학교와 미네소타대학교는 미국의 대한 원조의 일환으로 자매 관계를 맺어 1955년부터 공대․의대․농대 교수들이 많이 미네소타대학에 와서 수학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과학 분야는 늦게 행정학만이 프로그램에 추가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듬해 일 년간 속강인 재정학 교실에서 兪焄 선배(전 서울대 행정대학원 원장)와 동학하게 되었다. 나는 고학하는데 兪焄 형은 정부 장학생으로서 공부만 하면 되었다.

당시 兪焄 형은 매일 4~5시간의 잠과 식사시간 외에는 도서실에서만 살고 있었다.

첫 학기는 그래도 내가 먼저 온 탓으로 조금의 도움이 되었는지 몰라도 兪焄 형은 둘째 셋째 학기에는 전 학급에서 일등을 기록했고 담당 교수는 교실에서까지 한국 학생의 발전을 교훈적이라고 하며 자랑했다. 처음으로 한국 학생의 긍지를 兪焄 형 덕택에 가질 수 있었다.

과거 한국개발연구원 원장과 울산대학교 총장을 지냈던 구본호 씨가 1985년 10월에 「나의 유학 시절」이란 제호로 매일경제신문에 연재했던 회고기의 일부분이다. 내용에서 유훈 교수의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하는 지독한 열성과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유학 2년 만에 초고속으로 석사, 박사학위를 연거푸 취득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이 같은 하루 20시간에 가까운 면학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유학 첫 1학기를 제외하고 2, 3학기부터 전체 학급 1등을 차지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노력 이외에 두뇌의 우수함도 분명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유 동문이 법과대학 재학 중이던 1953년, 스물네 살 약관의 나이에 이미 제5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두뇌의 명석과 함께 학문에 대한 열성,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1959년 박사학위 취득과 함께 미국에서 돌아온 유 교수는 그해부터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창설 교수로서 강단에 선다. 그리고 우리나라 초창기 행정학 선발(先發) 학자로서 초석을 쌓기 시작한다.

미국에서의 연구와 미국의 행정학에 영향을 받으면서 한국적 시점에 초점을 맞추어 이론을 체계화하는 데 노력한 초창기의 행정학 교재로는 김운태의 ≪행정학요론≫(1959), 이상조의 ≪행정학원론≫(1959)·≪신행정학≫(1961), 박동서의 ≪한국 관료제도의 역사적 전개≫(1961), 유훈의 ≪행정학원론≫(1961), 박문옥의 ≪행정학≫(1962) 등이 출판되었다.

인터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기록된 우리나라 초기 행정학 관련 저술들에 관한 내용인데. 이 중에 1961년에 발간된 유훈 동문의 『행정학원론』도 보인다. 한국행정학의 학문적 토대는 이렇게 유 교수 같은 초기 학자들에 의해 세워졌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1959년에 서울대에 행정대학원이 설립되면서 조교수로 강단에 선 뒤, 유 교수는 1994년 정년 퇴임 때까지 35년간을 줄곧 서울대 교수로서 봉직한다. 그중 1976년부터 1982년까지의 6년간은 행정대학원장 보직을 맡기도 했다.

교수로서, 학자로서 살아온 유 교수의 35년 세월에 대한 평가는 정년 퇴임 당시의 언론 보도에 잘 요약되어 있다. 1994년 8월 25일자 연합뉴스의 기록을 보자.

서울대 행정대학원 박동서 유훈 조석준 교수의 정년 퇴임 기념식이 25일 오후 6시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렸다.

이날 기념식에는 학계에서 김종운 서울대 총장, 안병만 한국외국어대 총장, 김광웅 서울대 행정대학원장, 강신택 교수 등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들, 강민구 행정대학원 총동창회장 및 김영광 행정대학원 고위정책과정 동창회장 등이, 관계에서는 이영덕 국무총리,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 최형우 내무부장관, 홍재형 재무부장관, 윤동윤 체신부장관, 황영하 총무처장관, 박윤흔 환경처장관, 김광일 고충처리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또 정계 인사로는 이종률 국회 사무총장을 비롯, 강부자, 최욱철, 조일현, 제정구, 장경우, 정몽준, 이종찬, 최재승 의원 등이 참석했다. <중략>

이날 김광웅 행정대학원장은 식사를 통해 "한국 행정학계의 태두이신 세 분 선생님은 영미 행정학을 한국화해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하셨다."며 퇴임하는 교수들의 업적을 칭송했다.

박 교수와 유 교수는 미국 미네소타 대 행정대학원에 함께 유학, 행정학 석사와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59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창설 교수로 임용돼 35년 동안 재직해왔으며, 조 교수는 61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로 임용돼 같은 길을 밟았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유훈 교수 등 세 사람 “한국행정학계 태두”의 합동 정년 퇴임을 축하하고 기리는 자리로서 문민정부 시절답게 그 예우가 빠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미 행정학을 한국화해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행정학의 학문적 정립을 이룩한 유 교수 등 세 분의 업적은 단순한 칭송 이상의, 국가적으로도 의당 기념, 축하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년퇴임식 관련 경향신문 기사(1994. 8. 26.)
정년퇴임식 관련 경향신문 기사(1994. 8. 26.)

 

- 인천대 관선이사로 분규 해결

서울대를 정년 퇴임한 후 유 교수는 명예교수가 된다. 물론 1997년에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대우교수로 초빙되어 노년에 접어든 2005년까지 강단에 서기도 했다.

유 교수는 실제 서울대 현역 교수 시절부터 정부 기관의 정책자문 위원, 연구위원으로 많은 공헌을 했다. 세제심의회 위원에 이어 1962년 예산회계제도심의회 위원을 비롯해, 1966년 행정개혁조사위원회 위원, 1973년 한국개발연구원 초청연구원, 1980년 총무처에 신설된 행정자문위원회 위원, 1981년 국무총리실 정책자문위원, 감사원 정책자문위원, 내무부 정책자문위원, 1984년 정부투자기관 경영평가단장, 1987년 예산회계제도심의회 위원장, 1992년 정부투자기관 경영평가위원회 위원 등 국가의 중요 시책을 자문하고 평가하는 직책을 두루 역임했다.

서울대학 퇴임 2년 후인 1996년, 마지막으로 3년 임기의 제2대 경기개발연구원 원장에 취임해 경기도 발전을 위한 각종 현안, 시책 등을 조언했다.

순수 전공 학회 관련해서는 1975년 한국행정학회 회장, 그리고 1987년 한국공기업학회 회장 등을 지낸 경력이 있다.

특히 1988년부터 이사진 퇴진을 요구하며 시작된 인천대학교 내 분규를 해결하고 조기 학교 정상화를 위해 1992년 6월 정부는 유훈 동문을 필두로 9명의 관선 이사를 파견함으로써 엄정한 경영을 통해 학교 정상화를 꾀하기도 했다.

 

2000년 11월 25일 제물고고등학교 교정에서 거행된 길영희 선생 동상 제막식
2000년 11월 25일 제물고고등학교 교정에서 거행된 길영희 선생 동상 제막식

 

- 길영희선생기념사업회를 이끌다

이제 끝으로 유훈 교수와 모교 동창회, 그리고 특히 스승이셨던 길영희 초대 인천중학교 교장 선생의 추모 사업에 관련한 업적을 밝힌다. 순서를 바꿔 吉 교장 선생 추모 사업 내용부터 기록한다.

길영희 교장 선생은 1984년 3월 1일, 향년 85세를 일기로 작고하신다. 당시 인중·제고총동창회 회장이었던 유훈 교수가 장례위원장으로서 동창회장으로 장례식을 엄수한다. 그리고는 즉석에서 유 교수가 주축이 되어 길영희 교장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길영희선생기념사업회를 발족시킨 것이다.

유 교수는 길영희선생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을 맡아 3년간 선생 추모제를 거행하는 등 기념사업회를 이끈다. 그 후 1991년 3월부터 1995년 2월 말까지 다시 4년간 회장직을 수행함으로써 기념사업회의 조직과 사업 바탕을 더욱 공고히 한다.

기념사업회는 첫 사업으로 吉 교장 묘비 건립을 추진한다. 이에 묘비건립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일사불란하게 추진하여 1984년 12월 2일에 제막식을 거행한다. 길 교장 선생이 작고하신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완수한 것이다. 묘비건립위원회 역시 유 교수가이 위원장을 맡아 이룬 것이다.

묘비 제막에 이어 유 교수는 길영희선생추모문집편찬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매 3년마다 증보판을 발간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2년간의 준비 끝에 1986년 11월 27일에 창간호를 발간해 낸다. 행정학자로서 꼼꼼하고 치밀한 사업 수행력과 더불어 스승에 대한 다함 없는 흠모와 애정의 발로(發露)를 읽을 수 있다. 이 문집에 드러난 길 교장 선생의 교사로서, 스승으로서의 면목(面目)과 함께 제자들이 영원히 잊지 못하는 선생의 교육 신화를 전국의 학생들에게도 읽혀 새기게 하고, 그 독후감 우수작을 포상하는 행사가 곁들여진다.

그러나 이런 사업들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1991년 5월, 유훈 동문 주재 아래 기념사업회 운영위원회를 열고 생전에 길영희 교장 선생이 펼친 교육이념을 전파하고 참 교사상 구현에 애쓴 교사를 격려, 칭송하는 의미의 「길영희교육상」을 제정한다. 이 교육상은 1991년 11월 23일에 첫 시상식을 가진 이래 오늘에 이른다.

일개 고등학교에서 교장 선생을 추모하는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다양한 사업을 펼쳐오고 있는 곳은 인천중학교·제물포고등학교가 전국에서 유일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1991년에는 당시 고문이었던 유훈 동문의 건립 발의로 길영희 교장 동상이 2000년 11월 25일 모교 교정에서 제막되었으니, 제자들이 교장 선생의 동상을 모교 교정에 세워 추모하는 고등학교 역시도 이 나라에 다시 없을 것이다.

 

2000. 11. 25. 길영희 선생 유필 및 사진전시회
2000년 11월 25일 열린 길영희 선생 유필 및 사진전시회. 좌로부터 심재갑 교수, 유훈 교수, 고 최기선 전 인천시장. 

 

또 한 가지가 있다면 동상 제막과 더불어 같은 날 배포된 길 교장 선생의 전기 『영원한 스승 길영희』 발간 역시 회장인 유 교사가 편집을 맡아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하니 어찌 스승 길영희 선생으로부터 받은 무한한 은혜를 제자 유훈 교수가 추모 사업으로 세상에 밝혀낸, 이 인연을 어찌 여기에 적지 않을 수 있으랴.

결국 사람의 성장이란 위로부터 은혜를 받아 이뤄지는 것입니다. 나도 은사인 이한빈 박동서 유훈 김해동(작고) 선생님들로부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단순히 스승에게 갚는 것만으로는 확대재생산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위(스승)에서 받은 만큼 아래(제자들)로 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관계’를 잘 풀어가는 출발점이라고 봐요.

이 글은 2003년 7월 6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고 김광웅 전 서울대 행정대학원 원장의 인터뷰 기사 「인간 포석 人事의 세계」의 일부분으로, 인간이 성장하면서 상호 관계가 맺어지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한 대목이다. 김 교수는 유훈 교수의 서울대 행정대학원 제자였다.

여기서 우리는 유 교수가 인천중학교에서 길 교장 선생의 훈도(薰陶) 속에 내려받은 깊고 도타운 ‘은혜’를 훗날 사랑하는 제자 김 교수에게 고스란히 ‘풀어줌으로써’ 이룩한 온전한 인간관계의 실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유 교수는 또 인천중학교·제물포고등학교 총동창회 창설 초반, 10년에 걸쳐 회장의 책무를 수행, 헌신했다. 1965년 제11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12대를 거쳐 1971년 13대 회장 임기를 종료하기까지 6년간 내리 3代의 임기를 마치고, 1982년에 다시 제18대 회장에 피선된 뒤 역시 한 번 더 연임, 1986년에 제19대 회장까지의 임기를 마친다. 동창회 결성 초기에는 필연적으로 몇몇 동문이 중임을 하게 되나, 두 번에 걸친 연임으로 총 10년간의 동창회장 역임은 유훈 교수가 최장이며 유일하다.

1968년 12월 1일, 유 교수는 인중제고동창회보 발간을 결정하고, 이듬해부터 연 1회나마 발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실제 이 사업도 유 교수가 동창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창안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모교와 모교 동창회와 길영희선생기념사업회를 위해 헌신 봉사해 온 금년 94세의 유 교수는 고령임에도 여전히 동창회 대소사에 큰 관심과 성원을 보내고 있다.

유훈 교수는 1987년 12월 10일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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