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전벽해(桑田碧海)'의 땅…"전혀 몰라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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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벽해(桑田碧海)'의 땅…"전혀 몰라보죠"
  • 이병기
  • 승인 2010.05.04 00:0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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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발 따라 … 인천新택리지 ⑨ 중구 영종동


'하늘도시' 건설이 한창인 영종도.

취재: 이병기 기자

'상전벽해(桑田碧海)'.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했다'는 뜻이다. 이 고사성어는 영종동을 한 마디로 설명하는 데 '안성맞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영종동은 변화무상한 곳이다.

영종도는 1654년 송나라 사신이 들렀을 때 제비들이 떼지어 나는 모습을 보고는 '제비가 많은 섬'이라는 뜻에서 자연도(紫燕島)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금은 제비 대신 해외 각국을 오가는 비행기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영종도는 예전에는 영종도와 삼목도, 용유도, 신불도 등 각각의 섬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92년부터 인천국제공항 건설을 위해 섬 사이 간석지를 매립했고, 1700만평의 부지를 조성해 4개의 섬이 하나로 이어진 지금의 영종도를 탄생시켰다.

농사를 짓던 경작지는 누런 황토로 뒤덮이고, 그 위에선 포크레인과 중장비들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논두렁길, 울퉁불퉁한 자갈길은 반들반들한 아스팔트 도로로 변신했다. 뱃터와 포구에서 열리던 즉석 어시장과 횟집들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육지로 '배'를 타고 나가 유학을 가던 시기는 끝났다. 이미 차로 다닐 수 있는 고속도로가 두 곳이나 건설됐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는 강화도까지 차편을 이용해 오갈 수 있다고 한다. 서울과 연결된 전철도 생겨났다. 운서동 신도시에는 수 많은 아파트와 고층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푸른 바다가 누런 땅으로 변하고, 논밭이 고층 건물로 바뀌고 있는 영종도다.


고기잡이 채비를 하고 있는 어민.

영종동(행정동)은 중산동과 운남동, 운서동, 운북동의 4개 법정동과 유인도(영종본도, 운염도) 2개, 무인도(수수데기섬, 노랑섬, 장구도, 매도, 소운염도) 5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구에서 가장 큰 71.56 ㎢의 면적을 지닌 영종동은 인구 또한 2만6600여명으로 구에서 가장 많다.

그러나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영종동의 인구는 8천여명에 불과했다. 2001년 인천공항 개항과 2003년 인천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인구가 급속도로 늘기 시작했다. 작년 한 해만 3천여명의 주민이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운서동에 위치한 신도시에는 1만7천여명의 주민이 거주한다. 나머지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중산동과 운북동, 운남동에 분포해 있다. 

세계 속의 영종이 되기를…


조삼임 할머니가 중구농협 앞에서 가재를 팔고 있다.

중구농협 앞에서 빨간 고무 양동이에 가재를 팔고 있던 조삼임(71, 운남동) 할머니를 만났다.

25년전 가족과 함께 영종도에 정착한 조삼임 할머니. 예전 포구가 제기능을 할 때는 어선에서 고기를 잡아오면 바로 작은 어시장이 만들어져 따로 나갈 필요 없이 그 자리에서 다 팔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처음 왔을 때는 돈 벌어 묵기 좋았지. 겨울엔 숭어도 잡고. 숭어가 눈이 밝응께 계속 도망가. 겨울엔 추워서 눈이 어리어리한께 그때 잡는 거야. 우리 아저씨가 땟마 하나로 벌어서 조카들 10명 넘게 공부시켰어. 시내 사람들도 많이 놀러 오고. 사먹으로 많이 왔지. 요즘엔 시장도 없어. 그래서 여기 나와서 파는 거야. 이따 아들이 차로 태우러 오갔지."

대부분의 주민들이 보상을 받고 자리를 떠났지만, 아직도 몇몇 어민들은 허가권을 받아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중산동 4통장을 맡고 있는 김지호(49)씨는 영종도에서 14대째, 400년 동안 조상 대대로 터를 잡아 살고 있다. 김씨 역시 이곳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생활한다.

"예전엔 영종도를 제비가 많다고 해서 자연도라고 불렀지요. 그 이유에서인지 지금은 비행기가 다니는가 싶어요. 어떤  분들은 전라도 사람들이 귀향살이를 하던 지역이라고 말하기도 해요. 또 충청도 당진과 뱃길이 있어 충청도 사람들도 많이 살고 있습니다."


신도시 모습

김지호씨와 그의 딸은 초등학교 선후배다. 김씨가 영종초등학교 53회, 딸은 83회다. 영종초등학교는 1920년 영종공립보통학교로 문을 열어 9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집이 많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무척 많았죠. 농사를 지어야 하니 집마다 7~8명씩 자식을 낳았어요. 그 중에 1~2명은 먼저 하늘나라로 가기도 하구요.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600명이나 다녔어요. 집마다 3~4명은 학교에 갔으니까요. 근데 지금은 아이들이 많이 줄었어요."

예전에만 해도 형편이 괜찮았던 집들은 자녀들을 육지로 '유학' 보내기 일쑤였다고 한다. 김지호씨도 초등학교 5학년때 배타고 유학을 나가 도화국민학교에 다녔다. 예나 지금이나 자녀 교육에 대한 부모들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걸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구읍뱃터

영종동에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공항 직원 등 외지에서 들어오는 인구가 증가하고, 전 지역이 급속도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아파트가 밀집한 신도심과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구도심으로 생활권이 나눠지면서 주민 간 갈등도 생길 법 하다.

"처음에는 원주민들의 거부반응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들과 원주민들이 같이 어울리면서 친근감을 갖게 됐죠. 어떤 이들은 아파트에서 구도심으로 이사를 오기도 합니다. 자연과 함께 텃밭을 일구며 사는 게 좋은 거죠. 주민자치센터를 가 보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함께 잘 어울립니다."

자신이 평생을 살아온 공간이 사라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는 데 대한 아쉬움도 있다.

"고향의 맛이 없어진다는 게 속상하죠. 영종이 세계화에 앞장서야 한다는 데에는 동감하지만,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맞춰가야만 한다는 게 아쉬워요. 하지만 이제는 이런 변화에 적응하고 세계 속의 국제도시 영종을 더 좋은 환경에서 만들어가야 한다는 데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백운산 용궁사가 전하는 것


용궁사

영종도의 대표적 문화재로 꼽히는, 1300여년 전통의 용궁사는 백운산 기슭에 있다.

용궁사는 원효대사가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창건해 백운사(白雲寺)라고 불렸으며, 일명 구담사(瞿曇寺)라고도 했다. 이후 조선 철종 5년(1854)에 흥선 대원군이 다시 고쳐 지어 용궁사라 개칭하고, 고종이 등극할 때까지 이 절에서 칩거했다고 한다. 용궁사의 편액도 흥선 대원군이 쓴 것으로 알려져 더욱 유명하다.

용궁사에 올라가면 느티나무가 있다. 용궁사 창건과 함께 심은 것으로 알려진 이 느티나무 한 쌍은 할아버지 나무와 할머니 나무로 불린다. 나무의 둘레는 5m가 넘으며 높이는 20m에 달한다.


왼쪽이 할아버지 나무, 오른쪽이 할머니 나무다.

나무에 깃든 전설에 따르면 할아버지 나무가 이상하게도 할머니 나무 쪽으로만 가지를 뻗고 있어 옛날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부인들이 용궁사에 지성을 드리러 와서 용황각에 있는 약수를 마신 후 할아버지 나무에 기원하면 아기를 낳았다고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느티나무는 인천광역시 기념물 9호로 지정돼 있다.

나무를 지나 위쪽으로 올라가면 거대한 불상이 보인다. '용궁사 옥부처'로 불리는 이 불상 역시 사연을 지니고 있다.

용궁사 옥불상영종도에 고기잡이로 근근이 살아가는 손씨라는 이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물을 걷어 올리니 조그만 옥부처 하나가 걸려 있었다. 몇번이고 그물질을 되풀이했지만 옥부처가 걸렸고, 어부는 이를 백운사로 가져가 안치했다.

이후 백운사 앞을 말이나 소를 타고 지나면 발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못한 채 서버리고 말아, 사람들은 이 앞을 지나갈 때 내려서 갔다고 한다. 이후 백운사가 영험한 절로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됐다.

조선시대에는 흥선 대원군이 절에 왔다가 이야기를 듣고, 안치한 불상이 용궁에서 나왔으니 사찰의 이름을 '용궁사'로 고치는 게 좋겠다고 하며 현판을 써줬다고 한다.

구읍뱃터와 예단포

예전 학교 'MT'나 친구들과 영종도로 여행을 왔던 사람들이면 누구나 기억하는 장소가 구읍뱃터다. 월미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와 영종도에 처음 도착하는 곳이다. 수산시장과 횟집들이 방문객을 맞이했던 구읍뱃터지만, 이제는 버스정류장만 남아 있다.

수산시장 부지는 그러께 토지보상을 시작해 작년에 칸막이를 설치했다. 이제는 '하늘도시'가 적힌 칸막이 위로 예전 횟집들의 간판만 빼꼼하게 보인다.

'예단포'라는 지명은 '임금에게 예단을 드리러 가는 포구'라는 데 그 유래를 알 수 있다. 예담포, 또는 여담포라고도 불린다. 병인양요때 강화도로 향하던 프랑스군이 상륙해 여인들의 목을 쳤다는 소문에서 '여단포(女斷浦)'로 고쳐 불렀다는 설도 전해진다.


특히 수도권 낚시꾼들에게 인기가 많던 예단포지만, 지금은 개발로 인해 인적이 뜸한 상태다.

예단포 주변은 현재 운북복합레저단지를 조성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포크레인과 대형 트럭 등 중장비들만이 가끔씩 찾아오는 낚시꾼들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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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이아빠 2010-05-04 19:33:50
영종도에 이런 기사가 있다니 뜻밖이네요. 얼마전 다녀와서 괜히 궁금해서 검색해 봤는데, 좋은 기사가 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기사 많이 부탁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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