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궁지 지나 북문 산책로 초입, 688살 은행나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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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궁지 지나 북문 산책로 초입, 688살 은행나무에게
  • 고진현
  • 승인 2024.03.19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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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따라 음악따라]
(5) 섬의 여백에 보호수(BGM - 고진현의 ‘688살 나무에게’)

 

강화도에는 한자리에서 긴 세월을 지켜온 고나무가 유난히 많다. 실제로 2022년 기준 인천의 116종의 보호수 중 강화군에만 69종이 있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주변의 섬에 고나무가 많다는 건 그만큼 나무가 살기 좋은 환경이란 뜻이 아닐까. 필자는 울창하고 커다란 나무를 좋아한다. 집 앞에 아주 오래된 보호수 한 그루가 살고 있다. 688살 은행나무이다. 굵은 줄기가 올곧게 뻗어있고 세월이 무색하게 매우 건강해 보인다. 개인적으로 의미부여가 많이 되어있는 특별한 보호수 나무이다.

 

 

이 나무는 강화읍 고려궁지를 지나 북문 산책로 초입에 있다. 위치로 보아 예전에 궁 안에서 살았던 것 같다. 강화읍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높은 지대위에 있다. 현재는 보호수로 지정되어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낮은 울타리가 쳐져 있다.

동네 주민한테 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있다. 보호수로 지정되기 전에는 나무에 그네가 달려있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이 나무 그네를 타며 한눈에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모습이 상상되는 대목이다. 나무가 지지해 주는 그네를 타면 어떤 느낌일까.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이 등을 밀어주는 느낌일까. 688년 동안 한 자리에서 살고 있는 나무는 그동안 목격했던 것들과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까?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그네를 타며 깔깔 웃고 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이번 칼럼에서는 필자가 2023년에 발표한 노래를 소개하려 한다. 강화도에 살면서 만든 음악 4곡을 엮어 EP <헤매다,섬> 앨범을 발매했다. 그중 3번째 트랙 ‘688살 나무에게’ 라는 노래다. 이 앨범은 클래식기타와 목소리로만 구성된 포크 앨범이다. 20여 년간 복잡한 도심에 살면서 늘 틈 없이 복잡한 거리와 건물들에 치였던 것 같다. 하늘을 보면 달과 구름 대신 건물과 전깃줄이 빼곡해 시야가 가려지곤 했다. 강화도에 와서 느낌 다른 점은 섬에는 여백이 많다는 것이다. 높은 건물보다는 우뚝 선 나무와 봉우리, 얽혀있는 전깃줄 보다는 너른 하늘이 보인다. 이 앨범에는 섬의 여백이 그대로 담겨있다.

 

 

길을 오갈 때마다 688살 나무에게 인사를 건네곤 했다. 때로는 우두커니 서서 고민을 털어놓고 멍하니 바라보며 쉬어가기도 했다. 우리가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살아온 나무의 우직함에 기대고 싶어지는 날이 있다. 내가 세상을 떠나도 나무는 나를 기억해 줄 거라는 사실이 때로는 위로가 되기도 한다. 말하지 않아도 펼쳐진 가지로 따스하게 안아주고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다. 협곡처럼 굽어진 자연스러운 줄기의 모양처럼, 누군가를 품어 줄 수 있는 곁을 가진 것처럼, 큰 나무처럼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쓴 노래이다. 나무에게 받았던 위로를 음악에 담아 누군가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 고마워, 사랑해. 안아줘, 포근해. 넌 내가 보이는구나. 기억해 줘. 내 모습. 나는 나를 잃어버리곤 해. 만약 내가 사라진다면, 나무가 될게. 바다가 될게. 나를 만나러 와줘 ”

- 688살 나무에게 노래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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