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시설을 언뜻 보면 사람이 사후에 갈 수 있다는 산소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 정체를 알고 보면 180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천 강화군 교동도(행정구역상 교동면)의 ‘옛 한증막’이 지역 사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교동의 옛 한증막은 고구리, 봉소리, 서한리 등 3곳에 흩어져 있다.
고구리에 있는 한증막은 원형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둘레 45m, 지름 15m, 높이 3m 크기로 어른 10여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규모다. 원래는 황토와 돌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황토가 비바람에 씻겨내려가 지금은 돌만 남아 있는 상태다.
주민들은 “어릴 때 동네 어른들이 불을 지펴 한증막에서 목욕을 즐기는 것을 보았다”면서 “동네 어른들은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으며 1960년대 말까지 주민들이 사용했다”라고 말한다.
서한리 한증막은 조선(造船·배를 만들던 곳)골에 있으며 크기는 둘레 30m, 지름 10m, 높이 2.5m 규모로 고구리에 비해 작은 편이다.
봉소리 한증막은 은합산이 시작하는 아래 부분에 위치해 있으며 크기는 서한리 한증막과 비슷하다.
한증막 3곳은 모두 산에서 맑은 물이 내려오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민들은 교동에 조선시대 안평대군, 연산군, 광해군, 임해군 등 왕족이 유배를 왔고 특히 안평대군과 연산군은 이 곳에서 생을 마감해 한증막이 이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아울러 고려 인조 때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등 3개도를 관할하는 ‘삼도 수군 통호사’가 교동에 있어 상당수의 군사들이 주둔했다는 점을 들어 한증막이 이 때부터 생겼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향토사학자 이강성(82)씨는 “한증막이 언제 생겼는지 알 수 있는 문헌은 현재 없다”면서 “교동지역 산의 나무들이 잘려나가면서 땔감이 필요한 한증막의 운영이 어려워져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교동면 사무소는 옛 한증막이 문화적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 최근 한증막 입구에 안내판을 세우는 등 관리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