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산수풍물]대구 도동서원 토담 재조명해야
도동서원은 조선 5현의 첫머리에 차지하는 문경공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선생의 도학을 계승하기 위하여,퇴계 이황과 한강 정구 선생의 주도로 유림의 협조를 받아 세워졌다. 도동서원은 1607년 선조 대왕 40년에 도동서원으로 이름 지은 현판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2년(1865) 흥선 대원군이 서원을 정리할 때에도 한훤당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문을 닫지 않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64년 선조 원년(1568)에 비슬산의 두 골짜기 물이 합쳐지는 당성군 유가면 쌍계리 초곡천 산기슭에 세운 쌍계서원이다. 선조 6년(1573) 임금이이 서원에 에 필요한 현판과 책을 하사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때 왜병의 방화로 불타고 말았다.
그 후 선조 38년(1605)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워 보로동서원이라 하였다 2년후 나라에서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으로 도동서원이라 이름지어 사액하여, 마을 이름도 도동리라 고쳐 불렀다. 선생은 전라도 순천시의 옥천 서원을 비롯한 전국 6도 15개 서원에서 향사 받았지만, 선생이 성장하시고 묘소를 모시고 있는 연고지의 도동 서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서원은 일인일사의 원칙으로 모두 문을 닫게 되었다.
1962년에 사당과 중정당 및 토담이 보물 350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토담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우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되었다. 도동은 성리학의 도가 처음으로 동으로 건너 오다 라는 뜻으로, 조선에서 도학이 이제 시작되었다는 자부심이 넘치고 있다.
일찍이 선생이 남명 조식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에게 도학의 으뜸스승으로 존경받았을 만큼, 조선에 처음으로 도학의 시대를 열어 주셨다. 우리나라의 도학은 포은 정몽주에서 시작하였고, 김굉필 선생은 포은의 도학을 조선에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도통론에 바탕으로 두고 있다.
김굉필선생의 본관은 서흥 자는 대유 호는 사옹 한훤당. 예조참의 중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의영고사소형이고, 아버지는 충좌위사용 유(紐)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로 중추부사 승순의 딸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다. ≪소학≫에 심취해 ‘소학동자’로 불리었다. 선조는 서흥의 토성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으로 성장했는데, 증조부인 사곤이 수령과 청환을 역임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에 이주하면서 그곳을 주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할아버지인 의영고사 소형이 개국공신 조반의 사위가 되면서 한양에도 연고를 가지게 되어, 그는 할아버지 이래 살아오던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자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그를 보면 모두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분발해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근기 지방의 성남·미원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주로 영남 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처가), 성주의 가천(처외가) 등지를 내왕하면서 사류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이 때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소학≫에 심취해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었고, 이에서 받은 감명을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해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 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이후 평생토록 ≪소학≫을 독신하고 모든 처신을 그것에 따라 행해 ≪소학≫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했고 육경을 섭렵하였다.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때에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 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이 이학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로 천거해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전생서참봉·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이 되었다.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80대와 원방부처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써, 희천에서는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지면서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사림파의 개혁 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 구축과 인재 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되어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다.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 컸다. 그 결과 1517년(중종 12) 정광필(鄭光弼)·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 등에 의해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도학을 강론하던 곳에 사우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그의 문인들이 피화되면서 남곤을 비롯한 반대 세력에 의해 그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에 대한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뒤 그를 받드는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 건의가 계속되었다.그리하여 1575년 영의정 추증, 1577년(선조 10) 시호가 내려졌으며, 1610년(광해군 2)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해 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과 함께 오현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학문적으로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김종직을 사사한 기간이 짧아 스승의 후광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와 교육적 공적이 더 크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사우들 가운데에는 사장에 치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정여창과 함께 경학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성향으로 인해 ‘치인’보다는 ‘수기’에의 편향성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현실에 대응하는 의식에서도 그러한 성격이 잘 나타나, 현실상황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는 자세는 엿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20여 인에 달하는 문인들은 두 차례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나아가 유배지 교육 활동을 통해 더욱 보강되어 후일 개혁 정치를 주도한 기호계 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되었다.≪소학≫에 입각한 그의 처신, 복상·솔가 자세는 당시 사대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한훤당의 가범’으로 숭상되었다. 후학으로는 조광조·이장곤·김정국·이장길·이적·최충성·박한공·윤신 등이 있다.
아산의 인산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희천의 상현서원, 순천의 옥천서원, 현풍의 도동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한훤당집≫·≪가범 ≫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이다. 따라서 대구야말로 처음으로 도학이 뿌리를 내렸던 도학의 발생지로 말할 수 있다. 비로소 조선의 성리학은 학문보다는 인격 수양을, 지식보다는 실천을 더욱 강조하는 우리의 독창적인 학문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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