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 강직, 자유분방... 유엔 대사가 된 미국통 외교관, 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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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 강직, 자유분방... 유엔 대사가 된 미국통 외교관, 김숙
  • 이용식
  • 승인 2024.04.28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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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35) 김숙 전 UN대사 - 이용식 / 전 인천연구원장
김숙 전 대사
김 숙 전 대사. 오른쪽 길영희 선생 친필 '유한흥국' 액자

 

<위키백과>는 김숙 전UN대사(제물포고등학교 14회 졸업, 1952년생)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김숙(金塾)은 대한민국 前 외교관이다.

 

주요 이력

• 제12회 외무고시 합격

• 1984년 대통령 비서실 외교행정서기관

• 1987년 외무부 본부 외무행정서기관

• 1991년 미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1등 서기관

• 2000년 주 캐나다 토론토 총영사관 총영사

• 2003년 외교통상부 본부 대사

• 2004년 외교통상부 북미국 국장

• 2007년 외교통상부 제주도 국제관계자문대사실 실장

• 2008년 외교통상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 본부장

• 2009년 국가정보원 제1차장

• 2011년 제23대 주UN 대표부 대사

• 2012년 UN 여성기구 집행이사회 대표 총재(2013년 8월 퇴임).

• 2019년 미세먼지 해결을 위한 범국가기구 설립추진단 공동단장

• 2019년 국가기후환경회의 전략기획위원장(국제협력 - 민간위원)

• 2019년 보다나은미래를위한 반기문재단 상임이사

•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자문위원

• 인천광역시 외교·안보 자문단 외교분야 전문가

 

학력

• 인천송림국민학교 졸업

• 인천중학교 졸업

• 제물포고등학교 졸업

• 서울대 사회학 학사

 

제물포고 시절 김숙 전 대사
제물포고 졸업앨범 속 김숙 전 대사

 

그의 외교관으로서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시기 UN대사 유임을 전하는 언론은 그에 대한 프로필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유임된 김숙 주유엔 대사는 외교부 출신의 대표적인 미국통 외교관으로 평가받는다. 1978년 외시 12회로 외교부에 들어온 뒤 주미 1등서기관, 북미과장, 주토론토 총영사, 북미국장 등을 지내 이른바 '북미라인'으로 분류된다. 북미국장 시절에는 한미방위비 분담협상에서 한국 측 분담액을 최초로 삭감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2008년 4월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에 임명돼 10개월간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로 활약했고 이후 국정원 1차장직을 수행하며 해외정보 수집·분석 업무를 담당한 뒤 2011년 여름 유엔대사로 부임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외교부 장관으로 있을 때 북미국장으로 호흡을 맞추는 등 반 사무총장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지난해 12월 장거리 로켓 발사와 올 2월 3차 핵실험에 대응하는 유엔 결의안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현장 사령관으로 활약했다.

카리스마가 있는 성품에 업무 추진력이 뛰어나고 소신이 분명한 것으로 평가된다. 부인 최춘옥(61)씨와 사이에 2녀.
▲인천(61) ▲서울대 사회학과 ▲주미 1등서기관 ▲북미과장 ▲인사기획담당관 ▲주토론토총영사 ▲북미국장 ▲제주도 국제관계자문대사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국정원 제1차장 ▲주유엔대사(현). (연합뉴스, 2013. 3. 31.)

 

업데이트된 최신 자료를 토대로 그를 좀 더 자세히 소개한 내용을 보자. 세계 평화의 날 울산시민행사(2023년 9월 21일)에서 김숙 전UN주재 한국대사 특강이 있었는데(울산시의회 3층 회의실), 행사를 주관한 울산지역 NGO단체인 ‘따뜻한 손길’은 강연자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김숙 대사는 전 주 유엔대사로서 1978년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여, 35년간 미국, 인도, 캐나다 등 해외 공관 근무를 포함하여 외교 및 정보 분야에서 근무한 직업외교관입니다. 김 대사는 2011-2013년 동안 주 유엔대사로 재직하며 한국의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2013-14) 진출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또한 2013년 2월에는 안보리 의장으로서 북한의 제3차 핵실험에 대한 안보리 논의를 주도했습니다. 김 대사는 2012년 유엔의 지속가능개발정상회의(Rio+20) 준비위원회의 공동의장 및 유엔 여성기구(UN Women)의 집행이사회 의장을 역임했습니다. 그리고 공직생활 중 대부분을 한미동맹과 북한핵문제 등에 헌신했습니다. 국가정보원 제1차장으로 재직한 기간(2009-2011년)과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으로서 6자회담 수석대표를 역임한 기간(2008-2009년) 그리고 북미국장으로 재직 중 초대 방위비분담교섭 대사를 역임한 기간(2004-2006년)도 있습니다. 김숙 대사는 2013년 퇴임 후 스탠포드대학교 아태연구소에서 방문학자로 활동했으며, 2019-2021년에는 국가기후환경회의 전략기획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현재는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반기문재단의 상임이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3년 09월 21일 UN세계평화의 날 울산시민행사(출처: 울산광역시의회 블로그)_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2023년 09월 21일 UN세계평화의 날 울산시민행사(출처: 울산광역시의회 블로그, 앞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김숙 전 대사

 

학창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매사에 적극적이고 약간은 특별했던 친구로 기억한다. 명석해서 공부도 잘했는데 그렇다고 전형적인 모범생의 모습은 아니었단다. 어찌보면 이른바 정도에서 조금 벗어나려고 하는 그런 성향도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그가 일찍부터 나름의 가치관과 주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냥 모범생이 아니라 남다른 면을 보이면서 자기 주장을 가졌던 친구로 기억한다. 평생지기 정이모(제고14회 졸업생, 한국은행 근무), 조영춘(제고14회 졸업생, 자영무역업) 등은 이렇게 전한다.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이 확실했던 거죠. 그래서 무슨 꼭 가르친 대로만 처신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하는 성향이 좀 있었어요. 그래서 ‘쟤는 조금 삐딱한 거 아니냐’라는 시선이 있을 수 있었는데, 그건 아니었고 자기의 가치관과 자기의 어떤 주장이 뚜렷하기 때문에 그런 식의 행동이 나타났던 것이죠.”

 

그의 특별한 면모로서 친구들은 그가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껄렁껄렁한 덩치 큰 학생들을 제압하는 이른바 카리스마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좀 자유분방하다고 표현은 했지만은 그렇다고 해서 방종은 아니고요. 학생으로서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다방면으로 참여하고 싶어 했어요. 친구 관계라든가 대외 관계라든가 대내 관계 이런 데서 좀 자유분방했죠. 교우 관계에 있어서 사실 그 당시만 해도 좀 삐딱한 친구들이 좀 있었어요. 근데 그런 애들을 그 작은 체구에 거의 휘어잡고 다녔지.”

 

대학생이 된 후 일찍부터 가까이 지냈던 친구들이 一思友(제고14회 졸업생 14명으로 구성했다는 의미도 함축)를 만들어 지금까지 매달(요즘엔 분기별) 모임을 가지고 있는데, 친구들은 그가 늘 이 자리에서 보인 태도가 외교관의 자질을 확인시키곤 했다고 전한다.

“숙이는 제 의견을 자기가 먼저 이거다 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조용히 듣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름대로의 판단을 섞어서 항상 자기 의견을 정확하게 얘기해요. 거의 다 거기에 수긍을 하게 되죠.”

 

김숙 자신은 외교관의 길을 가게 된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말한다. 외교관이란 게 뭔지도 몰랐던 유치원 시절 아버지의 말씀이 그가 외교관을 꿈꾸게 됐던 계기였다.

“창영국민학교 옆에 있던 영화유치원엘 다녔는데 어느 날 인천시청 지방공무원으로 계셨던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 우리나라가 지금은 가난하지만 그런데 숙이 너는 이 다음에 자라서 해외에 다니는 외교관이 되거라 하시는 거예요. 그게 뭔지는 잘 몰랐지만 그렇게 해서 외교관의 꿈을 갖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외무고시 합격 후 그는 보통의 직원들이 근무를 원하는 주요 재외공관에서 외교관 일을 시작하게 된다. 대외 관계에서 비중이 크고 해결해야 할 주요 외교적 현안과도 관련된 지역을 주요한 재외공관이라 할 수 있는데, 김숙은 처음부터 이곳에서 외교관 업무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미국 워싱턴을 시작으로 인도에서 3년 근무했고 다시 워싱턴에서 근무했다. 이어서 샌프란시스코 근무를 거친 다음 다시 같은 북미 지역인 토론토에서 근무했다. 이후 한 8년 동안 서울에 있다가 그다음에 UN대사로 뉴욕에 가게 된다. 대부분의 외교관 생활을 북미지역에서 보내게 되어, 주요 외교담당그룹으로 간주되는 ‘북미라인’으로 분류된다.

그는 외교부 실무자 때부터 주미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외교 과제를 다루게 되었다. 국제적으로 핫이슈였던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대응 과제가 대표적이다. 미국과의 관계를 둘러싼 대외정책 현안들을 외교적으로 처리하는 일에 능력을 발휘했다.

국내 외교부로 돌아와서는 인사 관계 업무를 담당했다. 이 또한 매우 중요한 일이었는데, 외교부 인사라는 게 보직 이동이나 인사 수요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수준을 넘어, 해외 근무지를 결정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외교부에서는 특히 인사가 중요한 게 다른 부처의 인사라는 것은 예컨대 3층에서 4층으로 간다든지 서울에서 수원으로 간다든지 이런 거지만 외교부의 인사는 서울에서 아프리카로 가느냐 또는 미국으로 가느냐 하는 겁니다. 인사 결정에 따라서 몇 년 동안 우리 가족의 생활 문화가 완전히 바뀌는 거니까, 때로는 거기에 아주 목을 매는 사람들이 많이 있거든. 그러니까 인사가 꽤 세요. 그래서 이제 내가 인사를 맡았을 적에는 그 조선조 때 이조전랑 또는 이조정랑이라고 동인/서인 따지며 인사를 마구 쥐고 흔들었던 그런 자는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업무에 임했고 그런 자세로 스스로 자신을 훈련시켰어요.”

 

외무고시 이후 공직생활이 이처럼 잘 풀린 것에 대해 본인은 운이 따랐다며 겸손해한다.

“외무고시 합격 후 용케도 나는 외교부에서 그래도 운이 좋아서 남들이 원하는 1급지라고 하는 데를 다녔지. 외교부 생활을 하면서 어떤 사람은 조직에서 잘 안 풀렸던 사람도 많은데 나는 뭐 운이 좋아서 이제 잘 풀렸고 그래서 그렇게 된 거죠.”

 

그러나 그 시기를 함께하며 가까이서 그를 지켜봤던 이들은 김숙이 소위 1급지를 전전(?)하면서 외교부 인사업무까지 맡았던 사유를 그의 ‘운’에서 찾지는 않는다. 성실함과 강직함이 기본이 되었으며 그래서 위아래로부터 모두 인정받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된 데에는 그의 소신과 성실, 노력이 있었다.

김영석 前 이태리대사(제고15회 졸업생)는 외교관 시작을 함께했던 동료이자 고교 1년 후배로서 오랜 세월을 공적·사적으로 그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이다. 김숙 대사 얘기를 꺼내자 그는 외교관으로서의 그의 능력과 자질을 거침없이 풀어낸다. 외무고시 합격 후 외교부에 근무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능력과 자질이 빛을 발했다며, 여기에 유머감각까지 더해져 외교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매우 적합한 사람이었다고 평한다.

“뛰어난 사람이지. 이 양반이 그렇게 뭘 화를 내고 그러는 게 없어. 하여튼 그러니까 굉장히 사회적으로 아주 적합한 사람이야. 나도 쭉 지냈지만, 워낙 가깝게 지내고 그러면 서로 이제 조금 신경 쓸 일도 있을 수가 있는데, 내 기억엔 그런 게 전혀 없어요.”

 

외교관으로서 그가 성공적인 데뷔를 하고 훌륭한 성과를 내게 된 데에는 여러 영역에서 그의 축적된 실력과 안정적인 자세가 바탕이 되었다고 김영석은 전한다.

“사람들을 아주 편안하게 하지. 그리고 유머가 많잖아. 일단 이렇게 여유를 갖고 무슨 이슈건 사람이건 만나서 상대를 해요. 그러면 그거는 아주 생면부지 사람들과 같이 얘기도 하고 그래야 되는 어떤 대외적인 관계하는 데는 아주 적합한 성품이지.”

 

게다가 그의 드러내지 않는 노력과 밝은 성격이 한몫했다고 말한다.

“내가 알기로는 막 그냥 학구파 뭐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근데 또 뭐 아는 게 많아 두루두루. 그런 데다가 뭐랄까 상당히 나에 비해서 또 주변에 비해서 말이야 부지런해. 그러니까 뭘 좀 나름대로 상당히 개인적인 노력을 했다고 봐야지. 이러니까 저렇게 되는구나 하는 거 있잖아. 그런 게 있는 사람이야. 그렇고 하여튼 무엇보다도 밝아.”

 

대사직을 내려놓은 후에는 그는 국가가 당면하고 있는 글로벌 이슈를 해결하기 위한 전문가로서의 참여 활동에 적극적이다. 외교관이었던 사람으로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몇해전 그는 우리 정부의 '미세먼지 해결 범국가기구'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미세먼지 해결 위한 범국가기구 설립추진단' 공동단장을 맡아 활동했다.

당시 청와대는 “김 전 유엔대사는 외무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다양한 국제 외교무대에서 의장직을 맡았고, 국제적인 환경 회의의 실무협상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등 다자 간 협력·협상의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환경부 산하에 설치될 설립추진단은 ‘미세먼지 해결을 위한 범국가기구’의 조속한 출범을 위해 범국가기구의 설립 규정 제정, 위원 후보자 발굴 및 인사 검증 지원, 예산 편성 및 운영·관리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밝혔다.

 

2019년 04월 01일 '미세먼지 해결을 위한 범국가기구 설립 추진단' 현판식(출처: 전자신문)_왼쪽에서 두 번째
2019년 04월 01일 '미세먼지 해결을 위한 범국가기구 설립 추진단' 현판식(출처: 전자신문)_왼쪽에서 두 번째

 

김숙 전 UN대사는 요즘 들어 특히 청년들에게 많은 얘기를 하고 싶어 한다. 경험과 커리어를 통해 축적한 나름의 생각과 소신을 후배들에게 전해, 그들이 자신의 삶과 사회적 역할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길 바라는 눈치다. 자신의 스토리가 젊은이들에게 작은 자극이라도 되어 그들이 자신과 세상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는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인생 선배로서의 바람으로 읽힌다.

몇 해 전 송도 국제캠퍼스 종합관 301호 다목적실에서는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에 거주하고 있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초청 강연이 있었다. 초대 강사는 김숙 前 UN대사였다. ‘21세기 국제질서와 청년세대의 미래’를 주제로, 학생들에게 세계시민으로서, 그리고 장차 21세기를 이끌어갈 잠재적 리더로서의 역할에 대한 것들을 고민하는 자리였다.

그는 글로벌 위기로 강연을 시작하였다. 여러 방면에서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지구촌 위기 상황을 점검하였고, 세계화와 기술의 발전에 기인한 모순적 결과들을 다양한 차원에서 설명하였다. 김숙 대사는 이러한 모순됨은 20세기 냉전의 잔재인 우리나라의 통일 문제에서도 관찰된다고 언급했다. 이어서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과 스페인의 철학자인 George Santayana의 문장을 인용하며 역사로부터 필히 교훈을 얻으려 노력해야 함을 강조했다.

강연을 마무리하며, 김숙 대사는 학생들에게 밀레니엄 청년세대가 갖추어야 할 지혜와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책 Hamlet의 문장을 인용하며 이 세상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찼지만, 이러한 세상을 옳은 시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숲을 바라보듯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세계시민으로서 타인을 포용하고, 평화에 대해 이해하고,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진취적인 태도로 범국가적이며 전지구적인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거듭된 강조로 강연을 마쳤다.

 

2019년 09월 26일 연세대 강연_21세기 국제질서와 청년세대의 미래(출처:연세대학교 홈페이지 학부대학 RC교육원)
2019년 09월 26일 연세대 강연_21세기 국제질서와 청년세대의 미래(출처:연세대학교 홈페이지 학부대학 RC교육원)

 

외교관으로서 기본에 충실했던, 매우 성실하고 적극적이었던 그는 여전히 국가의 대외정책과 외교 현안에 대해 ‘걱정 어린 시선’으로 사려 깊은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36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외교 분야 에세이의 맺는말 부분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외교관으로서의 그의 탁월한 식견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중략--)국제정세의 흐름과 이에 따라 요구되는 우리의 외교적 태세는 궁극적으로 전쟁과 평화, 삶과 죽음의 영역을 다루며 국가의 미래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국가 운영의 필수 영역이다.

그러나 급박한 외교 현안이 발생할 경우나 신문 머릿기사를 장식할 때를 제외하고는 평상시 국민의 인식 속에 외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높지 않은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경우에도 외교와는 상관없는 이념과 정치에 휘말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우리의 높은 대외의존도와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 그리고 북한의 안보 위협에 비추어 볼 때 외교는 다른 요소에 종속됨 없이 우선순위가 높게 다루어져야 하며 특히 국내 정치의 부속물처럼 다루어져선 안 된다. 앞서 언급한 외치(外治)는 내치(內治)의 연장이라는 말은 두 가지 모두 일관되게 엄중한 국익의 관점에서 다루라는 것이지 외치가 내치에 종속된다는 뜻은 아니다.

앞에서 우리의 외교가 지향해야 하는 방향으로서 헌법적 가치, 국익 우선과 미래지향의 세 가지를 거론하였다. 외교의 당면 현안과 대상은 상황과 시간에 따라 바뀌더라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세 가지 전략적 자세는 일관되어야 한다. 또한 당면 현안을 다루면서도 앞으로 대두될 가능성이 있는 의제들에 대해 선견적이고 상상력이 있는 안목을 갖추는 것도 필요하다. 망루에 올라 망원경으로 수평선을 응시하는 ‘수평선 점검’(horizon scanning)의 자세다.

전략적 자세를 견지해 나가는 데 있어 잊지 말아야 할 요소가 외교적 상수(常數)로서 지정학적 위치와 통일 문제이다. 이 두 가지 상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 역량의 상당 부분을 집중해서 쏟아부어야 하는 국가적 의제인바 여기에 필요한 것이 자강, 동맹, 국제공조라는 3중의 동심원 전략인 것이다.

3중 동심원 전략에 입각한 국익 중심 외교를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그 이행 수단으로서 외교 역량 강화가 필수적이다. 중장기적으로 통일 및 그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외교 인력의 획기적 증원, 외교망(해외공관)의 전략적 확대 재배치, 21세기 달라진 국제환경에 맞는 외교부의 대대적인 개편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상과 같은 논점에 덧붙여 마지막으로 한가지 개인적 생각을 추가하고자 한다. 필자는 외교가 대체로 70%의 상식과 30%의 전문성에 의해 다루어진다는 믿음이 있다. 상식과 전문성의 차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토론이 필요하겠으나 그만큼 외교의 일상에 있어서 상식의 원만한 작동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지위가 오를수록 건전하고 균형 있는 상식의 덕목이 더욱 중요해진다. 어찌 보면 30%의 전문성에서조차 따져 보면 상당 부분 상식의 기반 위에 작용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의사나 변호사와 같이 외교에서도 일반 상식의 수준이 따라올 수 없는 전문성의 영역이 존재한다. 나아가 위기나 비상 상황에서의 판단과 결정에는 위의 70:30의 비율이 역전되어 전문성의 비중이 70% 이상으로 높아지게 된다. 날카로운 전문성의 미세한 개입이 위기 해결에 결정적 차이를 가져오는 경우가 외교 분야에서 허다하다.

요즘의 세태는 전문성 높은 의제에 대해 백가쟁명(百家爭鳴)식 주장이 난무하나 정작 전문성이 필요한 악마의 디테일에 관해서는 거친 감성적 논리가 요란한 목소리를 내면서 전문성을 밀어내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강제징용 해법에 반대하거나, 자체 핵무장을 주장하거나, 중국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한미동맹 강화에 냉소적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그러한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의 모토는 “도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잠언 11장 14절)다. 평안은 오늘날 국민의 안녕과 국가안보를 뜻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국가안보를 지키는 데는 전문성이 갖춰진 많은 모사(many advisors)의 도략(guidance)이 필요하다.  - 김숙, 21세기 대한민국의 외교, <자유와 시장-석학들에게 답을 얻다>, 김병준 외 16인, 조명문화사, 257~292쪽, 2023. 8.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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