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수동 솜 공장 직원, ‘하이론 인도네시아'를 일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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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동 솜 공장 직원, ‘하이론 인도네시아'를 일구다
  • 유사랑
  • 승인 2023.12.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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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16) 대표적 한상기업 ‘하이론 인도네시아’ 최정효 회장
- 유사랑 / 시사만평가, 자유기고가
인천in이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의 방식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최정효 회장
‘하이론 인도네시아’ 최정효 회장

 

인도네시아로 진출한 '대양산업'

수마트라, 자바, 술라웨시, 보르네오 및 뉴기니 일부 등 총 17,508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열네 번째, 아시아에서는 중국, 인도, 카자흐스탄,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다섯 번째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다. 인구가 무려 2억 7,000만 명으로 세계 4위의 인구 대국이기도 한 인도네시아에는 현재 우리 기업이 2,000여 개나 진출해 있다.

과거 ‘하이론’이라는 브랜드로 한국 침구류 시장과 섬유산업을 선두에서 이끌던 ‘대양산업’이 갑작스런 외환위기 파동을 겪으면서, 국내사업장을 과감히 접고 인도네시아로 진출했다. 이후 30여 년 만에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손꼽히는 한상기업으로 우뚝 서기까지는 최정효 회장(83)의 과감한 결단력과 시대를 읽어내는 선견지명, 그리고 철저히 신뢰를 우선으로 하는 투명 경영전략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현재 최정효 회장이 이끄는 ‘하이론 인도네시아 그룹’은 인도네시아 현지에 이노사이클, 사무드라, 유렉셀, 푸트라, 하이론스마트라 등 여러 자회사를 거느린 유력기업이다. 그 중 리사이클 폴리에스터를 생산하는 그린 테크놀로지 대표기업인 ‘이노사이클 (PT Inocycle Technology Group Tbk,)’이 2019년 7월 10일 인도네시아 증권거래소(IDX)에 상장(IPO)되면서 인도네시아는 물론 한국에서까지 비상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계 기업이 인도네시아 자본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첫 사례였기 때문이다. 기관 참여가 이어지며 약 126억 원의 공모금액이 순식간에 모여 상장 첫날 주가가 거래 시작과 함께 공모가(250루피아) 대비 49.60%(374루피아)까지 치솟으며 흥행 돌풍을 이어갔다.

 

인도네시아 현지 직원들과 함께한 최정효 회장(왼쪽 일곱 번째)
인도네시아 현지 직원들과 함께한 최정효 회장(왼쪽 일곱 번째)

 

친환경 재생 기술 확보, 매달 플라스틱 물병 3억개 수거

산업용 부직포와 자동차용 고밀도 패딩, 각종 필터, 침구류 등 다양한 품목을 생산하는 ‘하이론 인도네시아 그룹’은 자바섬 중부의 카랑가냐르와 북부의 스마랑, 그리고 모조케르토와 팔렘방에까지 대규모 공장을 증설하면서 재료로 사용할 폐플라스틱병의 원활한 확보가 가장 큰 숙제였다. 하이론그룹은 이 문제를 ‘플라스틱페이 테크놀로지 다우루랑 (Plasticpay Teknology Daurulang)’이라는 디지털플랫폼 방식으로 해결했다.

인도네시아 중심 지역의 대형 쇼핑몰이나 유동 인구가 많은 441개 포인트에 수집 기계를 설치하고, 폐플라스틱병을 이 기계에 넣을 때마다 플라스틱페이라는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는 포인트머니를 적립해 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중부 인도네시아에서만 매일 천만 개씩, 한 달이면 무려 3억 개의 버려지는 플라스틱 물병을 수거함으로써 재생 폴리에스터 섬유를 만드는 친환경 재생 기술기업으로 독보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화석연료 비중이 지나치게 높은 데다, 플라스틱 배출량 세계 2위의 나라라는 오명에 시달리던 인도네시아 정부 입장에서도 더할 나위 없는 성공으로 열렬히 환호한 것은 당연지사다.

1987년 유엔환경개발위원회(WCED)가 ‘브룬트란트보고서’를 채택한 이래로 친환경 소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진 글로벌 기업들의 수요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면서, 하이론그룹의 매출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2018년 이후 매년 16%씩 성장해, 2022년에만 6,920억 루피아(한화 약 610억 원)를 기록했을 정도다. 현재 생산 물량의 70%를 리사이클 PSF가 차지하고, 물량의 90%를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소화 중이다. 토요타와 혼다, 미쓰비시, 닛산, 이토츄 등의 완성차 업체와 글로벌 가구 기업인 이케아 등이 주요 고객사다.

 

지방 자회사를 지도방문한 최정효 회장(뒷줄 오른쪽 일곱 번째)
지방 자회사를 지도방문한 최정효 회장(뒷줄 오른쪽 일곱 번째)

 

화수동 솜 공장에서 섬유산업의 미래를 보다

하이론그룹의 최정효 회장은 인천중 7회, 제물포고등학교 4회 졸업생으로 오늘이 있기까지 최정효 회장을 이끌어 준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도 바로 故길영희 제물포고등학교 초대 교장이다. 최 회장은 지금까지도 故길영희 교장의 생전 가르침을 가슴에 단단히 못 박아두고 산다.

“중국 천진에서 태어났어요. 신의주에서 유치원을 졸업하고 해방 후 가족이 모두 월남해 인천학익초등학교를 다녔는데 학교가 집에서 멀어 부친께서 2살 터울의 동생을 챙기라고 같은 학년에 넣어주셨죠. 그런데 제물포고등학교 1학년 때 부친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졸지에 2남 1녀의 소년가장이 된 거예요. 월사금조차 낼 수 없어 수업 중 쫓겨 온 적도 부지기수이던 형편에 대학은 언감생심이었죠. 마침 부산국제시장에서 포목상을 크게 하시던 큰외숙모님께서 인천에 오셔서는 ‘대학 가지 말고 부산 와서 장사를 배우라’고 권하셨어요. 나 하나라면 모르겠지만, 동생까지 둘이 대학에 간다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어린 마음에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장남인 내가 돈을 벌어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기로 결심하고는 부산국제시장에서 포목상 점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장사에 소질이 있었는지 가게가 너무 잘되는 거예요. 큰외삼촌이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서부터는 아예 장사를 도맡아 하게 됐어요. 그렇게 2년여를 지내다 군 입대 영장이 나왔죠. 당시는 돈을 써서 군대를 빼기도 하던 시절이라,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빼줄 테니 군대 가지 말고 장사를 계속하자는 유혹도 있었지만, 뿌리치고 입대하게 됐죠. 특히 저를 눈여겨보시던 작은외삼촌이 적극적이셨어요. 작은외삼촌은 혼자 피난 내려와 미곡상으로 큰돈을 번 분이셨죠. 결국 저의 입대 결심이 워낙 완강한 걸 확인하고는, 제대 후에라도 꼭 함께 일하자고 당부하셨어요.”

군대를 제대한 후 최 회장은 정말로 작은외삼촌과 함께 일을 하게 됐는데, 그게 바로 섬유산업과의 인연으로 이어졌으니 인생이란 참으로 오묘하다 하겠다. 당시 작은외삼촌은 인천 화수동에서 ‘삼우제면’이라는 솜 공장을 친구와 동업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최 회장은 그곳에서 6년간 근무하는 동안, 다른 여러 솜 공장 사장들은 물론이고 도매상 등 관련 업계 사람들로부터 진국으로 소문이 나며 성실성과 신용을 인정받았다.

 

인도네시아 공장에 기계 설치 지도차 방문했다.
인도네시아 공장에 기계 설치 지도차 방문했다.

 

군대에서 길영희 교장에 쓴 편지

최 회장과 길영희 교장의 교류가 졸업 이후에 다시 이어진 것은 군 입대를 하고서다. 군대서 의무적으로 편지를 써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편지로 마음을 하소연할 대상이 딱히 없었던 최 회장이 중·고교 시절 여러 좋은 말씀으로 용기를 주던 길 교장이 생각나 무작정 편지를 띄운 것이다. 답장까지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길 교장은 마치 아버지가 어린 자식에게 당부하듯 긴긴 장문의 편지를 3년 내내 꼬박꼬박 보내주었다. 그렇게 인생의 고비 때마다 길 교장은 최 회장에게 길잡이이자 가슴 속 참스승이 되어 주었다. 제대 후 최 회장이 인사차 모교를 방문해, 솜공장에서 일한다고 하자, 길영희 교장이 다른 좋은 직장을 알아봐 주시겠다는 걸 만류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한다.

“동업하시던 삼촌이 다른 사업을 위해 공장에서 손을 떼신 후에도 저는 삼우제면에 남아 계속 솜 공장 일에 전념했어요. 어렴풋이 섬유산업에 대한 미래가능성 같은 게 제 눈에도 보였거든요. 당시는 명주나 목화솜 대신 캐시미론 같은 화학솜이나 폴리프로필렌계 PP섬유가 개발돼 인기를 끌던 때였는데, 캐시미론은 기존 솜과 촉감은 비슷하면서도 훨씬 가볍고 질겨 잘 찢어지지도 않았죠. 더구나 명주나 목화솜은 물에 젖으면 솜이 뭉치는 바람에 무겁고 세탁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화학 솜은 그런 면에서 비교가 안 됐어요. 더구나 막 개발된 PP섬유의 무궁무진한 활용도는 가히 혁명이라 할만했죠.”

폴리에스터 부직포 시장의 무궁한 발전 가능성을 보고 6년 만에 ‘삼우제면’을 퇴직해 도매상을 차려 독립했다. 가게는 순풍에 돛단 듯 나날이 번창했다. 최 회장의 신용과 성실성을 익히 알고 있던 거래처에서 믿고 물건을 후불로 밀어주고 또 우선적으로 구매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2년쯤 지났을 무렵 ‘삼우제면’ 사장이 갑자기 타계했다는 부고가 날아들었다. 놀라 조문을 하러 간 최 회장을 유족들이 붙들고는 회사를 맡아달라며 통사정했다.

그때가 1972년인데 8.3긴급조치로 사채동결령까지 내려진 상황이라 회사를 맡을 여력이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거래처 사장들까지 적극적으로 나서서 투자금을 모아주는 바람에 별수 없이 ‘삼우제면’을 떠맡게 됐다. 당장 눈앞의 이익보다는 신뢰를 쌓는 방향으로 공장을 운영했는데, 우려와는 달리 여기저기서 주문이 쏟아지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75년에는 회사 이름을 ‘대양산업’으로 바꾸고 안양에 새로운 공장도 지어 확장 이전했다.

“회사가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쯤, 은퇴하고 충남 덕산에서 ‘가루실 농민학교’를 운영하고 계시던 길영희 교장 선생님을 찾아뵈었어요. 축구공, 농구공을 잔뜩 차에 싣고 갔는데 저보고 그러시는 거예요. ‘시중에 가짜 솜이 많이 나돈다는데, 아예 최 군 얼굴 사진을 상표에 박아두고 팔라고’요. 거짓말할 생각 말고 양심적으로 사업을 하라는 뜻이었겠죠. 또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최 군은 평생 솜을 떠나지 마라’고요. 지키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 말씀을 60년간 지키며 이렇게 살고 있네요. 제 재주와 깜냥으로는 이 일이 제격이니 늘 성실히 솜 사업을 지켜나가라는 말씀으로 믿고 지금껏 가슴에 새기고 있죠. 사업이 잘될 때나 안될 때나 단 한 번도 다른 쪽에 눈을 돌린 적이 없었으니까요. 남들이 꺼려하고 손 안 대는 분야에서 열심히 한 우물만 파며 여기까지 올라섰다 자부해요. 길 교장선생님과의 일화와 추억은 그 외에도 너무 많은데, 서울에 올라오실 때면 아무리 바빠도 늘 제가 직접 수행하며,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가르침을 주신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참스승이시죠. 길 교장님 소개로 이어진 중·고교 시절 영어 선생님이었던 김석주 선생님, 동문 선후배들인 심재갑, 길연익, 김연모 교수 등과의 교류도 제 인생에 크나큰 도움이자 즐거움이었고요.”

 

종업원의 상호존중과 화합을 우선가치로

‘삼우제면’에서 ‘대양산업’으로 다시 ‘하이론코리아’로 승승장구하며 한국 섬유산업을 주도하던 최정효 회장의 사업이 난관을 맞게 된 것은 서두에서도 언급했듯 1997년의 외환위기 때문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널뛰기하는 수입 원자재 가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89년부터 부분적으로 투자를 해오고 있던 인도네시아 현지로 아예 사업장을 옮기는 모험을 단행한 것이다. 한국과는 기업생태환경이 천양지차인 인도네시아에서도 신용과 투명회계, 그리고 종업원의 상호존중과 화합을 우선 가치로 내세운 최 회장의 신뢰경영은 여지없이 빛을 발했다.

 

지난 10월 한국방문 시 왼쪽부터 황효진(제고22회) 인중·제고총동창회 회장, 최정효(제고4회) 회장, 김상진(제고19회) 아이언파트너스㈜ 회장
지난 10월 한국 방문 때. 왼쪽부터 황효진(제고 22회, 인중·제고총동창회 회장, 최정효 회장, 김상진(제고 19회) 아이언파트너스㈜ 회장

 

제고 시절부터 무감독 시험을 치르며 체화된, 손해를 보더라도 스스로 양심을 속이지 않는 자기성찰과 길 교장의 가르침이었던, 속을지언정 속이지 않는 철학이 인도네시아 현지 종업원들은 물론이고, 거래처와 파트너社, 그리고 인도네시아 정부 인사들한테까지 깊은 울림을 준 탓이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진심이 통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최 회장의 태도에 의심은 천천히 신뢰로 바뀌어 갔다.

“사람 사는 건 어디든 똑같아요. 결국 자기 하기 나름이죠. 솔직한 가슴으로 다가가면 저들도 솔직한 가슴으로 대하는 게 세상 이치예요. 동남아사람들이 게으르다는 편견도 많지만, 저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먼저 기후나 문화적 습성을 고려하지 않고 한국식 사고로만 판단하는 건 금물이에요. 아침 6시에 인도네시아 거리로 나가보세요. 벌써 차들로 꽉 차 있어요. 종교적인 이유로 새벽 4시면 모두 일어나 기도를 하고 바로 출근하기 때문이죠. 인도네시아 정부도 자국 기업과 외국기업의 차별이 거의 없어요. 물론 인도네시아 현지인 기업이 드물고 70% 이상이 외국기업인 이유도 있겠지만, 기업환경 측면에서도 한국보다 유리한 측면이 많아요. 요즘은 K-culture의 인기로 한국의 이미지도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어요. 인도네시아는 성장 잠재력과 성공 가능성이 매우 높은 매력적인 나라예요. 현지에서 기업을 직접 운영하고 있는 경험자로서, 다양한 한국기업들의 인도네시아 진출을 적극 추천하고, 또 돕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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