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흔히 자연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자연의 삶을 관찰하면 거기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행복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거지요. 류시화 시인은 나무의 삶에서 그 지혜를 발견했습니다. 그분의 ‘나무는’이라는 시를 살펴보겠습니다.
나무는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그러나 굳이 바람이 불지 않아도
그 가지와 뿌리는 은밀히 만나고
눈을 감지 않아도
그 머리는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
나무는
서로의 앞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그러나 굳이 누가 와서 흔들지 않아도
그 그리움은 저의 잎을 흔들고
몸이 아프지 않아도
그 생각은 서로에게 향해 있다
나무는 저 혼자 서 있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세상의 모든 새들이 날아와 나무에 앉을 때
그 빛과
그 어둠으로
저 혼자 깊어지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시인의 삶에 대한 사유의 깊이가 느껴져 시를 읽는 내내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서로 떨어져 홀로 서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와 살짝살짝 부딪치는 잎들은 서로 그렇게 은밀하게 소통하고 있고 서로를 향해 그리워하고 있다니 말입니다.
이런 시인의 통찰을 뒤집어 생각해봐도 아름답습니다. 그런 그리움은 적당한 거리에 머물고 있을 때 비로소 오래 간직된다는 것에서 저는 큰 배움을 얻었습니다. 흔히 본능적인 사랑의 관점으로 보면 그게 사랑이냐?, 라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나무처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리움을 간직한 그런 사랑도 위대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인간에게 있어서의 적당한 거리란 그 사람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몇 미터 정도는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서로 호감을 갖고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서서히 서로를 알아갑니다. 그러나 알아갈수록 그 사람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동안 느껴왔던 그 사람의 장점도 조금씩은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는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오곤 합니다.
불평이나 불만은 거친 언행으로 이어집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함부로 대하게 돼 그 사람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남기게 될 겁니다.
《CEO 경영 우언》(정광호)에 고슴도치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슴도치 두 마리가 있다. 피곤하고 졸린 이들은 추운 날씨에 체온유지를 위해 서로 부둥켜안고 싶다. 그러나 가시가 찔러 하는 수 없이 떨어져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잠을 잔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추위에 떨던 이들은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 껴안았으나, 가시 때문에 떨어지곤 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마침내 둘은 서로의 체온을 느끼면서도 가시에 찔리지 않는 적정거리를 찾아내게 되었다.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 중에는 사이가 참 좋은 부부들도 있습니다. 무척 부드럽고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가 돋보입니다. 그분들은 장점만 가진 사람이어서 노인이 된 지금도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걸까, 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아닐 겁니다. 고슴도치처럼 때로는 부딪치며 다투기도 하고 상처를 내기도 하면서 끝내 서로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은 아닐까요. 너의 가시를 알고 있기에 내가 조심스레 다가가고, 나의 가시를 네가 알기에 네가 나를 배려해주며 살아온 것이 저렇게 아름다운 노부부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살면서 항상 기쁜 일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서로에게 아픔이 되기도 하고 미움이 되기도 합니다. 슬픔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럴 때마다 헤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헤어진다면 어느 누구와도 함께 살 수가 없겠지요.
때로는 참고 때로는 눈물 흘리며 아파하고, 때로는 그냥 받아들이기도 할 겁니다. 이게 삶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있어도 서로를 그리워하는 나무와 고슴도치처럼, 우리 역시도 서로에게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서로를 보듬어줄 수 있는 지혜를 배울 뿐만 아니라 적절한 거리를 뜻하는 예의까지도 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