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지역사 연구 20년, 대중에 뿌리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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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지역사 연구 20년, 대중에 뿌리 내리다
  • 김윤식
  • 승인 2023.10.31 13: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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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 40년을 듣는다]
(12) 강덕우 개항장연구소 대표 - 인천 지역사, 저변을 확장하다(상)
- 김윤식 시인 대담·집필

 

인천문화재단이 오는 2024년까지 인천문화예술 40년사(1981~2021)를 편찬한다. 이에 인천in은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인천문화 40년을 이야기하고 증언해줄 인물 12인을 선정, 구술 작업을 진행하고 그 내용을 차례로 연재한다. 열두 번째 순서는 강덕우 개항장연구소 대표(전 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역사자료관 전문위원)이다. 김윤식 시인이 만났다.

 

강덕우 개항장연구소 대표 (사진= 유광식 작가)

 

대담; 2023년 10월 17일 오후 2시, 개항장연구소

 

강덕우 개항장연구소 대표는 역사학 전공자로서 인천시 시사편찬위원회 상임 전문위원으로 재직한 바 있는 첫 인사이다. 박광성 전 인천교육대학, 인하대학 교수가 일시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낸 바 있지만, 인천시의 공무원 신분으로 근 20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인천 역사 자료를 정리해낸 인물로는 최초이다.

금년 68세의 강덕우 대표는 경기도 화성시 발안 출신으로 인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7년 인하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입학하면서 였다. 이후 학부와 대학원을 마치고 인하대, 인하공업전문대 인천방송통신대 강사와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 등을 거치면서 인천의 역사 문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2000년 인천시 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이 되면서 곧바로 전 6권 『인천시사』 편찬에 참여했고, 이후 산재해 있던 인천의 역사 자료를 규합해 80여 권을 총서 시리즈로 편찬해 내면서 인천 지역사의 저변과 내용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기도 했다. 또한 2013년 인천 정명 600년을 맞아 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집 『인천정명600년사』 전 3권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전문 향토역사 해설사 양성, 전시회 개최, 인천 지역 향토사 연구 세미나 개최 등을 통해 서민 대중에게 시사 지식 보급을 통해 향토애 고취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해온 학자다.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40년사 발간에 즈음하여 인천 역사 문화계에 종사해온 강덕우 개항장연구소 대표 자신의 인천시사 진흥, 보급 20년 역사에 관해 들어보는 일도 의미깊다고 판단하여 그를 찾았다.

 

인터뷰 하고 있는 김윤식 시인(좌)

 

김윤식 : 이따금 만나기도 하는데 이렇게 구술을 한다고 마주 앉으니까 좀 느낌이 그렇네요. 잘 지내셨지요?

강덕우 : 네. 지내기는 잘 지내는데…, 글쎄 좀 느낌이 그렇기도 합니다.

김윤식 : 아무튼 공식적으로 구술해야 하니 하나하나 묻고 대답을 듣기로 합시다. 먼저 근황부터 물어야지요? 역사자료관을 퇴직한 것이 지난 2021년인가요?

강덕우 : 아, 많은 분들이 퇴직한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저 역시도 퇴직한 것이 2~3년 정도밖에 안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제가 퇴직한 것이 2018년이니까 벌써 5년이 지났네요. 시간이 참 빨리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퇴직 후에도 제가 대표로 있는 <인천개항장연구소>에 나와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기존의 연구자들과 이것저것 용역과 관련한 일도 하고, 신문사에 원고도 보내고 하다 보니 아직도 옛 근무처인 역사자료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인천개항장연구소가 있는 곳이 옛 근무지와 가까이 있다 보니 그런 오해 아닌 오해가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분들이 2~3년 전쯤 퇴직한 것으로 알고 있기는 합니다만 퇴직은 2018년 5월에 했습니다.

김윤식 : 참, 먼저 궁금해서 질문을 드리는데, 개항장연구소에서는 요즘 인천광역시시사편찬원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아는데, 그 경과는 어찌 되었는지요? 요 근래에 세미나도 개최되었었지요?

강덕우 : 먼저 개항장연구소가 무엇을 하는 연구소인지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개항장연구소는 그 출발이 인천의 향토사가 선후배님들과 대학의 교수, 강사, 교사, 대학원생 그리고 인천시와 각 군구에 있는 임기제 공무원들이 모여서 만든 연구소입니다.

많은 연구소들이 그러하듯이 초기 단계에는 친목 형태였다가 2008년 뜻을 모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학술 연구단체로 발족한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햇수로 보면 15년의 연륜을 가진 연구소입니다. 인천의 역사와 문화에 가장 많은 애정과 관심을 가진 집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천광역시 시사편찬원은 아직 확정된 명칭은 아니지만, 서울시의 역사편찬원과 같은 조직으로 만들고자 우리 식으로 벤치마킹한 겁니다. 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가 존재하니 그 이름자를 빌려 시사편찬원이라 작명한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천의 민선 6기, 7기 정부 때에 이미 시장 공약 사항으로 채택되기는 했지만 크게 진전된 바는 없었습니다. 이번 민선 8기 때에도 또다시 시장 공약 사항으로 채택되어 현재 민선 8기 처음 학술토론회를 개최한 바 있습니다.

사실 시사편찬원 설립 관련해서 학술대회는 이번만이 아니라 벌써 여러 차례 토론회를 가진 바가 있었습니다만, 모두가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설립하기까지는 회의적이었습니다. 조직과 인원 등 여러 가지 구구한 사유들이 있어 진도가 나갈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솔직히 시정을 이끌어가는 시장님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이구동성 말하고 있습니다. 서울시의 경우 서울시사편찬위원회가 서울 역사편찬원으로 변신할 때 가장 큰 공?을 세운 분이 서울시장이었다는 것은 모두에게 알려진 사실입니다.

현재 인천시사편찬원은 민선 8기 공약 사항으로 진행 중이니까, 지역사회의 많은 분들이 설립 문제를 지켜보는 입장에 있다 하겠습니다. 특히 개항장연구소 회원들의 대다수가 역사와 문학, 문화를 전공하는 선생님들이다 보니 자연적으로 관심을 더 갖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대표인 저로서도 인천의 역사와 문화 내지는 나아가 인문계가 이 이상 방치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제 민선 8기에서 인천시사편찬원 설립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하니, 우리 개항장연구소가 비록 공조직 밖의 민간 연구소이기는 하나 인천시사편찬원 설립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김윤식 : 그렇군요. 천천히라도 명실상부 근현대 한국사의 중심지였던 인천에 역사편찬원 같은 것이 설립되어 지역사가 온전히 정리되어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강덕우 개항장연구소 대표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 40년을 듣는다.“ 구술 채록을 진행하겠습니다.

강덕우 박사께서는 1977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으셨지요? 인천 첫 인상이 어땠습니까?

강덕우 : 네. 77학번입니다. 그 전 해인 1976년도에는 재수생이었던 관계로 제물포고등학교에서 예비고사를 치렀던 기억이 납니다. 왜 인천에서 시험을 보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시에도 이 학교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게 벌써 47년 전의 일이네요. 그렇게 오래된 얘기네요. 당시 집이 서울이었던 관계로 동인천 어느 여관에서 1박 하고 시험장으로 갔었는데 특별한 기억은 없네요.

1977년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인문사회계열에 합격하고 2달여 학교를 다니고 군대에 갔습니다. 첫 인상은 교통이 상당히 불편했다는 것과 바닷바람이 상당히 차갑다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인하대학교까지 가려면 기차로 제물포역에서 내려 학교까지 걸어서 가든가 아니면 동인천역에서 내려 당시 3번 버스를 타고 가든가 하던 시절이었어요. 주안역에서 학교로 가는 버스 노선이 생기기 전입니다.

1979년에 복학하니까 주안에서 인하대까지 버스가 다니더군요. 서울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인하대학교까지 조금 빠른 길인 주안역에서 거의 하차하다 보니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였어요. 얼마 지나니까 인하대까지 직통으로 가는 버스 노선까지 만들더라구요.

그러고 보니 인천에 대한 첫 인상은 바닷가 공업지대 앞에 덩그러니 세워진 대학에 그저 시간에 늦지 않게 다니려던 수많은 서울 통학생 중의 한 명일 뿐 요즘 느끼는 인천에 대한 그런 감정들은 아마 그 후 한참 뒤에 생겨났던 거 같습니다.

김윤식 :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대학이 있는 곳이 사실 그때만 해도 인천의 변두리였으니까요, 혹 시청이 있던 중구 구도심에 자주 다녀 보셨나요? 특히 구도심에 있는 근대문화유산 같은 것들도 돌아보곤 했습니까?

강덕우 : 학교에 왔다가 다시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동인천역에서 기차를 타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했습니다. 아마도 앉아갈 수 있을 거라는 이점과 당시 유흥가(?)가 동인천에 밀집되어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 모임이 주로 동인천이었지요. 지금도 생각나는 곳이 동인천역 근방의 로젠켈러라는 맥주집과 화백이라는 경양식집, 신포동의 삼치집, 할머니네 막걸리집 등등 젊은이들의 모임 장소뿐이네요.

그러다 보니 중구 구도심 지역은 오가는 길목이었는데…. 네. 단지 오가는 길목뿐이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솔직히 대학 4년을 다니는 동안 특정적으로 근대문화유산을 돌아본다는 개념은 없었던 거 같아요. 명색이 역사교육과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요즈음 말하는 근대문화유산들을 그냥 스쳐 가는 분위기였지 집중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 인천에 사는 친구들이 자유공원에 가면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나긴 하는데 전문적인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고. 자유공원에 와서 맥아더 동상을 본 정도였던 거 같아요. 그때는 대학의 교수님들도 크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듯하고….

1980년대 초반 인천 향토 역사학계 분위기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사학과에서 공부하는 내용도 중앙 위주의 한국사였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인천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학, 인천학이라는 개념도 정립이 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해요.

제가 2000년에 인천시 시사편찬위원회 계약직 전임 전문공무원으로 재직하기 시작할 때만 해도 이제 막, 지역사, 지방사, 지역학 이런 것들이 막 정립되어 가려는 출발점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계셨던 김양수 선생님이 들려주는 인천의 옛 얘기들이 그저 신기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김윤식 : 사학과를 지망해 다니셨는데 학자로 나가고 싶으셨던가요? 그래서 내처 대학원에 진학하신 거고요?

강덕우 : 처음 인하대학교를 지원했을 때는 사범대학 인문사회계열이었어요. 그러다 2학년 올라가면서 학과 배치를 했는데 역사교육과를 택하게 된 겁니다. 그러다가 학제 개편에 의해 문과대학 사학과가 생겼는데, 그럼에도 졸업은 역사교육과 1회로 했어요. 그대로 별일 없이 졸업했다면 교사가 되는 ‘순위 고사’를 본 후 중고등학교 교사에 임용되었겠지요. 이후 사범대학 역사교육과는 졸업 2회로 막을 내렸고 문과대학 사학과로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습니다.

역사에 관한 관심은 모두에게 있었다고 보는데, 솔직히 처음부터 역사를 전공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졸업 후 역사 교사로서의 역할을 생각했는데, 대학 4학년 졸업 시즌에 차후 진로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취업보다는 대학원으로 진로를 바꾸게 된 거지요. 대학 시절 성적도 좋기도 했지만, 역사교육과(사학과) 2학년, 3학년 시절 연이어 학생대표를 맡았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사학과 교수님들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대학은 그때까지도 최루탄 연기가 그치질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취업도 어려운 시기였기도 했는데 대학원 진학 권유도 받았습니다. 사실 권유라고 했지만 내 자의적 해석이구요. 솔직히 취업이 안 되다 보니 자연적으로 시간을 번다는 의미에서 대학원 석사과정을 선택했다고 하겠습니다.

석사 마칠 때쯤 곧바로 인하공업전문대학에 교양과 강사로 한국사와 세계사를 맡게 되었어요.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의 차이를 실감하면서 그때 뭔가 좀 더 확실하게 역사 연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수님들과 대학원 선후배들과 역사 담론을 나누면서, 때로는 시국에 대한 비판도 하다가 결국 역사라는 학문의 길을 걷게 된 거라고 봐야지요.

 

김윤식 시인
김윤식 시인

 

김윤식 : 아무튼 그런 경로로 해서 역사학 전공자가 되셨는데, 학생 시절 어느 교수님 지도를 받으셨나요?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는 또 어느 분이셨는지요?

강덕우 : 저의 첫 지도교수님은 박광성 교수님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저희 사학과 대학원이 신설된 과였기 때문에 저희 사학과 교수님들 전체가 공동 지도교수님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만큼 사학과의 분위기는 최고였어요. 당시는 타과도 마찬가지로 대학원으로 신설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래서 대학원 환경은 서로 비슷했다 하겠는데 우리 사학과만큼은 유독 스승과 제자 사이가 타과에서 부러워할 만큼 화기애애했습니다.

대학원 강의가 끝나면 때때로 전체 교수님들과 대학원생이 함께하는 저녁 식사 자리가 많았어요. 또 학과의 행사에 대학원생들이 함께하는 시간도 많았습니다. 당시 대학원생이라고 해야 저를 포함해서 3명이었는데 차츰 후배들이 늘었지요. 저녁 식사 자리는 물론 술자리가 되는 때가 대부분이기는 했지만. 그 시간은 단순한 식사 자리가 아니라 수업시간의 연장이었고 교수님들의 지난 얘기와 경험, 시국에 관한 얘기, 학계의 동향 등 저희 대학원생들에게는 금과옥조와 같은 얘기들을 듣고 나누는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당시 사학과에는 서양사에 임명방, 한국사에 박광성, 윤병석, 한영국 교수님 등이 계셨는데 학계의 권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분이 소탈하셨습니다. 박광성 교수님은 인천교육대학에서 재직하시다가 인하대학교로 오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있어서는 최고의 권위자이셨지요.

1983년 인천시에서 발간하는 『인천개항100년사』를 총괄하시기도 했는데 이 책은 이후 인천역사의 『조선왕조실록』이 되었습니다. 대학원 석사에 입학해서는 대학원생 조교로 교수님 연구실 한켠에 책상을 놓고 교수님 보조원 역할을 했습니다. 제가 써야 하는 석사논문에 대한 가르침은 물론이구요. 교수님은 당시에도 인천시사편찬편찬 위원이셨는데 정년을 하시고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을 하셨어요. 아마도 제가 후일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임 전문계약직으로 가게 되었던 인연이자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임명방 교수님은 이탈리아 그레고리안대학에서 학위를 받으시고 인하대학교 학생처장과 문과대학장 등을 엮임하셨는데 학생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그야말로 짱이었습니다. 약주도 즐겨 하시기도 했지만, 학생들뿐만 아니라 학생회 임원들과도 부단히 소통하셔서 학생들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기억되네요. 학내에서 교수님에 대한 평가는 사실 선배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인데 아무튼 임 교수님은 당시 학생들에게는 우상이었습니다.

윤병석 교수님과 한영국 교수님은 모두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출신으로 선후배였습니다. 윤병석 교수님은 한국 독립운동사의 기반을 닦으신 분으로 한국근대사 분야에서는 독보적 존재이셨지요. 찾아오는 교수님들도 많았고 신문사나 관계 공무원들이 항시 교수님 연구실을 드나들어 저희 대학원생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었지요.

한영국 교수님은 서울대 문리과대학 사학과에서 학과 조교를 잠시 맡다가 교수에 임용되셨는데 그야말로 서울대 문리대의 ‘마당발’이셨습니다. 모든 동료 교수들로부터도 추앙을 받을 만큼 인격도 훌륭하셨고 제자 사랑도 남달랐습니다. 보이지 않는 선행은 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이 중 박광성 교수님의 연세가 제일 높으셔서 언제나 박 교수님 연구실에 모여 학과 회의를 하셨고 학생 및 대학원생들의 진로에 대해 항상 걱정하시고 배려하시는 모습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지금 와 생각하니 그때가 제일 행복한 시절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모두 작고하셨습니다.

김윤식 : 대학원 시절 혹시 인천교육대학에서 나오던 ’기전문화‘ 이런 연구지도 보신 적이 있으셨는가요? 저도 1980년대 초, 박광성 교수님과 김양수 선생 등이 이끄시던 인천향토사연구회에 잠시 몸을 담았다가 몇몇 거기 논문도 읽은 적이 있고 해서…. 20년 동안 인천의 역사 문화 자료를 체계화하신 분이라 문득 그런 생각이 나는군요.

강덕우 : 익히 알고 있었지요. 저희 지도교수이셨던 박광성 교수님이 인천교육대학에 재직하던 때 주도해서 발간한 논문집입니다. 인천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최초의 논문집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 박 교수님이 총괄을 맡아 수고하셨었습니다.

『기전문화연구』는 1972년 제1호를 발간하는데 창간호 원고부터 매년 교수님의 원고가 실렸고 다른 교수님들의 게재 원고도 대부분 인천 관련 주제이다 보니 인천 관련 최초의 논문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마도 『기전문화연구』가 발간되고 인천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인천시사가 탄생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1983년의 『인천개항100년사』와 1993년의 『인천시사』는 이러한 바탕위에 탄생한 것이라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책자의 외형은 오늘날과 비교하면 초라할 정도이긴 했지만 당시로서는 그나마도 최고 수준의 전문적이고 선구적인 논문집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당시 향토사학자로 이름을 날리셨던 김양수 선생님도 큰 몫을 하셨습니다. 또한 인천향토사연구회를 만드시고 거기에 많은 교수님들과 후진들을 참여하게 하여 학술뿐만 아니라 인천문화유산에 관심을 갖게 만드셨습니다. 지금 와 생각해도 대단한 열정이었습니다.

박 교수님과 함께 인천시 문화재위원이시기도 했는데 현장 답사에는 항상 김 선생님의 기조 설명이 꼭 있어야만 했습니다. 아마도 그런 것들로 해서 김양수 선생님을 2000년 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모신 거라 생각합니다.

김윤식 :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오신 것은 아니지요?

강덕우 : 대학원 석사를 마친 것이 1986년입니다. 2000년도에 인천광역시에서 『인천광역시사』 편찬을 위해 <전임 전문계약직> 모집공고를 냈는데, 주변 지인의 권유로 원서를 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2002년 인천광역시사 편찬까지 3년간 계약직 공무원이 되었지요. 그러니까 대학원 졸업 후 14~5년간은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인하대학교, 인하공업전문대학, 방송통신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고, 인하대한국학연구소 등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김윤식 : 그러면 한 직장이랄 수 있는 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직을 20년간이 지내신 것이 되네요? 감회가 어떠신지?

강덕우 : 첫 출근일이 2000년 6월 7일로 제 인생에 전환점을 이룬 날이라 기억이 생생합니다. 2018년 5월 18일 자로 그만두었으니까 18년 정도입니다. 43세에 공직을 시작해 61세에 마쳤으니 천수를 다한 거지요. 그런데 매사 그렇듯이 초보자에서 숙련공이 되었는데 손을 놓으라는 것 같은 아쉬움도 솔직히 있었습니다.

역사와 인문학 분야는 경험과 연륜이 중요하다고 매번 외치다가 막상 때가 되니, 이제 때가 되었으니까 그만두라고 했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해야 끝날 때까지 충성심을 유발시킬 수 있다나요. 말해 놓고도 웃음이 나네요. 암튼 그래서 퇴직 후에 그간 해온 일을 어떻게 계승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공직자로서 지난 18여 년간의 시사편찬 임기제 공무원 생활과 퇴직 후 5년간의 연구소 대표로서의 활동을 돌이켜 보면, 이 모두가 체계화된 인천 역사 정립을 위한 발걸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자료관에서는 한편으로는 자체 활성화를 위한 일이기도 했습니다만, 매년 6회의 향토사 강좌와 2회의 학술대회 개최, 그 과정에서 100여 권에 달하는 인천역사자료집과 인천 시사를 편찬하는 성과를 이루어 냈습니다. 퇴직 후에는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연구소를 통해 인천 역사와 관련된 학술보고서도 발간하고 있고 아직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인천 관련 자료의 수집과 조사‧발굴‧연구의 성과였고, 그 과정에서 대학의 관련 학과와 인천 향토사가, 인천 연구단체는 물론, 국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등 대외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유대관계 속에 이루어 낸 결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간 공직에서 쌓아온 다양한 행정 경험, 지금까지 수행해 온 인천 역사 연구, 인천 지역사회에서 형성된 인간관계 등은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 생각합니다

김윤식 : 인천역사 자료, 또 문화 자료를 정리해 20년 동안 매년 몇 권씩 총서라 이름 붙여 책자로 발간하셨는데, 그것이 총 몇 권이나 되나요?

 

인천시 역사자료관이 발간한 지역사 출판물

 

강덕우 : 2002년 인천광역시사 6권을 편찬한 뒤, 인천 역사와 문화와 관련된 자료를 체계적으로 발간하고자 했던 것이 <인천시사>와 <인천역사문화총서> 시리즈입니다. 제가 근무를 그만하기 전까지 <인천시사>로 『인천정명600년사』 3권과 『인천체육사』 『인천의 문화사적과 역사터』 등 다양한 주제로 편찬이 있었고 <인천역사문화총서>로는 80여 책의 발간을 마쳐 100호를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만….

<인천역사문화총서>는 먼저 발간 유형에 따라 <번역과 역주 작업서>와 <기획 및 연구 학술서> 2가지 종류로 대별하여 볼 수 있겠습니다. 모두가 인천을 주제로 한 한문, 일문, 영문 자료를 전문가가 참여하여 역주 번역하는 작업이었습니다.

한문 자료를 역주 번역한 것이 제일 많았는데, 조선 시대 인천지방 지지자료로서 인천·부평·교동 등의 『읍지(邑誌)』 『역주 덕적도 고문서 자료집』(63호), 『역주 학궁의례』 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 일본어로 간행된 인천 안내서로는 『역주 인천개항25년사』, 『역주 인천축항사진도록』, 『역주 인천 토지조사부』, 『역주 인천부세일반』 등이 있습니다.

영문 역주 번역서로는 『The Korean Repository』 등 영문 잡지 속 인천 자료들을 발췌하여 주석을 달고 정리한 『외국인의 기록으로 보는 인천』 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인천 관련하여 좀 더 세밀히 알고 싶거나 논문을 쓰실 분들은 꼭 필독해야 하는 인천자료집이라 생각합니다. 올해 2023년에는 인천역사문화총서 99호가 발간된다고 하니 후임들의 공로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김윤식 : 다시 이야기를 돌려, 어떻게 인천광역시시편찬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오시게 된 것인가요? 그 계기가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

강덕우 : 조금 전에 못다 한 얘기를 보충하자면 사실 인천시에서 계약직을 공모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학 등에서 강의하다가 연구 경력을 좀 더 쌓은 후 대학의 전임으로 진출하는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대학 전임으로 진출하는 것이 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대학에서의 필요와 소위 ‘빈자리’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맞아야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요원해 보였기도 하였지만, 인천시사 편찬이라는 말이, 그간 공부한 전문성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도교수님이셨던 박광성 교수님의 유업도 계승한다는 제 나름대로의 생각도 있었고요.

물론 여기에는 그 당시 인천시청에 근무하던 후배 지인의 적극적인 권유와 요청도 있었습니다. 다른 직종이 아니고 시사를 편찬한다고 하니 주변에서도 모두 반겼던 것 같습니다. 특히 작고하신 한영국 교수님께서도 인천역사에 활력소를 불어 넣으라는 말씀까지 해 주셔서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김윤식 : 애초에는 인천시청에 근무했다고 들었는데 맞지요? 그때 사무실이 어디 있었나요?

강덕우 : 2000년 6월 7일이 첫 출근일인데 인천시청 4층, 예전 박광성 교수님이 상임위원으로 쓰시던 공간이 저희 사무실이었어요. 여기에 저, 같이 근무하게 된 강옥엽 박사 그리고 상임위원이신 김양수 선생님이 함께 근무했어요. 당시 저희 소속이 문화예술과였는데 당시 과장님은 김양수 선생님의 인천 역사 얘기와 문화재 관련 업무를 위해 하루에 2~3번씩 수시로 방문했고 저희 전문위원 2명은 시사편찬 자료 준비에 정신이 없었을 정도였어요. 인천광역시사 집필위원님들의 자료 요구는 많고 우리 시에는 자료가 거의 없던 상태라 애를 엄청 먹었습니다. 그러기를 1년 정도 한 것 같습니다.

김윤식 : 아, 그 뒤에 자유공원 옛 시장관사로 옮겨온 것이군요. 그때가 몇 년도인가요? 직원은 누구누구였지요?

강덕우 : <‘시장 관사’를 시민의 품으로>라는 시장의 선거 공약에 따라 중구 송학동 자유공원 근처 시장공관은 2001년 역사자료관으로 탈바꿈했고 덕분에 저희는 시청 4층 구석진 곳에서 2001년 8월에 최기선 시장님이 마지막 쓰시던 중구 송학동 소재 시장 관사로 옮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개관은 10월 8일 관사 내 잔디밭에서 <역사자료관>이라는 이름으로 조촐한 개관식을 가졌습니다. 직원은 우리 3명과 경비직원 3명이었는데 경비는 3교대였으니 상주 인원은 4명이었어요. 시장 관사가 있던 이곳은 외형은 고택 분위기로 주변 경관과 딱 어울렸는데 내부는 거의 모두가 수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낡은 상태였어요.

시장님이 거주하실 때는 그때그때 시청 유지보수팀에서 관리를 했다 하는데 이게 문화예술과 소속의 역사자료관이다 보니 자체적으로 관리할 수밖에 없었어요. 자체적이라 해봐야 젊은(?) 저가 그간의 집수리 경험을 바탕으로 이리저리 땜방식으로 운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예산도 별도로 세워지지 않았던 데서 기인한 거지만요. 초기에는. 출근해서 첫 시작이 내부 청소였습니다. 화장실도 마찬가지. 손님이라도 오실 때면 같이 근무하는 강옥엽 박사가 손님 접대를 해야 했고….

시청에서 그런 사정을 알게 되니까, 실상은 김양수 선생님이 시청에 가서 나름 심각한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 “이리로 오게 해놓고 청소나 시키는 거냐고”. 그런 사정을 시청에서 알고 난 후 집안을 관리해 주시는 공무직 아주머니가 오셨어요. 알고 보니 시장 관사 시절, 관사를 경비하시던 경비의 부인이신데 그때는 경비실 한편을 살림집으로 해서 살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분 덕분에 여러 가지가 편해졌지요. 시장 관사에서 10여 년을 살다 보니 집안 곳곳을 훤히 다 아시는 거예요. 시장 관사 관련 옛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었지요.

아무튼 시청에서 떨어져 있는 계약직 직원이다 보니 관사 운영에서부터 여러 가지가 애로 사항이 많았어요. 인터넷으로 결재가 되던 시절이었는데 아직 기술이 덜 발달된 시기라서 결재 한번 올리는데 30분은 걸렸던 기억도 나고…, 보일러 관이 터져서 한 이틀을 춥게 지낸 적도 있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잔디 제초와 전지작업을 해야 하는데 용역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일이 인부를 사서 했던 기억들도 있습니다. 지금은 모두 추억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역사자료관을 방문하는 인사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간 개방되지 않았던 시장 관사가 역사자료관으로 바뀌니까 일부러 구경 오시는 분도 많았고, 인천의 역사와 문화에 종사하시는 향토사가 선생님들부터 전국의 문화예술 단체들이 이 인천의 선진 사례를 보러 방문하는 일이 폭증했다고 할까요. 실제로 자료 수집 관계나 인천시와 관련한 우리 본연의 업무는 컴컴해진 저녁 시간 이후에나 하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요.

김윤식 : 참 고생 많으셨군요. 그럼 김양수 선생이 물러나신 때가 언제죠? 그 후 두 분만 계셔서 좀 적적하지 않았나요?

강덕우 : 저희가 처음 인천시사를 편찬하기 위해 계약을 맺은 것이 2002년 12월까지였어요. 사실 인천시에 오기 전까지 강의나 하던 강사였고, 여기에 근무하면서 강사직을 모두 내려놓은 상태였지요. 이제 편찬사업이 끝났으니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했는데 이미 다른 강사로 메워져 있는 상태였기도 했지만, 이제 더 이상은 인천의 역사와 문화를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여기에 인천시 문화예술과에 근무하시던 공무원들도 공감하시고 적극 동참하게 돼서, 시사편찬 전문인력을 증원해 줄 것을 중앙정부에 요청하였습니다. 인력 증원은 인천시 자체적으로는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2002년 12월 말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때쯤으로 기억하는 것이, 거의 퇴직할 짐을 싸둔 상태였거든요. 그런데 6명을 상신한 인력 중에서 2명을 증원한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그해 크리스마스는 좀 더 의미가 있었습니다. 물론 새로 계약직으로 재임명될 때까지 100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무보수 3개월여의 기간이었지만, 나름 또 다른 사명감이 생겨났습니다.

결국 김양수 선생님이 은퇴하시고 사무실은 저희 2명과 공무직 아주머니가 지키고 있었어요. 주위에서 경치가 좋은 곳에서 연구할 맛 나겠다는 시샘 섞인 소리도 많았는데 실상 저희 업무는 과도하게 많았어요. 근무지가 경치만 좋을 뿐 그밖에 여건은 별로였습니다. 어느 해에는 선풍기를 구매해야 한다는 결재가 보름이 돼서야 나는 일도 있었지요. 물론 경치야 좋았지만 오래된 집을 관리하는 관리자 역할까지 해야 했으니 남모르는 불편한 점도 많았지요.

자료집 발간에 대한 욕심도 많았습니다. 사명감이기도 했어요. 어느 해는 자료집을 9책까지 발간하는 강행군도 해 보았습니다. 휴가도 제대로 간 적이 없었어요. 1인이 하루 업무를 감당하기 어려우니까 가급적 서로 상대방에게 폐 끼치지 말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후 5년마다 재임용 절차를 밟는 계약직으로 3번씩이나 공개 시험을 통해 재계약이 되었지만, 후일 계약직이라는 명칭은 임기제로 바뀌고, 지역의 향토사가 선배님들과 주변 동료들이 힘을 보태주어서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를 지어 퇴직했다고 생각합니다.

 

김윤식 : 문득 기억이 나는데 그게 2001년인가요 제가 전라도 김제에 가 있을 때 고창 선운사 답사를 왔던 적이 있잖아요? 저녁에 비가 오던 날. 그때 김양수 선생, 새얼문화재단 지용택 회장, 이원규 소설가, 하석용 청량산살리기위원회 공동대표 등등이 갔었지요. 저도 합세해서 그날 그것이 처음 상면한 날로 기억되는데요.

강덕우 : 맞아요. 우리 선생님은 그때 지역 출신 대선배의 자서전을 쓰시느라 지역에 내려갔다가 그날 합류하시는 것으로 들었어요. 사실 그때까지 근 20년 동안 인천에서 생활하고 있었지만 주로 인하대학교 학내 인사와 강사 시절 만나는 동료 정도였기 때문에 지역 역사 문화계 인사들에 대해서는 일면식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인천시청에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서생이었고 인천시의 역사라는 게 사실상 지역 인사들의 도움 없이는 일구어낼 수 없는 작업이었기에 아마도 지용택 회장님께서 새얼문화재단 답사에 저희를 부른 것도 교류라는 측면에서의 배려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게 지금부터 20년도 넘는 시절이었네요. 그날 이후부터 지역의 선배님들이 도움으로 인천이라는 지역에 대한 ‘살아있는 이야기’들을 듣고 접했기 때문에 오늘의 저희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뵌 선배님들의 모습이 아직도 여전한 걸 보면 매사 열정적이었기 때문이라 생각이 드네요. 그게 젊어지는 비결이라 합니다.

김윤식 : 그때부터 차츰 인천의 문화계 인물들도 만나게 되었을 텐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 인천 문화계 인적 자원이 어떻던가요?

강덕우 : 그 시절의 문화예술과는 각종 시민단체 등의 문화 활동 지원, 예산 분배, 인천시 축제, 시립박물관 운영 등에 이르기까지 그 역할이 광범위했고 대외 활동이 많았던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시사를 편찬하는 업무 이외에도 문화 활동 전반과 시정의 다양한 부분을 시사 업무의 연장선에서 살펴봐야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인천 연구를 보다 심화하고 폭넓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해준 요인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또한 <인천시사>의 자료 수집과 연구는 매년 <인천역사문화총서> 발간으로 구현되었는데, 매년 지역에서 활동하는 역사, 문화예술계 전문가 및 연구자 30~50명과 함께했습니다. 또한 역사자료관 활성화와 대중화를 위해 <학술대회>와 <인천역사사진전>, <인천 향토사강좌>를 개최했는데 인천 시민의 자긍심 함양과 향토애를 북돋고자 한 것이었습다. 임기를 마칠 때까지 ‘시사와 역사문화총서’가 합하여 무려 100여 권, ‘학술대회와 인천역사사진전시회’ 15회, ‘인천향토사강좌’ 90회 개최 등의 실적 아닌 실적을 쌓았습니다.

따라서 인천의 문화예술계 인사들과도 부단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지요. 여기에 저희의 모토는 인천의 역사와 문화는 ‘인천인의 손으로’였기 때문에 거의 모든 주제나 참여하게 된 집필자, 토론자, 강연자 등은 모두 인천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인천광역시 10개 군․구의 정체성 확립의 일환인 역사편찬사업이 활발해지면서 『남동구 20년사』(2010), 2010년 『중구사』 및 『옹진군지』(2010), 『계양의 역사와 도시변화』(2011), 『서구사』 및 『연수구사』(2014), 『동구사』(2019), 『미추홀구사』(2022) 편찬에 이르기까지 시사와 구사 편찬의 조화와 대중화라는 입장에서 자문과 집필, 편찬위원으로서 두루 참여하였는데 이를 통해서도 지역의 인사들과 많은 교류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사)인천여성단체협의회에서 주관하는 ‘인천여성인물발굴사업’에도 참여하여 시사와의 연계 속에 『역사 속의 인천 여성』을 발간한 바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문화예술 분야의 인사들과 폭넓은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고 다양한 담론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통해 자연스레 터득하게 된 것은 인천시의 역사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만을 고증, 연구,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계 전반과도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도 몸소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시사편찬 업무를 통한 지역사회와의 소통과 협치가 중요한 경험이 되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인천 지역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인적 자원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 생각합니다. 더욱이 문화예술이라는 장르가 굳이 지역을 한정할 수 없는 한계도 있겠지만, 인천 출신으로 문화예술에 종사하는 분들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인천 지역이 갖는 문화 인프라 부족 현상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외지에서 인천으로 오시는 인사들에게 오히려 주도권을 내주는 형세가 안타까울 뿐이지요. 그렇다고 그런 것이 꼭 잘못된 현상이라는 것만은 아닙니다.

김윤식 : 그동안 근무하시는 동안 인천의 순수 문화 예술계 인사들도 역사자료관을 찾아오던가요?

강덕우 : 네, 대표적인 분이 소설가 이원규 선생님을 비롯해 양진채 선생, 그밖에 시인, 화가, 연극인 등 무수한 분들이 내방하셨지요. 원로 탤런트 최불암 선생, 여성 시인 유안진 선생 등도 얼핏 기억납니다.

김윤식 : 그밖에 다른 분야 인물들은….

강덕우 : 언론계, 특히 기자분들이 자주 찾았어요.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하던데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냐, 이 인물의 행적이 맞느냐 등등 주로 취재 때문이었지요.

가끔 시민들도 사무실을 방문하거나 전화를 하는데 잘못 아시는 것을 우기는 분, 크게 중요하지 않은 시시콜콜한 사실을 크게 해서 주장하시는 분…. 힘든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김윤식 ; 이제 그 역사자료관이 물리적으로 건물은 남아 있지만, 다른 모든 것은 사라졌네요.

강덕우 : 저희가 근무하던 역사자료관은 저와 동료였던 강옥엽 박사가 퇴직한 이후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지금의 ‘인천愛집’이라는 전시공간으로 탈바꿈하였어요. 리모델링의 필요성은 누차 제기되어 왔던 사안이었는데 퇴직 이후에 실행되었다는 것이 아쉬웠고, 또 역사 문화의 사랑방으로 자부하던 곳이 전시공간 위주로 하는 곳으로 변하다 보니 역사를 잊는 인천시가 아닌가라는 서운함도 있었어요.

아직도 저는 20년 넘게 인천의 역사와 문화를 담당하던 곳이 사라졌다는 게 사실 인천의 품격과도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그런데 그런 결정은 자유공원 아래에 위치해 있던 역사자료관의 풍광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이라 자위해 봅니다. 지근거리에서 아침 안개와 석양, 노을 감상할 수 있는 그런 곳이기에 더 많은 시민들을 유치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거 같아요.

김윤식 : 그동안 역사자료관에 계시면서 인천의 문화계 인사들 구술 채록 사업도 많이 펼쳤던 것으로 아는데, 이제 세월이 가서 거꾸로 구술을 하게 되셨네요. 대체로 역사자료관에서 강 박사께서 채록한 분들은 어떤 분이들이셨나요? 대략 성함만이라도….

강덕우 : 여러분이지요. 심재갑 선생님, 체육인으로 사이클 이홍복, 야구인 고철호 선생님들…, 지용택 회장님께서는 사정이 있으셔서 중지하셨지만….

김윤식 : 그것만도 인천 역사 문화의 큰 자료, 자산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20년 근무를 마치고 나오시면서 아쉬웠던 부분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나요?

강덕우 :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이제 손에 익으니까 호미와 삽을 내려놓으라는 그런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인천을 공부하면서 일을 해오다가 많은 부분 인천의 참 면목, 문화, 역사의 얼굴을 이제 좀 알아보면서 한 발짝 나아가 일을 해보고 싶은 순간에 손을 놓게 되었으니까요. 그것이 제일 아쉬운 부분 같아요.

김윤식 : 그 반대로 가장 보람이 있었던 것은 어떤 일을 꼽을 수 있나요?

강덕우 : 누구나 다 자기기 지낸 시절, 장소는 다 역경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저 역시 어려운 중에서도 우리 인천 향토사 부분이나마 책으로 정리해낸 사실, 또 많은 선배, 동료, 후배, 제현들과 함께 대화하고 토론을 통해 미력한 대로 인천의 문화, 역사의 지평을 넓히는 일에 동참했다는 것이 최대의 보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술인터뷰가 진행된 인천시 중구 신포동 개항장연구소

 

김윤식 : 참, 두 분이 근무했던 사무실이 시장 관사로 쓰였었는데, 일제강점기 부터의 내력 좀 간략히 말씀해 주세요. 마지막 주인이 고 최기선 시장이었지요?

강덕우 : 역사자료관은 아름다운 정원을 끼고 있어 개항 후(1900년 경) 일본인 사업가(河野竹之助)의 저택이었다가 광복 후에 동양장(東洋莊)이라는 서구식 레스토랑으로 또 송학장(松鶴莊)이라는 사교클럽으로 사용된 일이 있었으나, 1965년 인천시에서 매입하여 한옥 건물로 개축, 1966년 시장공관으로 변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개축공사의 계획은 12대 윤갑로(尹甲老) 시장 때였지만(1965.2~1966.7) 부임한 것은 13대 신충선(申忠善) 시장이었습니다.(1966.7~1966.9) 그러나 신충선 시장은 두 달여 만에 순직함으로써 본격적인 공관시대(公館時代)는 14대 김해두(金解斗) 시장부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1966.9~1969. 5)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수려한 경관과 정원으로 이름이 나 있는 이 공관을 거쳐 간 역대 시장은 최기선(崔箕善) 시장까지 모두 17명입니다. 100년이 넘는 역사의 자취를 가진 이곳은 1965년부터 2001년까지 인천시장의 공관으로 사용되다가, 2001년 10월 8일 역사자료관으로 개관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역사자료관은 인천의 역사를 집적하는 곳으로 시사(市史) 자료의 발굴과 수집을 통해 이를 정리, 발간하는 시사편찬위원회 기능까지 겸하고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바 있는 업적이 그간에 여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김윤식 : 듣자 하니 일제가 패망해 가면서 정원에 있던 연못이던가요, 아니면 집터 어디 다른 곳이었던가요? 금덩이를 묻어두고 갔다는 이야기도 있었지요?

강덕우 : 뭐. 그런 이야기가 있어 언젠가 사람들이 와서 지뢰탐지기 같은 것으로 안팎을 조사하기도 했었는데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김윤식 : 그 비슷한 내용이 광복 후 신문에도 나고 그랬더라고요. 그런 일화도 있었고…. 참 지금 수위실 건물은 두 분이 근무할 때 지었나요? 그 뒷방 해설사 강의실에서 시사편찬위원회를 가지던 때도 생각납니다.

강덕우 : 짓기는 이미 그 전 최기선 시장이 계실 때 지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장 관사 관리인들이 있는 장소로 쓰였습니다. 나중에 정비를 해서 경비실과 인천시 역사해설사 교육장으로 사용했지요. 물론 향토사 강좌 교육장으로도 쓰고 또 가끔 시사편찬위원회 회의실로도 썼지요.

김윤식 : 강 박사와 이렇게 대담을 하다 보니 문득 소설가이면서 사진가였던 고 김일주 선생 생각도 납니다. 그분이 소설가 박경리 선생, 황순원 선생 등 우리나라 시인 작가들의 육필 원고와 행사 스틸 사진을 많이 보유했었지요. 그것을 그 강의실에 두고 분류작업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인천시에 기증하려다 틀어진 사연 좀 이야기해 주세요.

강덕우 : 김일주 선생께서 방금 말씀하신 육필 원고와 문인, 문화인들 행사 스냅 사진 원판 필름 등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작업하던 장면이 저에게도 떠오릅니다. 사실 그때 문화재단이 생겼더라면 거기서 이것들을 정리해 보관하고 전시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터인데…. 그것도 문화 역사 흔적이라고 이리로 가져와서 그랬던 것이 눈에 생생합니다. 그것들을 인천시에 기증한다면서, 또 소유주로서 조건 제시도 있고 해서 제대로 이야기 결말이 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더 이상 자세한 것은 모르고요.

김윤식 : 그랬군요 그럼 방향을 바꾸어서 묻겠습니다만, 두 분이 역사자료관에 계실 때에는 자료 전시회도 자주 열었지요?

강덕우 : 인천 향토사 관련 자료 문건, 사진, 엽서 등을 전시했지요. 늘 예산이 부족해 자료관 마당이나 복도에서 이젤에 펴놓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이런 것들이 다 인천 역사고, 인천 문화, 역사의 확인이면서 확장에 한 걸음을 보태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했습니다.

김윤식 : 그랬군요. 역사자료관에서는 맡은 업무로서 인천향토사 자료 총서 같은 책자를 발간하셨지만, 별도로 강옥엽 박사와 두 분이 그동안 신문 등에 발표한 칼럼 등을 모아 개인적인 책도 발간하셨지요?

강덕우 : 그동안에 인천 역사 관련 책자를 두 권 냈지요.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20년 가까이 일하면서 나름대로 정리하고 싶은 인천의 역사 부분, 또 우리 선대들이 이룩한 여러 가지 생활 문화, 예술의 발자취를 적어 본 것입니다. 한 권은 『인천 역사 칼럼』이고 또 한 권은 『문답으로 엮은 인천 역사』입니다.

김윤식 : 수고 많으셨습니다. 2013년 인천 정명 600년 때도 사진집 등 정리해 발간하느라고 크게 고생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강덕우 : 네. 그 작업은 참 보람 많은 작업이었습니다. 2002년에 인천시사를 발간했던 터라, 10년 후에 다시 발간하는 것이 통상적이기는 합니다만, 우리 인천이 말 그대로 ‘인천’이라는 도시명을 가지게 된 1413년 이래 600년에 되는 2013년에 사진첩 인천역사 책을 발간하는 일이었는데, 주위 여러분의 도움으로 무난히 사진집 등 세 권을 발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도 근무하는 동안의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김윤식 : 그런 노고를 세상은 잘 모릅니다. 굳이 드러내지 않으면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혹 알아도 당연한 일로 생각하지요. 그동안 묵묵히 수고 많으셨어요. 그 공로는 하늘은 알고 땅이 알겠지요.

오늘은 일단 이만 그치고 다음에 남은 말씀마저 듣겠습니다. 긴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강덕우 : 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하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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