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이력 겸손한 삶, 김학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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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이력 겸손한 삶, 김학준 교수
  • 이용식
  • 승인 2024.02.12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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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24) 김학준 교수 / 이용식 前 인천연구원 원장
인천in이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의 방식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김학준 교수

 

<위키백과>는 김학준 교수를 대한민국의 정치학자, 언론인, 정치인이라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항목별로 상세하게 그의 이력을 드러내고 있다.

 

○ 김학준(金學俊, 1943 ~ )은 대한민국의 정치학자, 언론인, 정치인이다.

만주국 봉천시에서 태어났다. 1965년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로 출발하면서 언론인의 생활을 시작하였고, 정치학자이자 언론인으로 제1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단국대학교 이사장과 인천대학교 총장, 동아일보사 사장 및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과학기술원(KAIST) 문화과학대학 김보정 석좌교수, 단국대학교 석좌교수를 지냈고, 한국정치학회 회장,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위원회 이사를 거쳐 2011년 6월 30일 아시아 기자 협회의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2012년 9월 이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 학력

제물포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

켄트주립대학교대학원 정치학 석사

피츠버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

○ 수상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체육훈장 거상장

황조근정훈장

○ 저서

『가인 김병로 평전』 민음사(2001)

『북한의 역사』 전 2권(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매헌 윤봉길』(항일 불꽃으로 산화한)(동아일보사, 2008)

『독도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0)

『서양인들이 관찰한 후기 조선』(서강대학교 출판부, 2010)

『구한말의 서양정치학 수용 연구, 유길준·안국선·이승만을 중심으로』(서울대학교출판문화 원, 2012)

『두산 이동화 평전, 한국에서 민주사회주의운동을 개척한 정치학자의 이념과 실천』(단국 대학교 출판부, 2012)

『민족통일론의 전개』 (형성신서 10, 형성사, 1986)

『공삼 민병태 교수의 정치학』 (해방 이후 한국에서 정치학이 소생-성장-발전한 과정의 맥락에서,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3)

『혁명가들, 마르크스에서 시진핑까지 세계 공산주의자들의 삶과 죽음』(문학과지성사, 2013)

『현대 러시아의 해부』 동북아역사재단(2014)

 

그에 대한 보다 자세한 기록 보존을 위해 <위키백과>에서 빠진 부분과 내용을 추가하면 이렇다.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서독 뮌헨 대학교,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 유학을 이유로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였다. 3년 여 동안 노태우 대통령의 사회담당 보좌관과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겸 대변인을 맡았다. 1996년 인천21세기연구센터(現인천연구원) 원장을 거쳐 시립인천대학교 총장을 지냈고, 동아일보 회장으로 있던 시기에 4년간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회장을 겸했다. 2017년부터 2년 간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 이사장으로 재직했다. 그리고 작년부터 다시 인천대학교 이사장을 맡고 있다. 또한 그의 저서 목록에는 『통일 이후의 통일을 생각한다(공저)』, 『인산 김영국 교수의 정치학』 등을 추가해야 한다.

김학준 교수의 저서

 

이처럼 김학준 교수의 경력은 화려하고 이력은 눈부시다. 여러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했고 그 결과로서의 성과도 뚜렷하다. 한 사람이 이룬 성과라 하기엔 그 범위가 매우 넓은데, 그러면서도 그 수준과 내용이 높고 깊어서, 각각의 전문영역에서 특히 학문 분야의 그것은 우수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여러 방면에 걸친 그의 거침없는 행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동아시아 문제 연구소인 니어재단(NEAR·North East Asia Research Foundation)이 출범 15주년을 기념해 작년 6월 30일 대규모 세미나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김 교수는 정치와 언론 분야 발제를 맡았다. 〈한국의 근현대사의 미래: 성취·반성·회한 그리고 길〉이라는 주제로 15명의 국가 원로와 8명의 현역 학자가 대담과 토론을 벌였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 각계 원로와 전문가들이 모여 4시간 이상 각자의 의견을 활발히 개진했던 자리였다.

정치와 언론 세션에서 김학준 교수(‘전 동아일보 회장’으로 소개됨)는 ‘공평하게 세상을 보도록 하는 것이 언론과 지성인의 역할’이란 주제로 발제했다. 발제 내용 중 일부를 인용해본다.

 

민주주의의 후퇴나 회복은 최근 들어 매우 중요한 테마다. 포퓰리즘의 확산과 관련해서는 우선 법원, 언론, 대학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이들 기구가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고, 정치권의 개입과 같은 폐해로부터 견제가 필요하다.

(중략) 공평하게 세상을 보면서 이를 알리는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것이 지성인과 언론의 책임이다. 예전보다 오늘날에는 지식인의 비판적 역할이 많이 사라졌다.

(중략) 건강한 민주주의의 요건과 관련해 우선 의원내각제로 나가야 한다고 본다. 대통령제는 이제 수명이 다했고, 그 성공 사례는 미국을 제외하면 매우 찾아보기 어렵다.

(중략) 우리가 의원내각제를 하기 위해서는 정당민주주의를 수용해야 한다. 선거의 민주성을 높여야 하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경선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선거를 많이 치렀고, 권리당원이라는 것이 생기는 등 정당도 많이 변화해왔다. 앞으로 정당 제도도 많이 개선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방자치도 처음에는 문제가 많았지만, 이를 개선해보면서 발전한 것처럼 정당 정치도 그런 방향으로 변화해갈 수 있다. 정당 정치를 이유로 권력 구조 개편을 마냥 미룰 수 없다.

 

2022. 06. 30._니어재단 세미나_발제(니어재단 제공)
2022. 06. 30. 니어재단 세미나 발제(니어재단 제공)

 

재작년 김학준 교수는 <민세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사장을 지냈고 민족운동가이자 역사학자로 헌신했던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1891~1965) 선생을 기리기 위해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뜻을 모아 만든 것이다. 민세 안재홍 기념사업회가 제13회 민세상 학술연구부문 수상자로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를 선정했던 것인데, 그를 선정한 사유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학술연구부문 수상자인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는 한국정치를 연구한 대표적인 정치학자로서, 정치사와 정치인물 연구 등에서 방대하고 탁월한 업적을 냈다. 김학준 교수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인천대 총장, 국가기록연구원 원장, 한국 정치학회 회장, 세계정치학회 부회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동아일보 사장 등을 역임했다. 1989년 노태우 정부시절 청와대 대변인으로 안재홍, 김규식, 조소앙, 박열 등 한국전쟁 중 납북당한 독립유공 민족지도자들의 복권에도 힘썼다.

그 동안 『남북한의 통일정책 비교연구』, 『한국정치론』, 『전환기 한국외교의 시련과 극복』, 『한국문제와 국제정치』, 〈한국의 북방정책〉, 〈북한 핵문제와 북한의 장래〉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통해 한국정치학 연구의 지평을 크게 넓혔다. 특히 한국 근현대 정치인물사 연구에도 탁월한 업적을 남겨 『이동화 평전』,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가인 김병로 평전』, 『고하 송진우 평전』, 『윤봉길 평전』 등의 저작을 집필했다. (평택시민신문, 2022. 12. 1.)

 

2022. 11. 30._제13회 민세상 시상식 ((사)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제공)
2022. 11. 30. 제13회 민세상 시상식 ((사)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제공)

 

김학준 교수는 수상 소감으로 위 신문과의 전화인터뷰에서 “민세 선생은 얼마나 대단한 분입니까? 안재홍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쓴 학자이자 언론인이셨고, 해방 후 좌우합작과 통일 정부를 위해 노력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호를 딴 상을 제가 받게 돼 저로서는 큰 영광일 뿐입니다. 과분할 뿐이지요. 앞으로 남은 시간 더욱 더 매진하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민세상 수상을 전하고 있는 여러 언론매체들은 김학준 교수가 지난날의 흠결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대면 인터뷰는 정중하게 사양했고, 대신 간략한 전화 인터뷰로 수상 소감에 대신하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중에는 대면 인터뷰 고사 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전하는 기사도 있다.

 

제13회 민세상 학술·연구 부문 수상자로 결정된 김학준(79) 단국대 석좌교수는 민세상 수상과 관련한 대면(對面) 인터뷰를 끝내 고사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여러 가지 흠이 있고 부끄러워 차마 인터뷰에 나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민세상 수상을 채찍이 담긴 격려로 알고, 앞으로 더욱 공부에 매진하는 계기로 삼겠다”고 했다. (THE ASIANNW, (사)아시아기자협회, 2022. 11. 28.)

 

지난날의 흠이나 흠결은 그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이에 대해 김 교수가 직접 언급한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으나, 우리가 격렬하게 거쳐 온 8,90년대를 돌아보면, 충분히 짐작은 할 수 있다. 개인적 능력과 사회적 동력을 가진 인사에게 가해진 그 시절의 강한 정치권력적 요구를 쉽게 머리에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김학준 교수는 젊은 교수 시절 이미 여러 방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고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것이 결국 그를 정치에 끌어들였다고 얘기한다. 그의 뛰어난 능력과 명성이 정치판의 거센 구심력에 말려들었다고나 할까. 1989년 대통령 비서실 사회담당 보좌관으로 발탁되었을 때 한 언론 기사는 그를 이렇게 전했다.

 

정력적 필력과 학구열로 여러 분야 여러 사람이 욕심을 내온 정치학자. 12대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징발돼 지난 대통령 선거 때 노태우 진영의 브레인 역할을 하다가 『교수가 천직』이라며 잠시 서독유학을 거쳐 서울대에 돌아갔으나 사회담당 보좌관으로 청와대에 합류. 반체제에서 재야에 이르기까지 발이 넓고 현실 감각이 뛰어나다는 평. 저서와 논문이 가장 많은 학자중의 한사람. (청와대 사회 담당 보좌관-김학준씨, 중앙일보, 1989. 4. 22.)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시절 그는 ‘저서와 논문이 가장 많은 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뛰어난 연구자이면서 그 성과가 풍성한 학자로서 진즉에 이름을 알렸다. 그의 담당 과목은 열성적이면서도 충실한 강의로 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또한 대학 선생으로서는 제자들을 살뜰하게 챙기고 인간적으로 보살피는 따뜻한 품성을 가진 스승이었다.

정치학과 제자였던 전영기(정치학과 80학번)는 김학준 교수에 대해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1980~1986년은 신군부 권위주의 통치에 저항하는 학생운동과 시위가 끊임없이 펼쳐졌다. 관악캠퍼스엔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진동했다. 사복형사의 무리들과 정보기관에서 파견 나온 요원들이 득실거렸는데 사회대학 8동 대형강의실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이 운집한 가운데 낭랑하게 퍼지던 김학준 정치학과 교수의 ‘한국 정치론’, ‘소련동구 정치론’ 등 강의는 절망과 좌절의 나날을 보내던 서울대 학생들에게 청량제 역할을 하였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선생님의 강의 어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감성은 이성이 모르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이승만의 아시아적 전제군주의 의자는 무너지고 말았다’, ‘혁명이란 단어가 모든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하던 시대가 있었다.’ 돌이켜 보면 김 선생님 역시 당시 40세 전후의 열혈 지식인이었고, 20대 때 정권의 용공조작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던 국가폭력의 피해자였으니 혁명사와 정치학이라는 메타포로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려는 마음이 담긴 말씀들이라고 생각한다.”

1983. 03. 정치학과 80학번 졸업여행_아랫줄 맨 오른쪽 김학준 교수, 맨 왼쪽 전영기 당시 과대표, 현 시사저널 기자 (유홍림 현 서울대 총장 제공)
1983. 03. 정치학과 80학번 졸업여행. 아랫줄 맨 오른쪽 김학준 교수, 맨 왼쪽 전영기 당시 과대표, 현 시사저널 기자 (유홍림 현 서울대 총장 제공)

 

이어서 그는 김 교수로부터 받았던 따뜻한 관심과 보살핌에 대해, “선생님은 필자가 1980년에서 1986년까지 사회대학 정치학과에서 학부와 대학원 석사 과정을 졸업할 때뿐 아니라 첫 직장인 중앙일보 기자로 입사해 정년을 마치고 올해 ‘시사저널’로 옮길 때까지 고비마다 나를 구원하여 주셨던 은사님이시다.”라며, 아직까지 그를 훌륭한 스승의 모습으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얘기를 개인사로 좁혀 보면 1982년, 3학년 2학기 때 나는 정치학과 과대표이자 서울대의 지하 운동권 서클의 일원이었다. 운동권은 이른바 ‘제도권 진입 투쟁’을 결의하고 그 일환으로 사회대의 차기 학도호국단장을 운동권 출신으로 세우기로 했는데 이를 위해 사회대학 대의원 회의를 소집해 사회를 보는 역할을 내가 맡았다. 당연히 이 모든 과정은 불법이었다. 당시 정치학과장인 김학준 교수가 경고를 하였고, 나는 “사회를 보지 않겠다”고 거짓말을 한 뒤 비밀리에 전격적으로 대회를 열어 운동권의 학도호국단 진입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

사회대학이 발칵 뒤집혔다. 이 때문에 내게 최소한 무기정학에 강제징집 조치가 취해질 게 불보듯 환했다. 상황이 벌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연로한 부모님에 대한 걱정, 군경에 붙잡혀 당하게 될 폭력이 두려워졌다. 나는 며칠 학교를 안 나가고 피해 다녔다. 그 사이 김학준 학과장은 사회대학장과 서울대 본부 당국에 온갖 호소를 하며 구명운동에 나섰다. 연락을 받아 학과장실로 찾아뵈었더니 선생님은 “자네, 나한테 왜 거짓말을 했나. 남자답지 못한 것 아닌가”라고 꾸짖었다. 그러면서 “무기정학과 강제징집 조치는 취하지 않기로 했으니 학업에 정진하기 바라네”라고 했다. 그 사이에 김 선생님이 나를 위해 얼마나 애를 쓰셨는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김학준 선생님은 학과의 다른 제자들을 위해서도 비슷한 일을 많이 하셨다. 선생님의 구제와 사랑도 감사하지만 “왜 사람이 거짓말을 하나”는 주의는 환갑을 맞은 지금까지 필자의 가슴에 금언으로 새겨져 있다.

김학준 은사의 나를 구원한 스토리는 그 뒤에도 이어졌다. 1987년 가을, 나는 중앙일보 입사시험에서 1, 2차에 합격했는데 문제는 3차 면접이었다. 서울대 학적부에 ‘보안사 남상사’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기입된 ‘시위전력자’라는 빨간 기록 때문에 나는 이미 한 해 전 석사장교 시험에서 탈락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 시절이기에 언론사라도 중앙일보가 나를 배척할 수 있다는 걱정이 있었다. 김학준 선생님과 상의했더니 그는 대뜸 내 손목을 잡고 바로 서소문의 중앙일보사로 데려가는 게 아닌가. 선생님은 회사 앞에서 나를 기다리게 하고 바로 중앙일보 주필을 만나러 올라갔다 30여 분 만에 돌아왔다. 희망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중앙일보 주필께서 ‘자네를 시위전력자라는 이유로는 떨어트리지 않을 테니 실력대로 시험을 치르라’고 하셨네. 소신껏 해보게.”

그 뒤 나는 입사에 성공했다. 그로부터 33년이 훌쩍 지났다. 오늘 수십 년간 마음에 품어두었던 스토리를 공개함으로써 스승의 사랑과 은혜를 되새기고자 한다. 김학준 은사님, 감사드립니다! (전영기, 정치학과 80학번, ‘무기정학·강제징집 막아준 김학준 선생님’, 서울대총동창신문 518호, 서울대학교총동창회, 2021년 5월.)

2012. 03. 01_추모제에서 길영희선생기념사업회의 장학금을 수여하는 김학준 교수
2012. 03. 01 추모제에서 길영희선생기념사업회의 장학금을 수여하는 김학준 교수

 

필자가 김학준 교수를 두고 그의 화려한 많은 이력 가운데 굳이 김학준 ‘교수’로 호명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유에서다. 그의 이름 뒤에 붙이는 여러 경력 가운데 ‘교수’가 지금까지의 그의 생애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정식 교수로 활동한 기간이 다른 화려한 경력에 비해 물리적으로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교수로서의 활동 모습이, 학자와 스승으로서의 활약이, 그를 가장 그답게 드러내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짐작하기도 한다. “공부하고 가르치는 교수로서의 삶이 그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기억되지 않을까?”

김학준 교수는 그렇게 오늘도 열심히 연구하고 그 성과를 조금씩 세상에 드러내면서, 그리고 여전히 여러 인연으로 맺어진 후배들을 정성스럽게 챙기며 하루하루를 ‘겸손’하게 보내고 있다. 선배님에 대한 소박한 바람을 전하며 글을 맺는다. “건강한 모습으로 이렇게 쭈-욱 저희 곁에 머물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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