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교동 망향대 / 무학리 은행나무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북한땅
늘 그렇듯이, 교동으로 간다고 마음만 먹어도 설렌다. 명절을 앞두고 망향대에 가보기로 했다. 교동대교 오른쪽으로 길게 나 있는 땅, 북한땅이다. 북한을 이리 지척에 두고 사는구나. 교동을 갈 때마다 어김없이 드는 생각이다. 시퍼런 물이 가득한 고구저수지를 지나 대룡시장 입구 회전교차로에서 두 시 방향으로 들어섰다. 지석리 가는 길. 북한과 가장 가까운 교동도 북측 작은 언덕에 있는 망향대로 가는 길이다.
교동면 지석리 산 129번지. 망향대 주차장은 월요일인데도 차가 몇 대 있었다. 오십 미터가량 올라가니 칠팔십대로 보이는 일행이 의자에 앉아 차와 간식을 먹고 있었다. 망향대에서는 손을 뻗으면 북한땅이 닿을 듯, 소리치면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북한땅을 향해 놓인 망원경은 두 대. 천천히 봐도 되겠구나 하는 순간, 주차장에서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추석을 앞두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구나. 서둘러 망원경에 눈을 갖다 댔다.
바다 건너에 건물들, 주택들, 논밭이 보였다. 논밭에 가을색이 완연했다. 불과 3㎞ 바다 건너에 산줄기가 길게 이어졌고, 산줄기 아래에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어른들이 밭에서 일하고 아이들은 바닷가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와 너무 똑같다는 사실을 변함없이 확인했다. 무엇보다 북한이 이토록 가까운 데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우리네와 똑같이 사람 살아가는, 우리 마을과 같은 모습이었다.
희망을 담은 간곡한 메시지들
망향대는 한국전쟁 중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에서 피난 온 주민들이 중심이 돼, 북한땅에 남아 있는 부모형제 친지 친구 등을 그리워하여 망배비 망배제단과 협찬자 안내석 등을 1988년 8월 15일에 준공했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써있다.
‘망향대에서 건너보면 연안읍의 진산인 비봉산과 남산, 남대지 등 드넓은 연백평야가 눈앞에 전개돼 소리를 지르면 고향 들녘에 울려퍼질 듯, 손을 벌리면 고향산천이 잡힐 듯 직선거리가 약 3㎞ 정도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함으로써 강화군에서는 800만 실향민들의 이산의 아픔을 위로하고 머지않아 고향산천을 다시 밟아볼 수 있다는 희망과 꿈을 심어주고 안보의 중요성을 재삼 일깨워주자는 취지에서 본 망향대를 관광코스로 지정하였습니다.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민회장’
망향대 한쪽 펜스에는 방문객의 희망 메시지가 걸려 있었다. ‘빨리 남북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를 비롯한 마음을 담은 메모들. 하나하나 천천히 읽으면 가슴 한편이 묵직하고 따스해진다. 고향을 바라보고, 그리워하고, 마음을 쓸어내리고. 고향을 지척에 둔 사람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와 닿았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주차장에는 노인 몇이 말 없이 북한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언제 오나.” 한 분이 혼잣말을 했다. 그들을 따라 바다 건너를 바라봤다. 비무장지대 없이 철조망 해안선 너머 북한이 바로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어 바다로 나가 어업 활동을 할 수 없어 바다는 언제나 조용하다. 밀물과 썰물만 오갈 뿐. 바다를 빼앗긴 교동섬. 나이 지긋한 노인이 차에 기대어 북녘땅을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었고, 바닷물은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학이 춤추는 마을, 무학리 은행나무로
망향대를 나와 무학리로 향했다. 농로에는 추수하는 차량이 많았다. 트랙터와 트럭이 곳곳에 많았다. 트랙터가 논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면서 벼를 수확하고 있었다. 추석을 앞두고 벌서 추수한 논도 눈에 많았다. 이제는 벼가 익어 본격적으로 추수를 시작하는 것 같았다.
농로를 벗어나 처음 도착한 마을. 학이 춤추는 마을, 무학리. 교동면 무학리 542. 마을 한복판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언제 봐도 멋지다. 그러니까, 이 나무를 봐온 지 스무 해가 지났건만, 나무는 늘 그 자리에서 담담하다. 그동안 여러 번 나무를 봤어도, 은행 열매가 촘촘히 달려 있거나 바닥에 우수수 떨어져 있을 때는 처음이었다.
나무는 보호수. 1982년 10월에 950살로 지정됐으니, 지금은 1000살이겠다. 나무높이 25미터 이상. 나무둘레 7.5미터. 나무 앞에는 친절한 설명문이 있다.
‘고려 중엽(15대 숙종 1095~1105년경) 우리 마을 이름을 무서산리라 불렀으며(이후 무학리로 개칭) 마을 한가운데에는 큰 부잣집이 있었다. 뒤뜰에는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어느 날 부잣집은 화재가 났으며 은행나무도 함께 타버리고 말았다. 이듬해 봄에 타버린 은행나무 그루에서 새 가지가 나와서 자랐는데 이 나무가 우리 마을을 지켜준 천년수 은행나무이다. 지금도 은행나무 부근을 파보면 숯과 기와조각이 나오고 있다. (주.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사람은 떨어진 곳을 파면 숯이 나오는데 이 숯을 다려서 약으로 쓴곤 했다.) 이 나무는 암나무이며 수나무는 북한의 연백군에 위치해 여름이면 꽃가루가 날아와 지금도 은행이 가지마다 많이 열리곤 한다. 이 나무 아래는 무학리 주민들이 여름철에 피서지로 사용하고 있다.’
안내문에 무학리가 무서산리였다고 하는 대목이 있다. 《강화 구비문학 대관》에 보면 무서산을 ‘쥐 서(鼠)’를 써서 쥐산이라고 했지만, 산 모양이 학이 춤추는 것 같았다고 한다. 쥐산은 그 봉우리가 붓 끄트머리처럼 생겼고, 여기 사는 사람은 밭을 갈다가도 글 한 번 지었다는 얘기가 있다고. 하지만 일본사람들이 봉우리를 쳐서 인재가 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도 교동사람들은 무학리 사람이라고 하면 명필이라고, 아주 필체가 좋다고 생각했다. 산봉우리가 삐죽하게 붓끝 같아서 그렇게 생각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인지, 어디선가 붓 가는 소리,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은행나무 아래를 이리저리 서성이는데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간다. “할머니, 나무가 엄청 멋져요!” “멋지지. 은행 필요하면 마음대로 주워가도 돼.” “구경만 할게요, 이렇게 멋진 나무랑 사시니까 좋으실 것 같아요.” “좋지, 좋고 말고, 여름에는 나무 아래서 살아. 얼마나 시원한지 몰라.”
이렇게 멋진 나무랑 한마을에 살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딱 한 번 사는 인생, 이웃이 이렇게 큰 나무면 얼마나 즐겁고 신날까, 대문만 나서면 만나고 집 안에서도 나뭇가지며 이파리가 보이니 얼마나 가슴 따뜻해질까,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무 아래 한참 앉아 있었다.
망향대와 은행나무를 보고 나오는 길. 교동 넓은 들판에는 곳곳에 트랙터로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