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32바퀴 돈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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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32바퀴 돈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 유동현
  • 승인 2023.12.04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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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14) 우리나라 최초 세계 일주 여행가 김찬삼 – 유동현 /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인천in이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의 방식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인천중학 시절의 김찬삼

 

이제 ‘여행’이란 단어는 일상어다. TV를 켜고 리모콘 두어 번만 눌러도 각양각색의 여행 프로그램이 걸린다. 처한 형편 때문에 행장을 꾸리지 못해도 화면을 통해 북극도 갈 수 있고 아마존 정글도 여행할 수 있다. 이제 여행은 아예 ‘상품’으로 취급하는 세상이 되었다. 홈쇼핑에서 입맛에 맞는 해외여행 상품을 바로 구매할 수 있다. 마음먹으면 여권 챙겨 들고 내일이라도 지구 어디든 여행을 할 수 있다.

‘바보는 방황하고, 현자(賢者)는 여행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런저런 시대 상황으로 모두 방황할 때 배낭 하나 달랑 메고 길을 나선 사람이 있다.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金燦三, 1926~2003)이다.

김찬삼은 평생동안 지구 32바퀴의 거리를 여행한 우리나라 해외여행의 개척자였다. 1959년에 첫 해외여행을 시작으로 세 번의 세계 일주를 했다. 14년 동안 160여 나라 1천여 도시를 직접 발로 밟으며 세계를 품에 안았다. 여행은 그에게 삶 그 자체였고 숙명이었다. 몇 개월씩 집을 떠났다가 돌아와서는 곧바로 다음 여행을 위해 다시 봇짐을 꾸리곤 했다.

 

아버지가 물려준 ‘다리’

김찬삼은 1926년 6월 5일 황해도 신천군에서 태어났다. 황해도 신천에서 출생했지만 본적은 인천 중구 내동 162번지인 인천인이다. 그가 인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34년 아버지 김세완 전 대법관이 인천에 부임하면서부터다. 인천 창영초교에 입학했고 1939년에 졸업(29회)했다. 초교 졸업 후 5년제 인천중학교(6회 졸업)에 진학했다.

학창 시절 인천 바다는 방랑의 꿈을 키우고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내동 집에서 마실 가듯 가까운 인천 부둣가에 나가 외국 선박을 보면서 오대양을 누비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을 펼치기 위해 서울대 사범대 지리학과에 입학했고 1950년 6.25 전쟁 발발 몇 달 전 졸업했다. 대학 4년 내내 인천 내동 집에서 ‘여행하듯’ 경인선 기차 통학을 했다.

졸업 후 1950년부터 3년여 동안 숙명여고에서 지리 과목을 가르쳤고 이후 1958년까지 5년여 동안 인천고등학교에서 지리 교사를 지냈다. 이때 그는 현대판 ‘대동여지도 김정호’를 자처하며 지리부도 교과서에 나오는 방방곡곡 구석구석을 답사했다.

김찬삼은 아버지로부터 ‘다리’를 물려받았다. 김찬삼의 아버지는 대법관을 지낸 법조인 김세완(金世玩, 1894~1973)이었다. 아버지 김세완은 등산 ‘광’이었다. 이와 관련된 하나의 일화를 남기고 있다.

1955년 새해 일요일, 대법관들이 경무대 이승만 대통령에게 신년하례를 하기로 예정되었다. 김 대법관은 일요일에 언제나 등산을 갔다. 신년하례 때문에 등산을 거를 수 없었다. 그날은 다른 날보다 이른 새벽 4시경에 집을 나섰다. 대법관들이 경무대 대통령 부속실에 도착해 하례식 대기를 하고 있을 그 시간, 등산복 차림의 노인이 막무가내로 경무대 북문을 통과하겠다고 경비병에게 통사정했다. 그는 다른 날보다 일찍 북한산 등반을 마쳤지만 집에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올 시간이 없었다. 그날 김세완은 등산복 차림으로 대통령에게 신년 인사를 하였다.

김찬삼은 여섯살 때부터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산을 탔다. 그 발걸음은 훗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여행가 김찬삼을 탄생케 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김세완, 찬삼 부자는 1972년 10월 초순 함께 설악산 등반을 했다. 당시 김찬삼은 46세였으며 김세완은 78세의 노인이었다. 두 사람은 백담사를 거쳐 봉정암, 대청봉, 양폭폭포, 비선대로 이어지는 코스를 따라 걸었다. 이것이 평생 발걸음을 함께 한 두 사람의 마지막 산행이었다. 선친은 1973년 새벽 산책에 나섰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선친(전 대법관)과 함께 한 등반
선친(전 대법관)과 함께 한 등반

 

형 대신 넘은 안데스산맥

영결식은 종로구 자택에서 거행한 후 고인이 공동 설립한 인천동산중고등학교 교정에서 추모식을 가졌다. 상주는 외아들 김찬삼이었다. 그에게는 원래 ‘찬이(燦二)’라는 형이 있었다. (찬삼, 찬이 등 돌림자 이름을 보면 ‘찬일(燦一)’도 있을 듯한데 그 기록은 없다.)

‘안데스 고원을 헤매고 또 아프리카를 넘으리라’. 친형 찬이는 찬삼의 세계여행의 꿈을 발아시킨 장본인이다. 그와 관련된 아픈 사연이 있다. 1941년 김찬삼(15세) 보다 다섯 살 위인 찬이(19세)는 자전거로 황해도 집을 떠나 전국 일주를 하던 중 충청도의 어느 고개에서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찬삼은 형을 몹시 존경하고 따랐던 터라 그 충격이 무척 컸다.

김찬삼이 형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일기장을 보게 되었다. “오늘은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달리지만, 나의 꿈이 실현되는 십 년이나 십오 년 후에는 남미의 안데스 고원을 헤매고 또 아프리카를 넘으리라.” 형이 일기장 마지막 날에 남긴 기록이었다. 그 후 찬삼은 형의 꿈을 대신 이루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

형이 세상을 떠난 뒤, 김찬삼은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동방견문록>을 끼고 살았다. 그 책은 중학생 시절에 형이 선물한 것이다. 세계지도를 벽에 붙여놓고 “마르코 폴로가 서방에서 동방으로 왔다면, 언젠가 나는 동방에서 서방으로 갈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김찬삼은 수영 실력이 선수급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아홉 살에 아버지를 따라 한강을 헤엄쳐 건널 만큼 어렸을 적부터 물과 한 몸이었다. 1946년 황해도 신천에서 남한으로 넘어올 때 형에게 선물로 받은 <마르코 폴로 여행기>를 놓고 온 것이 떠올라 다시 예성강을 헤엄쳐 건너려 마음먹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제3차 세계일주여행 환송식(1969년)
제3차 세계일주여행 환송식(1969년)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 슈바이처 조우

마침내 인천고 지리교사로 근무하던 1958년 세계여행의 꿈을 실행했다. 그 첫발의 형태는 유학이었다. 미국에 있으면서 준비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대학원 지리학과에 입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아버지로부터 허락을 받아내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형의 사망으로 김찬삼은 졸지에 집안의 3대 독자가 되었다.

서울에 계신 아버지에게 편지를 올렸다. 찾아가 뵙고 설득하는 것보다 글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형과의 약속 등을 거론하면서 자신의 의지와 꿈을 편지에 간곡하게 담았다. 얼마 후 “여행을 허락한다”는 답장이 왔다. 마침내 그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당시 아버지의 허락 편지는 김찬삼의 유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58년 9월부터 첫 해외여행에 나섰다. 그는 이를 위해 평소 영어 공부보다 미소 연습을 많이 했다. 미소는 세계공용어로 어떤 상황에서도 통할 수 있는 비밀병기였기 때문이다. 61년 7월까지 북미·중남미·아프리카·중동 지역을 여행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62년 <세계일주 무전여행기>를 발간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이 책에는 100컷이 넘는 많은 양의 사진과 각종 지도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책의 맨 앞부분에 실린 컬러사진이다. 김찬삼이 페루의 안데스 고원에서 만난 여인, 조랑말과 함께 찍은 것이다. 그는 형의 영전에 바치는 의미로 이 사진을 책의 맨 앞에 실었다. 보름 만에 3쇄가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1962년 발간 '세계일주 무전여행기'의 첫 장 사진(페루 안데스 고원에서)
1962년 발간 '세계일주 무전여행기'의 첫 장 사진(페루 안데스 고원에서)

 

이후 직접 체험한 세계 곳곳의 삶과 문화를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겨 여러 권의 책으로 엮었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워낙 많은 사진과 기록물을 챙겨오다 보니 매번 간첩으로 몰려서 김포공항에서 몇 시간씩 조사를 받곤 했다.

당시 좀 산다는 사람들 집의 책꽂이에는 월부로 구입한 김찬삼의 여행기 책이 장식품처럼 꽂혀 있었다. 원색 화보에 담긴 각국의 도시 풍경과 풍물은 단번에 시선을 빼앗았다. 자료를 통해 얻은 박제된 글과 사진이 아니라 몸소 체험한 ‘레알’을 전해주는 것에 독자들은 열광했다. 김찬삼은 자동차로 여행할 때도 그곳의 바람과 교감을 해야 한다며 절대로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고 한다.

“탐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사준 10권짜리 <김찬삼의 세계여행> 전집을 읽은 뒤부터였지요. 어린 시절, 저는 그 책들이 다 닳도록 읽으면서 탐험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김찬삼 여행기를 읽으며 꿈을 키운 대표적인 인물 산악인 박영석이 생전에 남긴 말이다. 그는 히말라야 8,000m급 거봉 14좌(座) 완등 등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1963년생인 그는 어렸을 적 김찬삼의 여행기를 보며 세계 거봉 정복의 꿈을 꾸었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 많은 사람들은 김찬삼의 여행기 책들을 보며 세상을 엿보고 미지의 세계를 동경했다. 특히 70년대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종합상사를 설립해 전 세계 나라에 진출할 때 김찬삼의 책은 필독서가 되었다.

 

아프리카 여행 중 만난 슈바이처 박사
아프리카 여행 중 만난 슈바이처 박사

 

김찬삼의 책들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사진 한 장이 있다. 1963년 11월 아프리카를 횡단하던 중 가봉 공화국의 밀림 속 병원에서 당시 91세의 슈바이처 박사를 만난 장면이다. 통나무배를 타고 그 병원을 찾아갔던 김찬삼은 보름간 머물면서 슈바이처 박사를 도왔다고 한다. 당시 병원을 떠나는 김찬삼에게 슈바이처 박사는 “성공하려면 한 우물을 파라. 그것도 물이 나올 때까지 계속 파라”고 조언했다.

84년 대한출판문화협회는 해방 이후 80년까지 베스트셀러 1백31종을 전시한 ‘전국 책 박람회’를 개최했다. 이광수의 ‘사랑’, 김구의 ‘백범일지’, 심훈의 ‘상록수’,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과 함께 ‘김찬삼의 세계여행’이 끼어있었다.

 

 당시 스테디 베스트셀러였던 여행기

 

영종도에 마련한 별장

김찬삼은 세종대 재직 중인 1972년 베스트셀러 책의 인세를 받아 영종도 중산리 산 75번지 바다 언덕에 약 9,000㎡ 땅을 마련했다. 제주도와 영종도를 오가며 비교하던 그는 거리가 먼 제주도를 포기하고 영종도 구읍뱃터 쪽 산언덕에 터를 잡았다. 그곳에 별장을 짓고 긴 여행에서 돌아오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여행기를 집필했다. 후에 이곳과 가까운 곳에 세계로 통하는 첫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이 자리 잡는다. (이것을 김찬삼의 ‘촉’이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선견지명’ 혹은 ‘숙명’이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2001년 그곳은 유럽 여행을 함께 한 자동차(우정 2호 명명) 등 유품을 모은 기념관을 비롯해 여행도서관, 카페 등을 갖춘 ‘세계여행문화원’이란 문패를 달았다. 당시 그곳은 알음알음 숨은 명소가 되었다. 이후 영종도 개발 청사진에 포함되자 유족들은 ‘김찬삼 세계여행박물관’ 계획을 세웠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아쉽게도 2013년 철거되었고 그곳에는 영종역사관이 들어섰다. (여기서 잠깐, 만약 이곳에 공항이 들어서지 않았다면 김찬삼의 별장(세계여행문화원)은 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이러니다.)

 

영종도에 있었던 세계여행문화원의 입구
영종도에 있었던 세계여행문화원의 입구

 

김찬삼의 인천 사랑은 유난했다. 수도여자사대(현 세종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의 일화가 전해진다. 인천 출신 수험생이 입시 면접에 임하면 영락없이 인천 향토사를 알고 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잘 알지 못하면 “인천 사람이 인천을 몰라서야 되겠느냐. 지역을 제대로 알고 지리학을 공부하라”고 따끔히 충고했다고 한다.

1992년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 67세 때 다시 배낭을 짊어졌다. 그는 실크로드와 서남아시아, 유럽을 잇는 7만3천㎞ 여행길에 올랐다. 그해 6월 인도 여행 중에 교통사고로 머리와 갈비뼈를 다쳤다. 엎친 데 덮쳤다. 여행을 강행하던 9월에는 터키 앙카라에서 성벽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치는 사고를 당했다. 곧바로 귀국했으나 그는 언어 장애 현상을 앓았다. 그 후 병세는 점차 악화되어 2003년 7월 2일 서울 동숭동 자택에서 숨졌다. 그의 ‘여행’은 여기서 멈췄다. 기이하다. 그의 선친과 형 그리고 김찬삼 자신도 ‘길에서 일어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지상에서 못다 한 여행을 그들은 함께 천상에서 하고 있을 것이다.

김찬삼은 생전에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여행하다 죽으면 관을 세워놓아라. 하늘이 아닌 주변을 볼 수 있게.”

 

인천시립박물관 로비에 전시 중인 ‘우정2호’ 자동차
인천시립박물관 로비에 전시 중인 ‘우정2호’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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