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무역의 중심지 개항장, 승자독식의 장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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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무역의 중심지 개항장, 승자독식의 장이 되다
  • 김광성
  • 승인 2024.02.23 0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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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시대-김광성의 개항장 이야기]
(2) 1930년대, 인천 본정통 은행가
변화는 기억을 지워버린다. 광속시대에 편승해 남기느냐 부수느냐 논쟁이 이어지는 사이, 한국 근현대사의 유구(遺構)들은 무수히 사라져 갔다. 외형적인 것만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정한(情恨)이 녹아 있는 기억마저 더불어 지워졌다. 사라진다는 것이 아쉬운 것은 시간의 흔적이라는 역사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천 개항장을 그려온 김광성 작가가 최고와 최초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개항장의 근대 풍경과 당대 서민들의 생활상, 손때 묻은 물상들을 붓맛에 실어 재구성하여 독자들과 공유한다.

 

 

1883년, 일제에 의한 강제 개항.

요지를 선점한 일본은 개항장 본정통을 금융업의 거점으로 삼았다.

부산지점 인천출장소로 개설한 일본제1은행.

1987년에 이르러 석조 사옥을 세우고 기반을 굳힌다.

정미업을 필두로 시작된 초기 사업화 시기,

쌀의 집산과 방출이 시작되면서 일본 상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1890년, 일본제18은행 개설,

1892년, 일본제58은행 개설.

자국 상인들을 지원하는 일본은행은 산업자본과 고리대 자본을 육성하고 토지구입 자금 공급에 총력을 기울였다.

인천의 금융업은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한 정책으로 금융침탈에 목적을 둔 수탈기구였다.

의지의 한국인들이 은행설립 운동을 도모하고 조선은행 등이 문을 열었으나 경제적 기반의 미약, 경영지식 부족으로 얼마 못가 문을 닫아야 했다.

인천 무역의 중심지, 개항장은 승자독식의 장이 되었고 근대적인 경제개념에 무지했던 조선은 일본의 자본가에 의해 그렇게 잠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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