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6년, 선두포 제방공사를 완료하고 한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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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년, 선두포 제방공사를 완료하고 한 일은?
  • 김시언
  • 승인 2023.11.14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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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이야기]
(31) 강화역사박물관
강화역사박물관 입구
강화역사박물관 입구

 

강화 역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곳

‘박물관’이라는 말처럼 설레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무엇보다 발과 눈이 먼저 설렌다. 박물관에 가서 온종일 돌아다니면 시간이 빨리도 지나간다. 전시실마다 시대별로 잘 정리된 역사의 축소판은 봐도 봐도 끝이 없고, 볼 때마다 새롭고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비록 가끔이지만, 지방을 여행할 일이 생기면 박물관을 꼭 들른다. 그 지방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나둘 아는 게 늘어날수록 발품 팔 일도 늘어난다.

당연히 강화에 이사 와서도 박물관에 대해 관심이 컸다. 하지만 박물관을 한번 둘러보고는 크게 실망했다. 애걔걔,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면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곳에 있는 박물관이 이렇게 작나. 그래서였는지 한두 번 가다 말았다. 물론 강화에 터전을 잡으면서 할 일이 많기도 해 그리 자주 가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박물관에 대해 갈증이 생겼다. 그리 바쁜 것도 아닌데 박물관이 많은 도시에 한 번 나가기가 무척 힘들었다. 차를 몰고 나가는 일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도 다 버거웠다. 길에 쏟아붓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러다 보니, 다시 강화에 있는 박물관으로 관심을 돌렸다. 다시 가 봐야지, 꼼꼼히 살펴봐야지, 이런 마음으로.

박물관은 주로 평일에 가지만, 갈 때마다 거의 사람이 없었다. 전시실을 걸으면서 이렇게 사람이 없다니, 그동안 홀대해서는 아니었을까, 이제부터라도 자주 들러야겠구나 싶었다.

강화역사박물관은 강화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강화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박물관부터 가 보면 어떨까. 물론 처음부터 가지 않아도 된다. 강화에 관심이 생겼다면 오가는 길에 박물관을 둘러보면 그때그때 적합하게 들어오는 내용이 있다. 차근차근 강화를 알아가는 법, 강화역사박물관에 가면 해결된다.

 

강화동종
강화동종

 

선두포축언시말비와 강화동종부터

강화군 하점면 강화대로 994-19. 강화역사박물관 1층에 들어서면 넓은 로비 왼쪽에는 선두포축언시말비와 강화동종이 손님을 맞는다.

선두포축언시말비는 1706년(숙종 32) 강화유수 민진원이 왕명을 받아 선두포 제방공사를 완료하고 공사 과정을 기록해 이듬해에 세운 것으로, 화도면 사기리 선두포 둑 초입에 있던 것을 2010년 박물관으로 옮겨왔다. 비문에는 축언 과정과 결과,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어 조선 후기 축언의 구체적인 과정 및 수리와 개간의 범위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이다.

강화동종은 조선후기에 제작됐고 보물 제 11-8호로 지정돼 있다. 높이 176㎝, 입지름 145㎝. 강화산성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던 종으로 강화산성 남문에 걸려 있던 종이다. 1688년(숙종 14)에 강화유수 윤지완이 처음 만들었는데 금이 가서 소리가 고르지 못해 강화유수 민진원이 1711년(숙종 37)에 깨진 종을 녹이고 재료를 더해 정족산성에서 다시 만들었다.

동종 명문에는 ‘옛 종은 사인비구가 만들고 다시 만들 때는 조신이 만들었다’고 새겨져 있다.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사인비구는 8개의 동종을 제작했는데 모두 보물 11호로 지정됐고, 강화동종은 그중 하나다.

 

광성보전투를 재현한 모습.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를 재현한 모습.

 

강화동종 꼭대기에는 두 마리 용이 얼굴을 좌우로 향하여 몸이 서로 얽히어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고려시대 종의 양식이 퇴화하고 조선시대 종의 새로운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침입한 프랑스군이 강화동종를 약탈해 가려고 하였으나 무거워서 배에 싣지 못해 갑곶리 토끼다리 근처에 놓고 돌아갔다고 한다.

동종 옆으로는 강화가 침략당한 때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손돌목돈대 외부, 용두돈대 원경 등등. 광성보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이곳이 더 와 닿을 테고, 박물관에서 사진을 먼저 보고 광성보를 간다면 사진에서 본 처절함이 더 깊이 새겨질 것이다.

 

고려시대 도자기들
고려시대 도자기들

 

강화 청동기시대 유적은 멋지고 다양해

구석기 유적이 있는 곳에 가면 학교에서 배운 이름이 낯익다. 강화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된 사례는 없었으나 유적발굴조사 과정 중에서 구석기시대 층위가 확인되었다. 또한 인화-강화 도로구간 유적에서는 몸돌, 찍개, 주먹찌르개, 여러면석기 등 다양한 석기가 지표에서 다수 수습돼 당시 사람들이 생활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강화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주문도, 석모도, 우도, 동막리, 덕성리 등지의 해안가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불은면 덕성리 유적 조사과정에서는 신석기시대 노지(불땐자리)의 흔적과 조개무지가 확인됐으며, 서도면 우도에서는 볍씨 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생활하면서 해산물을 먹으며, 초기 농경생활을 시작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 마을은 주로 낮은 구릉, 평지, 산지에 입지하고 있다. 마을은 일정한 열을 이루며 배치된 주거지를 중심으로 무덤, 농경지뿐만 아니라 의례나 저장 곶간 등이 한 공간에 어우러져 있다. 마을을 둘러싸고는 나무 울타리인 목책을 일렬로 세우고 방어시설인 환호를 설치해 외부의 침입에서 마을을 지켰다.

강화는 고인돌에 비해 현재까지 조사된 주거지 유적 수는 적은 편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청동기시대 주거 유적은 강화 북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 부근리, 삼거리 고인돌과 일일생활권 내에 위치하며, 한강 하류와의 접근성이 가깝다. 신봉리, 장정리 유적은 봉천산의 완만한 구릉에 입지하며 강화 부근리 고인돌과는 직격 약 1.5㎞ 거리에 있다. 인화-강화 도로구간 유적은 고려산 구릉 하단부에 위치하며 대산리 고인돌과는 약 2㎞ 거리로 인정해 있다.

강화의 청동기시대 고인돌 유적은 멋지고 다양하다. 삼거리 고인돌군, 오상리 고인돌군, 부근리 고인돌 등이 대표적이다. 고인돌은 고려산과 별립산을 중심으로 군집해 분포한다. 강화 삼거리에서는 1966년 5기의 고인돌과 1기의 주거지를 발굴 조사하였다. 대동강 유역의 영향을 받은 팽이모양토기가 출토된 점을 통해 청동기시대 때 강화가 한반도 서북부 지역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오상리 고인돌 유적은 막힘돌이 있다. 2000년에 원형으로 모여 있는 고인돌을 발굴해 11기의 고인돌을 복원하였다. 고인돌 내에는 화살촉이 다수 출토됐으며 이외에도 민무늬토기 편, 반월형 석도가 출토됐다.

 

역사박물관 옆에 자연사박물관이 있다.
역사박물관 옆에 자연사박물관이 있다.

 

자연사박물관도 둘러볼 수 있어

유네스코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닌 자연유산 및 문화유산들을 발굴 및 보호, 보존하고자 1972년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 보호 협약(세계유산 협약)을 채택했다. 세계유산은 문화유산, 자연유산, 복합유산을 구분된다. 강화의 고인돌은 전북 고창, 전남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문화유산으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0년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강화는 고인돌의 나라라고 일컬어도 손색이 없다. 강화는 산과 물이 풍부한 곳이며, 고인돌을 만들기 좋은 편마암이 풍부해 고려산과 별립산을 중심으로 고인돌 160여 기가 분포하고 있다. 강화는 고조선의 대표적 특징이자 한반도 북쪽을 중심으로 확인되는 탁자식 고인돌(북방식 고인돌)이 다수 분포한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강화 고인돌은 교산리 고인돌군, 부근리 고인돌군, 삼거리 고인돌군, 고천리 고인돌군, 오상리 고인돌군. 고인돌 형식은 탁자식, 개석식이다.

강화역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은 옆에 나란히 있다. 넓은 마당에 함께 자리 잡았다. 주차장에서 층층대를 오르거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박물관 건물로 들어간다.

세계유산인 강화 고인돌이 있는 공원에 위치한 강화역사박물관은 강화의 문화유산을 조사, 연구, 전시하는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청동기, 고려, 조선, 근현대시대까지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통해 오랜 역사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

강화역사박물관은 시대별로 강화 역사가 따로 설명돼 있다. 그러니 강화를 제대로 알려면 박물관은 꼭 들러야 한다. 박물관부터 들르고 강화 곳곳을 다니든, 강화 여러 곳을 다니다가 박물관을 들르든, 아니면 강화를 둘러보면서 오가는 길에 박물관을 들르든, 그 어떤 방법이어도 강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조선시대 반닫이 중 최고로 평가받은 강화반닫이.
조선시대 반닫이 중 최고로 평가받은 강화반닫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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