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청관(淸館)
청국조계지(淸國租界地).
당시 사람들은 ‘청관’이라고 불렀고
오늘날 ‘차이나타운’이라고 부르고 있다.
1883년 개항이 이루어지던 그해 9월 일본은 ‘조계차임약정서’를
다른 열강보다 앞서 조인하고 제물포 바닷가와 응봉산 사이 중심지에
일본 전관 거류지를 설정하는 등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자
청국도 경제적 이권을 챙기기 위해 서둘렀다.
체결된 ‘인천화상조계장정’에는 자유공원 서남쪽
현 선린동 일대 5,000여 평에 이르는 지역으로 지계가 명시되었다.
조약 체결 후 수많은 화교가 몰려들었고 그들만의 전통 마을을 조성하였다.
중국인들은 대부분 벽돌조 점포주택을 지었는데
초기에는 벽돌을 수입에 의존하다가 벽돌성형기를 들여와
벽돌을 제조하여 공급하므로 청관거리는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였다.
치외법권 지대였던 청국조계지가 번창한데는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임오군란을 진압한 청나라의 원세개가
버티고 있었으니 청상들은 무역에 탄력을 받았고 기세도 등등했다.
하지만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화교들의 세력은 급격히 축소된다.
청나라의 지원이 단절되자 다수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소수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1898년, 청국영사관이 재개되고 청관거리는 다시 활기를 띄는 듯 했지만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의 주권은 일본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조선은 점령되었고 조계제도는 폐지되었다.
일제강점기,
조계지는 폐지됐어도 그곳에 거주하던 많은 수의 중국인들은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눌러앉아 화교사회를 형성하였다.
돈을 목숨처럼 여기는 사람들 아니던가
선천적으로 장사 수완이 뛰어난 그들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해내었다.
인천에 진출해 있던 중국인은 무역상 외에도 농사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화농(華農)이라고 불렀다.
산동성에서 채소 씨앗을 가지고 들어와 채소농사를 시작했다.
1920년대 초 인천 야채 소비량의 70%를 화농이 공급했다고 한다.
식료품, 잡화류, 요리집 등 기존 점포들 중에
특히 상당한 규모를 갖춘 중국인 포목상이 많았는데
비단을 비롯한 포목들이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슬기롭게 극복하는 기질로 침체된 경기를 되살리고
두뇌가 빠른 장사 수완으로 부를 축적했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에서 비단장수 왕서방은 중국인의 대명사로 쓰였는데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8년, 고 김정구씨가 부른 ‘왕서방 연서’가 이 대목을 대변한다.
내용은 비단 장수 왕서방이 조선 기생한테 반해서 전 재산 다 털리고도 좋아 죽겠다는 내용.
당시 화교들의 돈에 대한 집착과 이들이 쌓은 부가 어느 정도였는지 엿볼 수 있다.
실제로 화교들은 이런 집념을 바탕으로 1950년대 말까지도 한국경제를 쥐락펴락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칼날에 묻은 피도 핥는다’는 중국의 거상 호설암의 한마디는
중국인들이 돈에 부여하는 가치 척도를 잘 보여준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에 눌려 있던 중국인들의 세력은 급격히 성장했다.
더 많은 산동 사람들이 인천으로 몰려왔고 적산가옥을 손쉽게 구했다.
일본인이 물러간 자리는 이제 중국인이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 6.25전쟁으로 인해 전화(戰火)로 엄청난 타격을 받는다.
전쟁 이후 중국인 특유의 극복 기질로 차이나타운을 재건하였고 오늘에 이른다.
개항기 청국조계로 부터 시작하여 격동의 시대를 거치며 오늘에 이른 화교사회,
혈통은 다르지만 같은 땅에서 같은 슬픔과 기쁨을 겪고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며
함께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