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동(京洞) - 싸리재 따라 서울가던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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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京洞) - 싸리재 따라 서울가던 동네
  • 배성수
  • 승인 2012.11.23 02:0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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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배성수 /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과장

싸리재

개항이후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외국인들은 뱃길 또는 육로를 이용하여 서울로 향했다. 물이 찰 때를 기다려 뱃길을 이용한다면 서울까지 걸리는 시간이야 훨씬 빨랐겠지만, 조수를 맞추어 운항해야 하는 불편함과 12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4개월 동안은 한강의 결빙으로 운항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육로를 이용하였다. 개항장을 출발한 사람들이 경인가로에서 만나는 첫 번째 고개가 싸리재이고 이 고개를 품고 있는 동네가 ‘경동’이다.

 

싸리재[杻峴]로 몰려든 사람들

경동사거리에서 배다리로 이어지는 완만한 고갯길을 싸리재라 부른다. 전하는 바로는 고개 주변으로 싸리나무가 많아서 싸리재라 불렀다는데 언제부터 이 고개를 싸리재라 불렀는지 알 수 없다. 개항장 주변지역이 모두 그러하듯 조선시대 인천도호부 다소면 선창리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불렀을 뿐이며, 개항 초기의 여러 기록에 나타나는 것처럼 민가도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개항 이후 각지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개항장으로 몰려들었지만, 조계지역을 외국인들에게 내어준 조선 사람들은 개항장 바깥 쪽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서울로 가는 길목에 있었던 까닭에 싸리재는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일찍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무렵 이곳은 싸리재의 한자표현인 축현(杻峴)이라는 이름으로 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중국인에 밀려난 싸리재의 조선인

1886년 5월 청의 총리교섭통상대신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인천의 청국조계가 비좁아 더 이상 집지을 만한 곳이 없으니 삼리채(三里寨) 지역에 새로운 조계지를 설정해 줄 것’을 조선정부에 요청하였다. 1887년 7월 조선정부는 청국과 ‘삼리채확충화계장정(三里寨擴充華界章程)’을 체결하고 삼리채 지역에 청국조계를 확충하기로 결정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삼리채 지역이란 싸리재 주변과 신포동 일부를 포함하는 것으로 전체 규모는 대략 3,850여 평에 달했다. 이에 따라 중국인들은 개항장 내 자신들의 조계지를 벗어나 이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면서 싸리재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자연스레 이곳에 터를 잡고 살던 조선 사람들은 중국인들에 밀려 하나둘 배다리 너머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개항장에서 밀려난 조선 사람들은 중국 상인들의 자본 앞에 또 다시 밀려나야 했던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조선 전역에서 청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되었고, 싸리재에 진출하였던 중국인들도 흩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자리는 남아있는 일부 중국인과 조선 사람, 그리고 새롭게 유입된 일본인이 섞여 사는 형태로 변화해간다.

 

싸리재[杻峴] 그리고 삼리채(三里寨)

싸리재 일대가 청국의 또 다른 조계 이른바 ‘청국확충조계’로 조성될 무렵, 중국인들은 이곳을 삼리채라 표기했다. 왜 중국인들은 싸리재를 축현(杻峴)이라 표기하지 않고 삼리채라 했을까? 삼리채(三里寨)를 한자 그대로 풀면 ‘3리의 마을’이라는 뜻인데 이곳에 있던 조선 마을의 둘레가 3리에 달해서 삼리채라 불렀던 것일까? 조선 정부에서도 중국인과 관련된 사항을 기록할 때는 삼리채, 조선인에 대한 기록에서는 축현이라 표기하고 있어 삼리채가 싸리재에 대한 중국인들의 지명이었음은 분명하다. 재미있는 것은 개항장 청국영사관에서 싸리재까지의 거리가 약 1.2km로 당시의 이정법으로 환산하면 3리가 된다는 것과 삼리채의 중국 발음이 싸리재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추정컨대 조선인들 사이에 싸리재라 불리던 이곳에 청국조계를 확충하면서 중국식 지명을 발음도 비슷하고 의미도 적절한 삼리채(三里寨)라 한 것은 아닌가 싶다.

 

 01. 삼리채 청국확충조계(붉은 실선이 싸리재이다) 

내동(內洞)과 외동(外洞)의 경계

청일전쟁 이후 인천항이 날로 발전해가면서 개항장 주변지역도 점차 번화해지고 있었다. 특히 서울가는 길목인 싸리재에는 중국인, 일본인, 조선 사람들이 섞여 살면서 상가와 민가가 밀집해 있었다. 1897년 야쿠시지 지로[藥師寺知朧]가 간행한 '신찬 인천사정(新撰 仁川事情)'에 따르면 외동(外洞)에는 1,560명의 조선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어 개항장 주변에서 조선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여기서 외동이란 싸리재 바깥동네를 의미하는 것으로 싸리재 정상에서 배다리에 이르는 일대를 말한다. 그렇다면 내동(內洞)은 싸리재 안동네를 말하는 것일텐데 당시의 기록에서 내동이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싸리재를 기준으로 ‘외동’이라는 지명이 먼저 생겨났고, 후에 ‘내동’이라는 지명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1905년 을사늑약에 따라 통감정치가 시작되면서 내동과 외동을 합하여 일본식 지명인 경정(京町)으로 구획하였다. 하지만 이곳에 많이 거주하고 있던 조선사람들에게 이곳은 여전히 싸리재와 외동으로 불리고 있었다.

 

조선인들의 번화가 외리

한일병합 후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지금의 동구와 중구만을 인천부로 편제하면서 일본인 거주지역은 일본식 행정구역인 ‘정(町)’, 조선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은 조선식 행정구역인 ‘리(里)’로 편제하였다. 싸리재 주변은 여전히 많은 조선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기에 외리(外里)가 되었고 길 건너 싸리재 안동네였던 내동은 내리(內里)가 되었다. 홍예문을 뚫어 개항장에서 화평동까지 신작로를 건설하고, 답동에서 축현역까지 곧게 뻗은 새 길을 내어도 배다리 밖 조선 사람들은 여전히 싸리재를 거쳐 일터를 오가야 했으며 이 일대는 자연스레 조선 사람들의 번화가로 변해갔다.

 1920년대 싸리재 모습(내리교회 김기범 목사 장례행렬).jpg

“천주당 뾰족집과 길 하나를 사이하고서 불교 포교당이 이마를 마주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요릿집 삼성관(三成館)과 활동사진 애관(愛館), 무도관도장(武道館道場)과 요릿집 일월관(日月館)이 한 자리에 모여 있어서...” 1920년대 대중잡지 '별건곤(別乾坤)'에 묘사된 싸리재 일대의 모습이다. 극장, 요릿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는 대목에서 당시 번화했던 싸리재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애관(愛館)’은 1890년대 정치국(丁致國)이 설립한 ‘협률사(協律社)’가 1921년 이름을 바꾼 영화전용 극장으로 지금까지 영업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다. 애관의 위로는 1918년 김상규가 개업했던 한의원 ‘대제원(大濟院)’이 있었다. 1955년 창업자 김상규가 사망하자 1957년 아들 김태진이 가업을 이어 운영했던 대제원은 별다른 의료기관이 없었던 시절 가난한 조선 사람들을 치료했던 한의원이었다. 이렇듯 조선인들의 번화가였던 싸리재는 1937년 인천의 지명개정에 따라 ‘외리’라는 우리식 이름을 버리고 ‘경정(京町)’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갖게 된
다.

 

1920년대 대제한의원

1929년 인천부지도(파란선 안쪽이 외리).

쓸쓸한 싸리재...

해방이후 싸리재는 ‘경동(京洞)’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여전히 배다리 밖 사람들은 싸리재를 통해 시내를 오갔다. 싸리재 주변의 번영은 지속되어 무슨무슨 ‘라사’라 이름 붙은 양복점과 양장점이 줄지어 개업했고, 비록 단명하긴 했지만 항도백화점과 뉴욕백화점이 들어서기도 했다. 대제원 위로는 기독병원이 새로이 문을 열었고, 영화를 틀어주던 애관 위 돌체소극장에서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있었다. 사람이 모여들고 상점마다 성황을 이루자 고개 마루에는 시내에 있던 상업은행과 조흥은행이 옮겨 와 자리를 잡았다.

 애관극장(1970년대).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사람과 차가 뒤섞여 다니던 활기찬 싸리재의 모습이 쓸쓸해지기 시작했다. 두 개나 있던 은행은 모두 없어져버리고, 양복점과 양장점을 대신해 들어선 가구점들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86년간 명맥을 이어오던 대제한의원도 2004년 간판을 내리고, 인천 제일의 극장이라는 애관의 명성도 세련된 외모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내주어 버렸다. 한산한 싸리재길 뒷골목의 낡은 한옥만이 그 시절 이곳의 번영을 보여줄 뿐이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싸리재를 통해 서울로 가지 않는다. 더 이상 싸리재 너머 시내로 향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의 싸리재는 늘 쓸쓸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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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광 2012-11-27 11:58:11
1970년의 애관 사진은 4.19 이전 사진입니다. 그리고 싸리재를 축현(杻峴)이라는 표기는 한자 사전 찾아보고 글을 쓰신것 인지 의문 입니다. 사철나무와 싸리나무가 같은 것인지 확인이 필요한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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