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부모를 모시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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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부모를 모시는 일
  • 박남수
  • 승인 2023.11.01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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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나눔의 글마당]
박남수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 반
시민의 신문 <인천in>이 이달부터 인천노인종합문화화관과 함께 회원들의 글쓰기 작품(시, 수필, 칼럼)을 연재하는 <소통과 나눔의 글마당>을 신설합니다. 풍부한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고, 글쓰기 훈련을 통해 갈고 닦은 시니어들의 작품들을 통해 세대간 소통하며 삶의 지혜를 나눕니다.

 

결혼식을 하기 위해 내일이면 인천으로 가야하는 나는 그 마지막 밤에 꿈을 꾸었다. 안방 아랫목 깨끗한 이부자리 위 흰색의 실크 한복을 입은 예쁜 여인이 앉아 있는데 어딘지 편치 않아 몹시 힘들어했다. 그게 ‘나’라고 했다. 나에게 그 꿈은 영험한 자기 현시였다. 나는 그 꿈을 생각하며 다음 날을 맞았다.

늦도록 직장 생활을 하다 생활 환경이 바뀌니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고 불편했다. 엄마 생각이 났다.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다음 아들을 생각하셨음인가 나에게는 남수라는 이름표를 달아주셨다. 아홉살 까지 엄마 젖가슴을 떠나지 못해 매달리다 학교에 갔다.

집에 오면 책가방을 방에 내 던지고는 이집 저집 엄마를 찾아다녔고 누구 집 인지 댓돌 위에 얹힌 엄마 신발을 확인하고는 찾아 들어가 치근덕거리는, 엄마에 대한 애착이 심한 아이였다. 직장 생활이 시작되었을 때도 이 삼 일이면 기숙사를 벗어나 엄마 곁에서 밤잠을 자고 새벽에 출근했다. 엄마만이 내 인생의 전부인 것 같았고 떨어지면 못 살 것 같은 마음은 늦도록 여전했다.

그런 내가 엄마와 헤어져 남의 부모를 모시게 되었다. 어머니는 “너는 아버지 없이 자랐으니 시부모께 절대 말 대꾸 하지 마라. 네가 잘못하면 엄마 아버지 욕 먹이는 일이다.”, “황 서방이랑 잘 살아라." 늘 그렇게 당부하셨고 나는 그런 어머니 말씀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인천 오는 길에 가스 주입하는 오정동 충전소가 있었다. 장농이며 이부자리 등 한 트럭 싣고 오라버니와 오다가 그곳 공터에 차를 세우고 잠깐 내렸다. 옛날부터 살아온 세월이 스쳤음 인지 오빠가 영 안 된 표정으로 막내 동생 얼굴을 골똘이 쳐다보면서 잘 살라고 당부하셨다. 지금도 김포공항을 지나노라면 오십여 년이 지난 세월인데도 충전소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추억이 스치면서 오빠 생각이 난다.

 

 

그렇게 제 2의 나의 인생이 시작되었고 동네 사람들이 기웃기웃 하며 "참 예쁜 며느리가 왔네.", "참 하게 생겼네.", "그런 시댁에 그런 며느리가 왔네" 하고 소근거렸다. ‘무슨 뜻일까’ 나는 조금 궁금했지만 대개의 새댁이 그렇듯 약간의 긴장 상태로 살게 되었다.

시모는 강화에 가셔서 인삼을 한 소쿠리씩 사고 대추 등을 넣어 큰 들통으로 그득히 고아 내셨다. 인천 연안부두에 가셔서 조기 갈치를 짝으로 들여와 깨끗이 닦고 토막쳐서 장광 위에 널어 말리기도 하셨다. 지금도 비싸면 주춤거리는 알이 꽉 찬 꽃게를 한 관씩 사서 간장게를 먹음직스럽게 담그셨다. 정성스레 토막 내어 고명으로 고춧가루, 참깨, 솔솔 채 썬 파를 얹어 때때마다 내놓으면 참, 없어 못 먹지 그 맛이 황홀하였다.

여름이면 앞 텃밭에 상추를 심어 고추장 쌈에 점심을 드시는데 그 모습을 보면 쌈 보따리도 어찌 그리 큰지 눈을 하얗게 떠 올리면서 입이 터져라 넣고는 "이거는 시 아버지 앞에서는 못 먹는 거야" 하시면서 깔깔 웃으셨다. 그러면 나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김치도 맛깔나게 담그어 조금 맛이 변할 때쯤 통째 들고 나가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퍼 주면서 기분이 최고봉이셨다. 그 때는 어머니가 하시는 일마다 신바람이 나게 잘 되었기에 그런 일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후로도 어머니는 잘 잡숫고 화투도 잘 치시고 여행도 잘 다니셨다. 친구들과 모여 쇼핑도 즐기시고 시부가 며느리 예뻐하신다고 종종 질투도 부리시는 화통한 여장부이셨다. 하지만 시모는 남은 반평생 나와는 정반대의 성격과 생활로 사사건건 맞지 않은 시간을 보냈으니, 헤어지지도 못하면서 결혼 전날 밤 꾸었던 꿈이 생생하게 실현되는 시작점이 되었다.

화투 치는 여자들은 나이도 다양했다. 젊은 여자, 중간 여자, 늙은 여자 예닐곱 명이 모여 아침 먹고 나가서 저녁까지 어떤 때는 밤을 꼬박 새어 가면서 했다. 한 집을 정해 놓고는 밥까지 해 먹거나 사 먹으면서 몇 년 동안 이어졌다.

어느 날은 함께 어울리는 산 동네 사는 한 여자가 실컷 놀고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해거름에 집에 가다가 볼일을 보았단다. 그러다가 끝나기 전에 바지도 못 올리고 잠이 들어 버렸다. 그 소문이 온 동네 퍼졌다. 그 집 아저씨가 창피하고 속이 상해서 대판 싸움이 났는데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그 동네에 어떻게 살아요? 이사 안 간대요?” 하고 시모께 물었는데 “그래도 바람 난 것보다는 낫잖아요?” 했다는 그 여자의 남편 말을 전했다.

우리 시모는 그래도 술 담배는 안 하셨다. 사람이 끝 없이 내 욕구대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일까. 백만장자라면 그 뒷감당이 수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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