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향로는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높이 61.8㎝,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이 표현되어 있다. 이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 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몸체는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킨다. 연잎의 표면에는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 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들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 영향을 받은 듯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독립적·입체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작 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 주는 귀중한 작품이라서, 많은 전문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향로'라고 설명한다.
강우방선생은 그의 저서 <한국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신품神品이다. 백제 고유의 비례감각, 우주에 충만한 듯한 생명감, 그리고 완벽한 기술이 어우러져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향로가 이 땅에서 탄생했다. 중국에 수많은 사유상이 있지만 백제의 사유상 (국보 제83호, 5편에서소개) 하나를 당할 수 없으며, 중국에 수많은 박산향로가 있지만 이 하나를 당할 수 없다. 절대의 형태다."
비화에 의하면 위 금동대향로를 처음 발견 시, 한편으론 긴장감이 감돌았으며, 세계에서 처음보는 경이로운 예술품이라 우리나라 것이라고 단언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는 전문가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백제대향로는 국민적 관심과 함께 백제문화 저력을 대표하는 명품문화재로 자라매김하였다.보존처리를 거쳐 잠시 일반 공개 후 1996년 5월 국보로 지정되었고 이후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이러한 향은 특히 고온다습한 기후로 말미암아 몸에서 냄새가 많이 풍기는 인도에서 크게 성행하였는데, 손님을 맞이할 때에는 나쁜 냄새의 기운을 없애기 위하여 마당에 향즙을 뿌리고, 향을 몸에 바른 뒤에 맞이할 정도로 널리 쓰였다. 이와 더불어 향은 마음의 때까지도 말끔하게 씻어 준다 하여 마침내는 불교의 설법장소에까지 즐겨 사용되었다.
향을 사용하는 방법에는 크게 도향과 소향의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도향이란 명향 가루를 깨끗한 물에 혼합하여 몸에 바르는 방법을 말하고, 소향이란 도향의 방법과는 달리 향을 불살라서 쐬는 방법을 일컫는다. 이 두 가지 방법 중 소향의 방법에는 향을 담아서 불을 사를 그릇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니 그것이 곧 향로이다.
향로는 크게 일반적인 향로와 불교적인 향로로 구분되는데,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일반적인 향로와는 달리 불교적인 향로는 불보살에게 향을 공양할 때 사용되는 도구이다. 불구의 하나인 이 향로는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에서 비롯된 공양구로 향로 1, 촉대 2, 화병 2의 3개 품목 5개를 1조로 하는 오구족 중 가장 으뜸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처럼 여러 공양구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향로는 중국에서는 주나라 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한대에는 박산형의 향로가 크게 유행한다. 그 뒤 남북조시대에는 불교적 향로인 병향로가 발전되었고, 수와 당을 배경으로 한 정형·삼족형·화사형 향로 등은 송·원·명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불교를 공식적으로 수용한 이후 우리 나라는 삼국이 모두 수많은 사찰을 건립하였던 사실로 미루어 향공양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며, 향로 또한 일찍부터 전래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박산형향로와 병향로가 한두 점 전하여 올 뿐 그 유례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어떠한 형태가 크게 유행하였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고구려 쌍영총벽화의 귀부인행렬도, 단석산신선사마애불의 공양상,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 등에서 보이는 향로의 모양으로 미루어 당시에는 병향로가 주류를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또한 1993년 12월에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의 능산리 왕궁터에서 백제유물 450여점과 함께 백제향로가 발굴되어 백제 금속공예술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이렇게 금속공예의 발달과 함께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조선시대까지의 향로의 기본형태를 이루고 있는 청동제고배형 향로가 출현하게 되는데, 넓은 테두리가 둘러져 있는 밥그릇 모양의 몸체와 위는 좁고 아래는 넉넉한 나팔모양 대로 구성되어 있다.
향로는 만드는 재료에 따라 크게 토제·도제·금속제·석제·목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삼국 이후 통일신라시대까지는 주로 토제향로가 성행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청자와 청동제 향로가 많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유교가 득세하였던 조선시대에는 불교적 향로보다는 일반 제기로서의 백자와 유제 향로가 널리 애용되었다.
향로는 그 형태에 따라 거향로· 병향로· 현향로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거향로란 어떠한 지정된 장소에 배치하여 향을 공양하거나 쐬는 데 사용되는 것으로서 박산형·정형·삼족형·장방형·원통형·상형·고배형 등이 이에 속한다.
이것과는 달리 병향로는 안치하기보다는 손에 들고 다니기에 좋도록 거향로에 20∼30㎝ 가량의 손잡이가 달려 있는 것을 말하며, 현향로란 방이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걸어둘 수 있게 밑이 둥근 그릇에 고리가 달려 있는 것을 가리킨다.
이들 향로는 다시 용도에 따라 예배용·완향용·의식행렬용 등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예배용 향로는 불보살에게 향을 공양하기 위하여 불단에 안치하는 것을 말하며, 완향용 향로는 향을 사름으로써 세속의 모든 냄새와 함께 번뇌와 망상을 사라지게 하고 청정한 법열의 삼매경으로 들어가게 한다 하여 불교의식보다는 수도자 자신의 개인정화에 더 큰 목적을 두어 주로 승방의 서안에 놓거나, 벽 또는 기둥에 걸어두는 것이다. 그리고 의식행렬용 향로란 불보살을 예배하거나 의식행렬을 선도할 때 사용되는 것을 일컫는다.
이 중 삼국과 통일신라시대의 토제고배에 기원을 두고 있는 고배형 향로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예배용은 불전에 배치되는 것이니만큼 매우 소중하게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향로를 조성함에 있어서도 향도의 지극한 정성과 최고의 기술이 깃들이고, 일반 공예품과는 달리 중요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불단용 향로에는 다른 용도의 향로와는 다르게 부처님께 올리는 발원문을 새기는 것이 하나의 뚜렷한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발원문은 은입사나 선각, 또는 점각으로 되어 있으며, 명문의 내용은 보통 발원과 함께 제작 연대와 제작자, 봉안 사찰 이름, 조성에 소요된 청동의 양, 향로의 명칭 등을 기록하고 있다.
향로의 명칭으로는 향로 외에도 화완·향완 등이 쓰이는데, 향로란 기형에 관계없이 향공양구를 통틀어 말하는 것이고, 화완과 향완은 밥그릇모양의 몸체에 나팔모양의 높은 대를 갖춘 고배형만을 한정하여 이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인 구조가 원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고배형 향로는 개부와 신부·대부의 3부로 구성되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뚜껑이 사라지고 각 부에서도 세부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고려 전기는 대체로 세련된 곡선으로 타원형의 몸체와 날씬한 기형을 창출해 내고 있는 반면에, 고려 후기 이후부터 조선시대까지는 신부가 둔중하고 직립된 원통형과 밑부분이 배부른 형태로 바뀌어 간다.
향로의 비례 또한 고려시대 전기에는 전체의 높이와 입지름의 비율이 거의 같아 정방형의 균정된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지만, 후기 이후에는 향로의 대가 단축되고 입지름이 확대되어 안정감이 결여됨을 볼 수 있다.
몸체와 대의 결구방법은 대 정상의 돌기로써 연결하는 방법과 이와 반대로 몸체와 함께 조성된 밑바닥의 돌기를 대의 원공에 삽입하여 고정시키는 방법, 그리고 몸체와 대의 구멍을 관통시켜 결속하는 방법과 별도의 많은 못으로써 대부와 신부를 부착시키는 네 가지의 방법이 있다. 대체적으로 소형과 중형의 향로는 몸체와 대의 분리가 쉽지 않도록 고정시키고, 대형의 향로는 몸과 받침대가 쉽게 분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세부적인 변화와 함께 12세기에 들어서면 새롭게 본래의 고배형에 은입사의 문양을 넣은 청동제은입사향로가 탄생한다. 이것은 상감청자의 발생과 금선고려불화의 등장과도 관련이 있으며, 왕실귀족 중심의 고려 불화와도 연관이 깊은 것으로 당시의 귀족적인 아취를 충분히 나타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가 크게 쇠락해 버린 조선시대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그 찬란하였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이러한 은입사향로에 문양을 넣는 방법에는 은실을 사용하여 입사하는 선상감법과 은판을 이용하여 상감하는 판상감법이 있는데, 이 중 선상감의 방법에는 세선과 태선 두 종류가 있다. 세선은 태선에 선행하여 모든 문양의 근간을 이루는 선으로, 고려 전기 향로의 문양이 거의 세선 위주인 것과 잘 부합된다. 이어서 등장한 태선은 문양의 강조하여야 할 곳에만 사용되어 조식의 효과를 증대시킨다.
고려 전기의 문양은 세선 위주의 정교하고 치밀한 부드러운 선으로 간단명료하면서도 다분히 회화적인 성격을 띤 반면에, 후기 이후의 문양은 둔화되고 가냘픈 선으로 복잡하면서도 도식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매우 다양한 양상을 띠며 명문을 지니고 있는 향로는 불교금속공예의 연구에 중요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직제와 사회상, 그리고 불교미술의 전반적인 흐름까지도 짐작하게 해 주는 것으로, 우리나라 미술사상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하다.
현재 국내에 전하여 오는 고배형 청동향로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비록 은입사는 되어 있지 않지만 제작 연대가 가장 빠른 황통 4년(1144) 명의가 있다. 은입사향로로는 대정 17년(1177)명 표충사소장 청동은입사향완과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지정 4년(1344)명 중흥사은입사향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