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영초교 그림천재, 한국 기록펜화의 장르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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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영초교 그림천재, 한국 기록펜화의 장르를 열다
  • 유사랑
  • 승인 2023.10.23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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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8) 김영택 펜화가 – 유사랑 / 시사만평가, 자유기고가
인천in이 9월부터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고 활약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고 김영택 펜화가 (사진= 법보신문 제공)

 

그림천재, 우리 건축문화재의 아름다움에 눈뜨다

0.5mm 펜 하나로 우리 전통문화재 뿐 아니라, 세계 인류의 문화유산들을 정밀하게 그려낸 故김영택(1945~2021) 화백은 한국 기록펜화 장르의 개척자이자 거장으로 손꼽힌다. 서양인의 필기도구인 펜과 잉크를 사용하면서도 서양의 펜화기법을 배제하고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자신만의 고유한 펜화기법을 창안해낸 것으로 평가받는 김 화백은 병마와 싸우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손에서 펜을 놓지 않은 집념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제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단순히 기록예술이라는 장르를 넘어, 또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주목받고 있다.

1945년 인천에서 출생한 김영택 화백은 창영초등학교 시절부터 이미 그림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다. 중학생 때 펜으로 그린 500환짜리 지폐를 동네 문방구 주인이 진짜 돈으로 깜빡 속았을 만큼, 그의 재능은 타고난 것이었다. 그 일로 부친께 된통 혼이 나기도 했지만, 끼니 때마다 낮은 한옥의 부엌에서 높은 마루 위 안방까지 밥상을 날라야하는 모친의 불편을 덜어드리기 위해 독학으로 한옥 설계까지 공부하기도 했던, 조금은 엉뚱한 소년이었다. 그때 머리 속으로 한옥 구조를 수없이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익힌 공간 개념은 나중에 우리 문화재를 펜으로 옮길 때 요긴한 밑심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제물포고등학교 시절엔 미술반 활동을 하면서도 사진에 꽂혀, 친구 집에 있던 35mm코닥카메라를 제 것인 양 빌려 쓰며, 우리 건축문화재의 아름다움에 깊이 빠져들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 일련의 성장과정이 훗날 그를 운명적으로 기록펜화의 길로 이끈 동인(動因)이 된 건지도 모른다.

 

사진 = 법보신문 제공

 

세계적 광고 디자이너 반열에 오르다

김영택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건방져 보일 정도로 자존감은 하늘을 찔렀지만, 정작 외모콤플렉스가 심해 대학졸업 때까지 그 흔한 미팅도 한번 못해봤다. 오로지 그림그리기에만 빠져 지내다가, 1972년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졸업과 동시에 제일기획에 입사했다. 거기서 대한항공, 일양약품 등의 광고를 도맡아 제작하다, 다시 나라기획으로 옮겨 아트디렉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근무하기도 했다.

5년 뒤 회사를 나와 ‘홍익디자인그룹’이라는 자신의 광고회사를 창립해 여러 기업의 광고대행과 그래픽디자인, 그리고 CIP(corporate image identity program 기업이미지통합전략) 작업 등을 대행했다.

1982년 당시 투자금융회사였던 하나은행의 광고대행과 기업디자인을 맡아, 업계 최하위 매출액을 2년 만에 1위로 끌어올리는 성과를 거뒀는가 하면, 에바스 화장품 초창기에 검정색 감마밀화장품 BIP를 개발해 매출을 급신장시키기도 했다. 특히 극광T&C의 봉황심벌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그의 디자인 철학을 실현시킨 작품으로 손꼽힌다. 서구의 디자인 기법으로 제작된 심벌마크는 한국기업의 정서를 온전히 구현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한국적 개념의 디자인 개발에 매달린 그의 우직스런 고집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기업심벌은 단순히 아름답다고 능사가 아니에요. 보기 좋을 뿐 아니라, 매출에도 기여할 수 있어야 진짜 뛰어난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죠. 무엇보다 해당기업의 특징과 정신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있어야 해요. 그러려면 그 기업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부는 필수죠. 당연히 독창성이나 단순미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할 요소고요. 내가 20여 년간 기업디자인을 대행하면서 신념처럼 지켜왔던 기준들이죠.”

그가 생전에 광고쟁이 시절을 회고하며 했던 말이다. 실제로 그는 한국식 디자인을 개발해내기 위해 수많은 전문서적을 수집해 집요하게 연구에 몰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외곬 집념은 그를 기어코 세계정상급 디자이너 반열에 올려놓았다. 국제디자인계 명예의 전당인 ‘디자인 앰버서더’ 칭호를 획득한 것이다. 1993년, 수년간 세계 최고 작품을 발표한 톱디자이너 57인에 뽑혀, 그는 이듬해인 1994년 벨기에 오스탕드에서 열린 ‘제1회 세계디자인 비엔날레’에 초청되었다.

 

펜으로 그린 문경 희양산 봉암사 일주문
펜으로 그린 문경 희양산 봉암사 일주문

 

지천명의 나이, 기록펜화라는 운명적인 장르에 투신하다

하지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것이 사람의 운명인 모양이다. 그는 ‘제1회 세계디자인 비엔날레’ 참석차 출국했다가, 우연히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근대 일러스트의 아버지’라 불리는 ‘구스타프 도레(1832~1883)’의 성서 펜화전을 관람하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서 생의 일대전환을 불러올 강렬한 깨달음과 운명적으로 마주한 것이다.

“20여 년간 광고업계에서 산전수전 겪으며 느꼈던 가장 큰 공복감은 바로 저작권 문제였어요. 두뇌피질의 마지막 진액 한 방울까지 짜내 독창적인 디자인을 창작해본들,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었거든요. 나를 고용한 해당기업의 지적재산일 뿐이라는 현실적 박탈감과 허탈감에 작업을 끝내고도 늘 힘들었어요. 그러다 구스타프 도레의 그 정교한 펜화를 목격한 순간, 이제껏 꾹꾹 눌러왔던 내 자신만의 작품세계에 대한 갈증이 폭발해버린 거죠. 그래 나도 해보자, 기계조차 따라올 수 없는 저 꼭대기 나만의 경지까지 한번 치달려 보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뜨거워지고 벅차올랐어요. 한국사회에 마침 PC로 인한 변화의 물결이 둑 터지 듯 밀려들기 시작할 무렵이었죠.”

그렇게 김영택은 50이라는 뒤늦은 나이에, 어렵게 오른 디자인업계 정상자리를 박차고 ‘기록펜화’라는 당시에는 그 누구도 관심조차 두지 않던 미증유의 장르에 인생을 걸어버렸다. 주위에서는 모두 미쳤다고 수군거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주말마다 배낭을 둘러메고 전국 방방곡곡의 건축문화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서양펜화에서 영감을 얻어 기록펜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결코 서양펜화의 기법을 그대로 따라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펜화기법을 찾기 위해 날마다 오체투지하듯 도화지 위에 펜선을 그어댔다.

“쉬지 않고 그려내도 1년에 20점 그리기 어려운 게 펜화작업이에요. 서양의 펜화기법을 따라하지 않고 한국적인 펜선으로 서양과 경쟁하겠노라, 큰 소리를 치긴 했지만, 선배도 스승도 없이 독학으로 시작한 펜화작업은 수많은 시행착오로 한발 한발 마치 가시밭길을 맨발로 헤쳐 나가는 기분이었어요. 검정 잉크가 색이 바라서 희끄무레해지는가 하면, 펜촉 굵기조차 제대로 몰라 세밀화 작업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죠. 하지만 그럴수록 오기가 고개를 들었어요. 다양한 펜의 종류와 그것을 사용하는 나만의 독창적인 방식을 차근차근 터득해나갔죠. 작품 하나를 완성하려면, 온 정신을 집중해 대략 50만 번에서 80만 번의 선을 그어야 해요. 문제는 그렇게 계속 반복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순간 펜 선을 긋는 방식이 기계처럼 버릇으로 굳어지기 쉬워요. 바로 그 버릇을 경계해야하는 거죠. 펜 선에 내 버릇이 들어가는 순간 그 그림은 형식적이 되고 자연스런 생명력을 잃게 돼요. 돌멩이 하나조차 자신만의 울퉁불퉁한 특성과 질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고스란히 살려내려면 펜 선에 기계적인 내 버릇이 들어가서는 묘사가 불가능해져요. 각 문화재마다 지니고 있는 독창적인 문양이나 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진도 한 장만으로는 안돼요. 햇빛의 각도와 방향에 따라 음영이 드리워지는 부분들이 시시각각 달라지기 때문이죠. 시간을 달리해서 수십, 수백 장의 자료사진을 찍어야 할 때도 있어요.”

 

'아름다운 우리문화유산' 표지에 실린
김영택의 '아름다운 우리문화유산' 표지에 실린 펜화

 

기록펜화 장르의 전성기를 맞이하다

펜화작업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직원들에게 맡겨 놓았던 그의 디자인회사는 결국 부도가 났다. 출판사 친구와 어음을 돌려 쓴 것이 부도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사실은 이미 그의 마음이 광고일과는 담을 쌓아버린 영향이 더 컸다. 당장 쓰나미처럼 밀어닥친 생활고 문제도 결코 그의 펜화작업을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게 7년간 전국을 떠돌며 펜화그림에 미쳐 살아가던 그를 마침내 세상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2002년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 등 영축총림 구석구석을 12장의 그림으로 그려낸 내 작품을 보고 중앙일보가 연재를 의뢰해온 거예요. 나중에 여러 권의 책으로 출판되기도 한 ‘김영택의 펜화기행’은 중앙일보에 연재되는 그 순간부터 단번에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탔어요. 이듬해에는 불교계 대표신문인 법보신문으로, 2004년에는 주간조선 등으로 연재매체가 늘어나게 되면서, 쉼 없는 그림작업에 팔과 어깨가 탈이 날 지경이었지만, 무려 12년간 연재가 이어지는 동안 내 펜화그림은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거죠. 2004년에는 학고재에서 첫 전시회가 열렸는데, 그때 탤런트 고두심씨가 전시 첫날, 첫 시간에 첫 관람객으로 방문해 봉암사일주문 그림을 구매해가기도 했어요.”

 

대장암 투병, 끝내 세상을 등지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이후 20여 년 동안 수많은 연재와 출판, 국내외 전시 등을 통해 기록펜화라는 장르를 화려하게 꽃피워나가던 김영택 화백에게, 2019년 대장암 4기라는 뜻밖의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이미 복부 전이가 넓게 진행돼 수술조차 불가능한 상태에서 간신히 항암치료에 의존했지만, 그마저도 체력이 고갈돼 포기해야했다.

말년에는 미황사에 머물면서 주지인 금강스님의 도움으로 건강이 많이 호전돼 수술까지 성공적으로 마치는가 싶었지만, 서울인사아트센터에서 예정된 그의 마지막 전시를 7주일 앞둔, 2021년 1월 13일 75세를 일기로 아쉽게 세상을 떴다. 빈소는 고향인 인천의 청기와장례식장에 마련되었다.

20여 년간 약 300여점의 작품을 세상에 남기고 떠난, 한국 기록펜화의 개척자 김영택. 그는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의 1910년대 전경을 비롯해 양산 통도사, 해인사 일주문, 광화문, 밀양 영남루, 경주 황룡사 9층 목탑 등 우리 전통문화재들을, 유실되거나 손실된 부분까지 정교하면서도 품격 있는 펜화로 되살려낸, 우리 문화재 복원의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6.25때 화재로 소실된 후 잘못 복원되었던 광화문기념비전을, 문화재청에서 김화백의 작품을 참고해 바로 잡은 일화는 지금껏 전설로 회자될 정도다.

사진의 광학적 비례에 기초한 서양의 원근법과는 달리, 인간의 눈에 보이는 방식 그대로 사물의 부분 부분을 클로즈업해 그리는 김영택 화백만의 독특한 표현법은 사진과는 또 다른 생생함을 전달해주기 위한 한국식 원근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통도사 단청장 석정스님으로부터 ‘상천(常泉)’이라는 법명을 받고 ‘늘샘’을 자신의 호로 삼은 그는 평생 펜화를 통해 ‘화선삼매(畫禪三昧)’에 들기를 추구해온 수행자였다. 대상의 형태뿐 아니라, 대상이 지닌 느낌과 기운까지 화폭에 고스란히 옮기길 원했던 김영택 화백은 이제 죽었으나, 자신이 세상에 부려낸 그림들을 통해 오래도록 되살고 되살고 할 것이다.

 

법보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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