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시대-김광성의 개항장 이야기]
(4) 월미도 둑길
(4) 월미도 둑길
변화는 기억을 지워버린다. 광속시대에 편승해 남기느냐 부수느냐 논쟁이 이어지는 사이, 한국 근현대사의 유구(遺構)들은 무수히 사라져 갔다. 외형적인 것만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정한(情恨)이 녹아 있는 기억마저 더불어 지워졌다. 사라진다는 것이 아쉬운 것은 시간의 흔적이라는 역사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천 개항장을 그려온 김광성 작가가 최고와 최초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개항장의 근대 풍경과 당대 서민들의 생활상, 손때 묻은 물상들을 붓맛에 실어 재구성한다.
흡사 달의 꼬리 같아 월미도라고 했던가
살랑이는 미풍에도 벚꽃이 쏟아지고
한량들의 술잔에도 꽃잎이 날아드니
모던 걸 풍의 세련된 신식 여성들의 나들이에
뭇 사내들은 미혹 되었다.
개항 이후 모진 풍파를 겪었던 월미도에도 호시절은 있었다.
월미도가 인천의 상징으로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둑길이 준공되고 각종 위락시설을 갖춘 임해유원지를 개발하면서 부터였다.
1922년, 북성지구에서 월미도까지 약 1km의 돌제방이 축조되었고,
그 길로 봄철이면 만개한 벚꽃을 보기위해 경향각지에서 상춘인파가 몰려 들었다.
인공 해수 풀장과 바닷물을 데운 조탕은
피부병과 신경통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호황을 누렸다.
특히 만조 때는 물에 떠 있는 것처럼 설계한 용궁각에서
권번 기생의 춤을 술을 곁들여 감상하고 빈호텔에서 단잠을 청하는 호사를
한번 쯤 누리고 싶어 했다.
철도국이 운행한 경인선 화열차는 대단한 유혹이었다.
양춘가절에 화사하게 개화한 벚꽃섬 월미도를 보기 위해
신혼부부와 돈 있는 유흥객이 화열차에 올랐다.
20여 년 동안 조선 최고의 관광지로 독보적인 전성기를 누리던 월미도는
6.25전쟁으로 모든 시설과 섬 전체가 초토화 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월미도를 애정했던 당대의 사람들은
월미도의 추억, 그것은 한 편의 동화였다고 술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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