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여명기, 선창가 칠통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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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여명기, 선창가 칠통마당
  • 김광성
  • 승인 2024.04.05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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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시대-김광성의 개항장 이야기]
(5) 1920년대, 제물포 칠통마당
변화는 기억을 지워버린다. 광속시대에 편승해 남기느냐 부수느냐 논쟁이 이어지는 사이, 한국 근현대사의 유구(遺構)들은 무수히 사라져 갔다. 외형적인 것만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정한(情恨)이 녹아 있는 기억마저 더불어 지워졌다. 사라진다는 것이 아쉬운 것은 시간의 흔적이라는 역사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천 개항장을 그려온 김광성 작가가 최고와 최초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개항장의 근대 풍경과 당대 서민들의 생활상, 손때 묻은 물상들을 붓맛에 실어 재구성한다.

 

1920년대, 제물포 칠통마당(108x51cm)
1920년대, 제물포 칠통마당(108x51cm)

 

칠통(七通) 마당,

왜 그렇게 불렀는지

알려주는 이가 없으니 그 내력을 알 수가 없다.

칠통마당을 거점으로 했을 때,

통하는 길이 일곱 군데여서 붙여진 명칭 같기도 하지만

분명치가 않다.

 

개항으로 맞이한 변화의 물결은 참으로 거세었다.

필요에 의해 매립된 해안동 일대의 이 선창 마당에는

각국의 박래품과 다양한 나라의 인물 군상들로

언제나 북새통을 이루었다.

인천항은 조선에서도 으뜸인 미곡집산지 아니던가

부두 창고에는 항상 쌀이 가득하고

해안 공지에도 벼가 매일 같이 산처럼 노적 되었으니

인천은 쌀의 도시요 쌀 없는 인천은 적막강산이라 할만 했다.

 

자연히 객주 업자와 쌀 거간꾼, 투기꾼, 목도꾼, 지게꾼, 정미직공, 생선장수,

부두 노동자들이 모여 들었고

산더미처럼 쌓인 볏섬과 쌀 가마니 사잇길에서 북적였다.

금빛 나는 알배기 조기를 비롯해 각종 어류와 해산물이

한 배 가득 들어와 칠통마당은 늘 풍성했다.

또 축항 공사와 매립 공사 등으로 인력의 수요가 생겨나면서

인천의 인구는 급속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개항 초 제물포 전경(110 x 45cm)
개항 초 제물포 전경(110 x 45cm)

 

잘만하면 거부가 될 수 있다는 야망의 미두꾼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인천을 찾아와 개항장을 번성케 했다.

각국 조계 설정에 따른 일본인, 중국인, 등 외국인들도 증가했다.

사람 붐비는 곳에 돈 끓는다고, 한 몫 단단히 잡으려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인천으로 유입되다 보니

생기는 것이 음식점이요 느는 것이 술집이었다.

저자와 다름없는 선창에는

큼직한 인절미와 시루떡으로 좌판을 벌인 떡장수와

잔술을 파는 들병 장수, 역장수가 뒤섞여

좋다는 선창 벌이에 목을 매고 살았다.

이러한 생활상이 인천의 여명기, 제물포 시대 칠통마당의 풍경이었다.

 

격동의 연속이었던 그 야만의 시대에

비록 내적인 동력에 의한 이행은 아니었을지라도

자본주의의 맹아기, 인천에 상륙한 근대문명은

제물포의 면모를 일신 시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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