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5월 꽃게 - 어머니의 아릿한 손길이 숨어있는
5월 저녁이면 모란이나 장미 등속이 숨 막히도록 붉게 벙그러진다지만, 어린 시절 나의 눈에는 그것보다 더 탐스러운 물건이 있었다. 식구들이 저녁상에 둘러앉으면 꽃게는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였다. 돌처럼 창백한 회색빛 갑주(甲胄)가 익어가며 붉은 자태로 변해가는 모습은 어린 눈에는 차라리 마술에 가까운 것이었다. 흡사 꽃잎이 익어가듯 붉게 돌변한 껍질을 버그러뜨리면 또다시 그 안에서 주황빛 장들이 쏟아져 나오며 어린 나의 후각을 강하게 자극하였다.
단지 익히는 것만으로 이렇게 빛깔과 향기가 돌변하는 음식은 꽃게찜이 단연코 으뜸이 아닐까 한다. 물론 꽃게라는 말의 어원이 바닷가에 툭 튀어나온 지역인 ‘곶’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지만, 붉은 껍질과 흰 속살의 대비 그리고 그 가운데 꽃술처럼 가득 찬 황장은 차라리 꽃대궁에 가깝게 보인다. 그러니 굳이 ‘꽃’게라는 어여쁜 이름에 대고 ‘곶’ 게라는 본명을 들이대는 것은 전혀 마진이 남지 않는 섭섭한 장사라고 해야겠다. 맛으로 제철 음식을 고른다지만, 거리에 벙그러지는 꽃과 자태의 우열을 경쟁하는 짐승이라니, 꽃게는 그야말로 5월이 제격인 음식인 셈이다.
까닭에 오월을 만끽하기 위하여 우리는 오늘 두 모녀가 운영한다는 꽃게탕집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게장과 탕을 시켜놓고 예부터 꽃게로 이름 높은 저 소래포구 이야기와, 그 소래포구 시장을 가기 위해 지나다녔던 바닷가 벼랑길 수인선 협궤 철로 이야기는 단연 화제에서 빠질 수 없었다. 나는 어릴 적이라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건넜다지만 연세가 지긋하신 선생들께서는 젊을 적 낭만을 들려주셨다. 그 길은 목숨을 담보로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건너다녔던 곳이니, 사랑이란 참말 협궤선마냥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인지도 모르겠다. 그 목숨을 건 여정을 경험을 하고 시장으로 들어서면 펼쳐지는 게와 새우의 무진장 풍경과 생활의 흥성거림. 목숨을 건 동행이 왕성한 식욕과 생명으로 뒤바뀌는 소래포구 시장의 모습은 인천만의 독특한 체험이 아닐 수 없다.
그 협궤열차 시절만 하여도 꽃게라는 음식은 가벼운 주머니로 해결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니 소래포구에 잔뜩 널린 게 무더기는 더욱 이채로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이전에는 영종도 앞에서 할머니들이 큰 바구니에 꽃게를 잔뜩 쪄서 해수욕을 하던 사람들에게 팔 정도로 인천에서는 흔한 음식이었다. 특히 지금의 인천역을 하인천역이라 호명하던 시절, 게는 서민들의 가장 흔한 밥반찬이었다. 당시에는 일 년 내내 알을 품고 있는 게를 ‘두랑게’라 불렀다. 흔히 새끼를 낳지 못하는 암소를 ‘두랑소’라 부르는데, 인천 앞바다에 잡히는 게들은 일 년 내내 장이 차 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 바로 두랑게이다.
이 두랑게를 간장도 귀하던 시절이니, 드럼통에 가득 쌓아놓고 소금물에 절여놓으면, 도시락통에 밥만 담아온 노동자들이 너도나도 도시락 뚜껑에 한 마리 씩 담아가서 반찬 소용을 하였다. 비릿한 내장으로 노동의 원기를 북돋는 소중한 음식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원래 인천 게장의 한 원형은 지금처럼 간장과 온갖 재료가 들어간 값비싼 음식은 아니었던 것이다. 가장 간단한 소금물로 짜게 절여 먹던, 게장이 아니라 ‘게젓’에 가까운 것이었다. 비릿하고 달큰한 그 살점은 모두 생활의 소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꾸밈없는 실용 그 자체였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찾은 가게의 주인은 그런 게젓과도 같은 풍모의 분이셨다. 딸에게 삶의 방편을 전수해주기 위해 자신의 속살을 내어주시는 분이었던 것이다. 게장이나 꽃게탕이야 워낙 미식으로 이름 높은 음식이라 당연히 나이가 지긋한 주인이 운영하실 줄 알았는데, 음식점에 들어서자 당찬 삼십대 젊은 사장이 우리를 맞아주셨다. 그래 그 내력을 물어보니, 젊은 주인은 인천 토박이이고, 음식을 전수해주신 어머니는 전라북도 부안 출신이시란다. 홍상(홍어와 상어) 장사를 하셨던 어머니에게 음식을 전수 받고 이제는 다시 그 음식을 딸에게 대물림해준 것이 이렇게 장사의 든든한 밑천이 된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이 집은 게장과 홍어를 같이 파는 독특한 업태를 선보였다. 통상 이런 꽃게 음식점이라고 하면 인천에 워낙 충청도 내력의 사람들이 많으니 으레 주인은 태안이나 서산 출신인가 싶은데, 꽃게 옆에 떡하니 붙어 있는 홍어 간판이 두 모녀의 내력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었다. 열다섯 살 때부터 면도칼로 홍어 껍질 까는 것을 배웠다는 주인의 어머니는 인천에서 온갖 삶의 풍상을 다 겪으신 모양이다. 먹고 살기 위해 아이를 가진 몸으로 검암에서 모심기까지 하였다고 하니, 그 어머니의 삶이란 그 특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른바 ‘탈탈길 인생’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탈탈길이란 무엇이냐. 전북 부안에서 인천 구월동으로 시집을 왔을 당시에는 아스팔트는커녕 자갈로 된 길이 전부였던지라, 이 자갈길을 탈탈길이라 부른 것이다. 여전히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했던 시절이었다고 하니 인천에서의 삶이란 자갈길, 말 그대로 탈탈길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장성한 딸이 삶의 방편으로 음식점을 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음식 장사부터 안 해본 것이 없는 어머니가 그 뒷일을 도와준 덕분에 무사히 가게는 성업 중이란다. 비록 꽃게를 경매부터 시작하여 능숙하게 매입하고 다루는 일은 젊은 주인의 몫이요, 요즘 사람의 입맛에 맞게 게장의 양념을 연구한 것도 딸의 성취라지만, 이 탈탈길 어머니의 노하우야말로 이 집 음식이 지닌 깊은 진미가 아닐까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꽃게탕과 게장도 미식에 값하는 맛이었지만, 밑반찬으로 내어준 조기 한 마리도 간이 삼삼하여 입에 붙는다. 특히 여기서 먹어본 홍어찜은 삭히지 않은 암놈으로만 골라 절제된 양념으로 쪄내는데, 그 부드러움이 특미라 권할만 하다. 과연 이런 음식은 젊어서 홍상 장사로 홍어 손질에 도가 트신 어머니의 관록이 묻어난 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젊은 주인도 탈탈길 어머니만큼이나 왕성한 생활력의 소유자였다. 일 년 치 꽃게 수매부터 그물 떼기 작업까지 직접 다한다는 말에는 자못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그 미더움을 좀 더 알아보려고, 꽃게 값이 너무 비싸 먹을 수가 없다는 볼멘소리를 슬쩍 해보았다. 작년 2020년도는 가뜩이나 비싼 꽃게가 유래 없이 고가에 시장에 나왔기에 먹고 싶어도 보통 사람 주머니로는 언감생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젊은 주인은 여기에 명쾌한 답을 주었다. 이유는 놀랍게도 코로나 때문이란다. 보통 우리가 쓰는 꽃게잡이 그물은 중국에서 만드는데, 사실 중국도 이 그물 작업을 북한에 하청을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작년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나서, 중국은 물론이요 북한 역시 빗장을 더욱 굳게 닫아버렸으니 선주들은 그물을 구할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조업을 포기한 것이었다. 코로나라는 고약한 역병 덕분에 저 연평 앞바다의 꽃게들은 활개 치며 천수를 누렸겠지만, 서민의 식탁은 더욱 야위게 된 것이다. 여러모로 2020년은 코로나를 빼고는 말할 수 없으니, 꽃게의 수명과 가격마저도 코로나 국면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여기라고 예외일 수 없었을 텐데, 음식점 한구석에 잔뜩 쌓인 포장 박스를 통해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꽃게란 어떤 음식인가? 맛은 있어도 친하지 않으면 도저히 한 상에서 같이 먹기 힘든 음식이 꽃게이다. 두 손으로 잡고 껍질을 바르고 살점을 입으로 빨아야 하기에 역시 어색한 사람끼리는 쉽게 먹을 수 없는 음식이다. 반대로, 꽃게를 함께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말 그대로 흉금 없이 정답게 지내는 사이라는 역설도 통한다는 의견에 우리는 무릎을 쳤다. 그래서일까, 전염병이란 인간의 친밀감과 정다움을 매개로 더욱 기승을 부리는 고약한 놈인지라, 이 집도 오월 게맛이 서러울 정도로 손님이 많지는 못했다.
하지만, 배달과 방송 판매까지 판로를 알아보며 가게를 운영한다는 젊은 주인의 말을 듣고는 과연 탈탈길 어머니의 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어머니가 전수해준 것은 음식의 맛만이 아니라, 어려운 탈탈길을 헤쳐 나가는 지혜까지 포함된 것이리라. 그러기에 나는 전면에 나서 당차게 장사를 하는 젊은 주인도 미덥지만, 소금물에 절여 짠내 나는 실용을 맛보여준 ‘게젓’ 같은 풍모의 어머니가 한층 이 가게를 든든히 받쳐준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의견이 맞지 않아 주방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도 있다지만, 이런 것이야말로 모녀가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팀워크일 것이다.
생각건대, 아이 적 꽃게는 벙그러지는 꽃처럼 아름다운 음식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은 아릿한 음식이기도 하였다. 집게발 속의 살이 더욱 달큰하다며 어머니는 늘 날카로운 집게를 바르기에 여념이 없으셨다. 그리고 그 한 줌도 안 되는 살을 악착스레 받아먹는 사이에 나는 수염이 나고 염치라는 것을 조금 배우게 되었다. 단단한 갑주를 벗겨내고 연한 속살을 꺼내주는 동안, 당신은 그 날카로운 집게와 씨름하셨다는 생각을 하면 내 유년의 꽃게 맛에는 달보드레하면서도 조금은 아릿한 맛이 숨어있다.
하물며 탈탈길을 걸어오며, 온갖 풍상을 견뎌온 경험을 전수해주신 저 주인의 어머니는 그야말로 게젓의 풍모 바로 그것일 테다. 단단한 제 갑주에서 가장 실하고 달큰한 살점을 자식에게 떼어 먹이는 무쇠 같은 집게 손. 억척스럽지만 그만큼 자식에게는 보드라운 속살을 내어주는 것이니, 오월 꽃게가 꽃처럼 아름답다고 하여도 이 어머니가 꺼내주는 성찬(盛饌)에는 도저히 견주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