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맥, 진품만 내는 강화 화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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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맥, 진품만 내는 강화 화문석
  • 김시언
  • 승인 2023.09.12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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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이야기]
(29) 화문석문화관
화문석문화관
화문석문화관

 

왕골공예의 산실, 화문석문화관

어렸을 때, 마루에는 늘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특히 여름철에 돗자리 위에 누워 낮잠을 자면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며 팔다리에 돗자리 자국이 길게 나 있어 낮잠 잔 흔적을 고스란히 나타내곤 했다.

현대인은 입식 생활을 많이 하지만, 좌식생활을 많이 하던 예전에는 자리가 빼놓을 수 없는 살림살이였다. 눕거나 앉으면서 더위를 식힐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집 치장에도 한몫했다.

돗자리, 하면 강화 화문석이 떠오른다. 화문. 꽃무늬. 강화에는 물들인 왕골을 손으로 덧겹쳐가면서 엮은, 무늬에 따라 잘라내면서 짠 돗자리가 유명하다.

화문석은 왕골로 짠다. 왕골은 방동사니과에 속하는 초본식물이다. 왕굴, 완초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도 자생하지만 우리나라 특유의 공예 작물로 강화와 중부 이남 지역의 논에서 주로 재배한다. 왕골 줄기는 화문석의 재료로 쓰인다. 줄기는 세모꼴이고 줄기 꼭지에서 꽃이 나와 잔꽃이 핀다. 4월 중순에 뿌린 씨가 싹이 터서 5㎝쯤 자라면, 5월 초순에 옮겨 심었다가 8월, 9월에 거둬들인다. 이때 길이는 1.5~2m에 이른다.

왕골 줄기의 섬유 조직은 매끄럽고 윤택이 나며, 다 자라면 누런빛을 띤다. 수확한 왕골은 줄기의 각에 찬이슬을 맞혀가면서 사나흘 바짝 말린다. 이렇게 해야 빛이 하얗게 바래서 윤이 난다. 무늬를 놓기 위해 물을 들이는데, 중간대 부분을 물에 담갔다가 속을 칼로 훑어낸다. 줄기는 화문석, 화방석, 삼합 등 다양한 공예품을 만드는 데 주재료로 쓰인다.

화문석의 인기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도 알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화문석 생산을 담당하던 관청이 있었고, 고려시대에 와서 화문석은 외국까지 알려졌으며 인삼과 더불어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화문석의 수요는 늘어났고, 특히 외국인이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왕골 생산지로 안동 예안을 손꼽았고, 『임원경제지』에 인용된 금화경독기에는 ‘영남의 안동 예안 사람들이 오채용문석을 잘 만들어 공물로 바친다. 서울의 지체 높은 가정이나 사랑에서는 해서, 배천, 연안의 것을 제일로 쳤으며, 경기 교동 것은 버금간다’고 했다. ‘경기 교동’은 강화를 일컫는다.

 

왕골로 짠 소품
왕골로 짠 소품

 

9월 중순이 가까워 오지만 볕이 아주 뜨거운 날, 화문석문화관을 찾았다. 아침 일찍인데도 주차장에 차가 제법 많았다. ‘화문석 후진양성 프로그램이자 왕골공예 취미교양교육’이 있는 날. 이 프로그램은 강화군민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고,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 목요일은 대자리 짜는 날이다. 수요일 금요일은 공예품을 짜는 날. 강화 사람에게는 재료까지 무료로 제공한다. 강화군민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체험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코로나19 시국 이후로 중단된 상태.

화문석문화관은 ‘왕골공예의 산실’이다. 화문석의 발상지인 송해면 양오리에 건립됐다. 강화군 송해면 장정양오길 413에 있고, 설날과 추석 연휴를 빼고는 문을 연다. 화문석문화관 1층은 우수작품전시관. 2층은 화문석전시관으로 구성돼 있다.

2층 전시관은 볼 만하다. 왕골의 품종들을 모아 전시하고 여러 짚풀의 표피세포를 볼 수 있고, 왕골 재배부터 염색까지 대형 디오라마로 풍경이 재현돼 있다. 화문석과 왕골공예품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떠한 도구를 쓰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전시관에 디오라마로 재현한 풍경
전시관에 디오라마로 재현한 풍경

 

고려 중엽부터 가내수공업으로

강화 화문석이 처음에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 중엽부터 가내수공업으로 발전돼 왔다고 전해진다. 강화로 이주한 고려 왕실과 관료를 위해 최상품의 자리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왕실로부터 특이하게 제작하라는 임금의 명을 받고 당시에 백색자리의 생산지인 송해면 양오리에 한충교씨에 의해 화문석 제작이 성공했고, 이후 다양한 도안 개발과 제조 기술이 시작됐다.

요즘 화문석문화관은 조용한 편이지만 한때 초등학교에서 단체로 체험하러 왔다. 읍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인지 요즘은 주말에 전시 관람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자리 짜는 날. 필자가 찾은 이날은 서순임 강사가 수강생들과 자리 짜는 수업을 하고 있었다. 강화에서 나고 자라고 결혼한 서순임 강사는 16살 때부터 부모님한테 화문석 짜는 법을 배웠으니 53년째 짠다. 그때는 한 집 걸러 한 집이 모두 왕골을 농사지었고, 화문석을 짰다. “이제는 왕골을 많이 재배하지 않죠. 예전에는 부지깽이도 나와서 거든다고 할 만큼 바빴어요. 아침에 딴 거 저녁에 딴 거 달랐거든요. 지금은 말리는 기계가 있지만, 그때는 산소 가장자리, 인삼밭 덮은 데 위, 도로 위에다 널었어요.”

 

수업 중인 서순임씨
수업 중인 서순임씨

 

곗자리로 화문석 마련하기도

서순임 씨는 왕골 이야기를 하면서 연신 칼등으로 왕골을 다듬었다. “원대 겉대 굵기를 맞춰주는 거예요. 왕골 줄기가 하나가 아니라 서너 개를 쓸 수 있는데, 가는 건 자리 짤 때 속에 넣거나 소품 만들 때 써요.” “강화에 돈 많다고 했잖아요. 그게 인삼 있지, 화문석 있지, 화문석 짜는 사람도 한 집 걸러 하나씩 있었거든요.”

서순임 씨는 가족 대대로 화문석을 짰다. 외할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시집 온 올케까지 모두 화문석을 짰다. 밤을 낮 삼아 짰다. “화문석 짜는 게 자기와의 싸움이거든요. 재미 없으면 못해요. 대회에 나가서 가끔 상도 타고, 지금은 선생님 소리 들어가면서 짜니 얼마나 좋아요. 온종일 짤 때는 온몸이 쑤시지만 아직 괜찮아요.” “그리고 예전에는 곗자리가 많았어요. 계를 들어서 화문석을 마련한 사람이 많았어요. 11명이 계원인데, 계를 주선한 계주는 그냥 짜주고 열 명을 한 달에 한 번씩 짜줬어요. 그때 재미가 쏠쏠했죠.”

화문석은 한때 새벽장이 서기도 했다. 2, 7일에 열리는 장날 새벽에 자리를 가지고 나가 화문석을 팔았다. 강화 화문석 시장은 물건 모두가 진품만을 취급한다는 특색이 있었고, 이 화문석을 팔고 사기 위해 한밤중이 떠들썩했다.

 

수강생이 짜고 있는 화문석 자리
수강생이 짜고 있는 화문석 자리

 

화문석의 맥은 이어져야

그는 요즘 농사는 스스로 쓸 것만 짓는다. “4월 중순께 씨를 뿌려서 오월 중순께부터 심어서 70일 안쪽에 따요. 두 달 잡는데 자리 맬 수 있는 건 뻣뻣하지 않아서 70일 걸리죠. 애벌 두벌로 농사지어요. 세벌은 40㎝밖에 나오지 않아 짓지 않아요. 품 들인 거에 비해 너무 작게 나오더라구요.” “왕골은 고온에서 쑥쑥 자라요. 마디가 없잖아요. 가을 들어서 찬바람이 불면 자라지 않거든요.”

그의 바람은 강화에서 화문석의 맥을 잇는 사람이 많이 나오면 좋겠단다. “100명이 배워서 두 명만 해도 맥이 끊기지 않을 거예요. 여기 수강하는 분들이 이 일이 재밌고 좋아서 계속 이어나가면 좋겠어요. 돈이 안 되니까 끝까지 하기가 쉽지 않죠. 하지만 하다 보면 실력이 늘고, 매력을 느낄 거예요. 또 작품 하나를 완성하면 기분이 얼마나 좋다구요.”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수강생들이 “계속할 거예요”라고 대꾸한다.

 

화문석문화관6_전시된 자리
전시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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