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난분분하는 날, 우리 ‘아트’하자
상태바
벚꽃 난분분하는 날, 우리 ‘아트’하자
  • 양진채 소설가
  • 승인 2014.04.02 13: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천 문화공간을 거닐다(6) 인천아트플랫폼
 
인천아트플랫폼2.jpg
 
그러니까, 플랫폼. 그것도 우아한 아트플랫폼. 아트플랫폼을 소리 내어 읊조리는 순간 아트적 영감이 아니라 ‘기적소리 슬피 우는 눈물의 플래트홈’의 대전부르스 노래가 먼저 흥얼거려지는 건 웬 일일까? 그러니까 내 아트적 수준은 우아하게 ‘플랫폼’을 발음하는 게 아니라 술 한 잔 걸치고 제대로 꺾어가며 부르는 ‘눈물의 플래트홈’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아트플랫폼’으로 향한다. 여전히 입으로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이 가사가 제대로 맞기나 한 것인지, 일 절인지 이 절인지 헷갈리면서도 그저 흥얼거린다. 봄바람은 차지만 냉기의 느낌이 아니라 청명한 기운을 품고 있다. 황사도 비껴간 날이니 바람, 제대로 맞고 있었다.
아트플랫폼을 뭐라고 소개할까? ‘아트’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걸 보니 뭔가 예술을 하는 곳인가 보다고 생각하면 맞다. 그렇다. 예술을 하는 곳이다. 그런데 사전 지식 없이 아트플랫폼에 와 보면 시쳇말로 썰렁하다. 널찍한 길을 사이에 두고 양 편으로 늘어선 붉은 벽돌로 지어진 단층이나 이 층의 창고 같은 건물,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빔. 길가에 나무가 무성한 것도 아니고 골목길의 다정한 느낌도 없는 멋대가리 없이 무덤덤하게 생긴 열세 동이나 되는 건물들이 들어 차 있다. 물론 입구에 유리로 지어진 근사한 건물도 있긴 하지만 들어가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건물이 100년 전에 곡물 등을 보관하는 바로 그 물류창고, 인쇄소, 일본우선주식회사, 금마차 다방이었다는 얘길 듣는 순간 그 썰렁함은 단번에 숨결로 바뀐다. 비밀을 품은 듯 오래도록 낮은 호흡을 이어 온, 그러나 결코 끊어질 것 같지 않은 호흡. 선 자리에서 시간을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
 
 
인천아트플랫폼1.jpg
 
보리밥조차 제대로 먹기 어려웠던 시절, 전국에서 모인 우유빛깔의 쌀이 일본으로 실려 나가기 위해 창고마다 그득하다. 그 어느 날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푸른 눈의 사람들의 삶이 담긴,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창고를 채우고 있다. 인쇄소에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담긴 책이 등사기로 복사 되고, 모던보이는 금마차 다방에서 한 줄의 시를 읽으며 폐병환자처럼 문학을 꿈꾼다. 변사조차 없는 무성영화의 한 장면이 그렇게 시공간을 초월해 밀려든다. 그렇게 근대 역사의 현장을 붉은 벽돌 한 장 한 장에 고스란히 간직한 건물들이 작가의 작업실, 공방, 자료실, 게스트 하우스, 공연장 등으로 바뀌었다. 근대 개항의 아픔을 딛고 인천 문화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른 것이다.
1900년 프랑스 파리는 만국박람회 때 건설된 기차역을 한때 폐쇄했다가 개조하여 그 유명한 오르세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고, 영국의 현대미술관 테이트모던은 시커먼 석탄연기를 뿜어내던 화력발전소를 개조해 발길이 끊이지 않는 미술관이 되었다는 사실은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떤가. 개발의 미명 아래 구획정리하듯 모두 밀어버리고 더 높게, 더 크게를 외치며 과거의 유물들을 없애지 않았던가. 그렇게 다정다감한 골목길이 사라지듯, 몇 십 년 동안 과거의 유물들이 사라졌다.
얼마 전 효자동 골목길을 걸으며 얼마나 감탄했던가.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들릴 것 같은 단층의 한옥들, 어느 집 마당에서 이제 막 망울지기 시작하던 산수유. 그 골목에 잘 어울리던 갤러리나 카페. 우리나라에도 이런 골목이 남아 있었구나. 아니, 이렇게 오래된 집들과 새로운 건물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구나. 그 골목을 걷는 내내 나는 그 골목이 끝이라도 날까봐 내심 조바심쳤다.
내가 아트플랫폼을 처음 찾은 것은 아직 정식 개관 전에 가진 행사였던 ‘세계 여성 비엔날레’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눈물의 플래트홈’뿐이 모르지만 그렇다고 예술적 향유까지 포기한 건 아니었다. 객관적 예술 평가를 떠나 여러 여성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웠다. 세계의 여성작가들은 ‘여성’이라는 주제를 각자 어떻게 표현해낼까 그게 궁금했다. 열세 개 동에서는 각기 건물의 형태와 크기에 맞게, 그림을, 설치 미술을, 체험을 할 수 있는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작품을 보기 위해 몇 개의 동을 들락날락거리는 동안, 나는 아트플랫폼만이 가진 ‘열세 개’의 건물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문을 열고 그림을 보고 다시 나와 바깥의 공기를 마시고 그리고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고 나가는 그 잠깐의 시간이, 와인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 입을 행구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여러 개의 건물이 모여 있는 아트플랫폼만의 장점이라고 할까. 나 같이 예술적 소양이 없는 사람은 한 건물 안에 전시된 그림을 다 보기 위해 몇 층이고 돌아보다보면 나중에는 지쳐 뒤의 작품들은 건성으로 보기 쉽기 때문이다. 작가와 작품이 헷갈리기도 한다. 그런데 아트플랫폼은 한 주제를 놓고 각 작가의 작품을 좀 더 독립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아트플랫폼의 뒷길로 빠져나가던 골목과도 같은 좁은 몇 개의 개단은 마지막에 얻은 덤이었다.
 
인천아트플랫폼3.jpg
 
개관 후 다시 찾은 아트플랫폼은 예술가와 일반 시민을 위한 보다 다양하고 체계화된 운영을 하고 있어 놀라웠다. 전시뿐만 아니라 레지던시 파일럿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것이다. 전시가 없을 때는 건물을 비워두는 것이 아니라 소규모의 공간들을 작가에게 빌려주고 있는 것이다. 작업 공간이 필요한 작가들이 입주해 작업에 몰두하는데 지금은 서른한 명의 작가가 입주해 있다. 각자의 작업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각기 분야가 다른 화가, 조각가, 사진, 금속, 도자, 전시기획, 비평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작가들끼리의 교류도 이루어지고 있으니 작가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공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아트&디자인 스튜디어’를 운영하고 있어 일반인들이 언제든지 작가의 작업 광경을 직접 관람할 수 있다. 그렇게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보면 말로만 듣던 작가를 직접 마주칠 기회도 있다. 예술인에게는 창작에 몰두하며 다양한 교류를 할 수 있는 예술 창작 발전소로써, 일반 시민들에게는 기획전시나 공연 등을 통해 좀 더 친숙한 문화공간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또한 인천의 특수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다각적인 행사까지 준비하고 있다니 놀라웠다.
 
술권하는.png
 
글을 쓰며 지금은 무슨 공연이나 행사가 있나 보았더니 Analog and Digital Theatre 단체가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와 최서해의 <탈출기>를 연극으로 꾸민 ‘한국근대문학극장’이 이번 주 토요일과 일요일 세 시에 열린다.
소설 <술 권하는 사회>에서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했다오!” 푸념하던 주인공과 <탈출기>에서 고향을 버리고 간도로 갔으나 지독한 궁핍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 ‘박’의 삶이 어떻게 연극으로 탄생할지 자못 궁금하다.
그 다음주에는 ‘칙칙폭폭 인형극단’의 <길, 동무, 꿈 3> 이 펼쳐진다. 아이들 손잡고 자유공원에 올라 벚꽃 구경하고 연극 한 편 보면 딱 좋겠다. 물론 짜장면 한 그릇도 잊으면 안 되고. 이 외에도 입주작가 프리뷰전 등 다양한 전시와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아트플랫폼의 체계적인 운영과 계획, 방향성에 주눅이 든 나는 신파의 한 장면처럼, 들리지도 않는 기적소리를 애타게 찾으며 ‘기적소리 슬피 우는 눈물의 플래트홈’ 흥얼거렸던 것이 부끄러웠다. 뒷길로 빠져나와 차이나타운에서 자장면을 먹고, 역사박물관을 거쳐, 제물포구락부를 둘러보고, 자유공원에 올라 멀리 부두에 정박해 있는 배와 푸른 바다와 홀로 선 섬을 바라보고, 멀리 태평양을 거쳐 왔을 바람을 맞아보는 것도 인천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호사일 터.
벚꽃 난분분한 날이든, 볕바라기 그리운 날이든, 비릿한 바람 냄새를 맡고 싶은 날이면 주저하지 말고 나서라. 눈물의 플래트홈을 흥얼거리면 어떠랴. 도대체 이 그림이, 이 설치물이 왜 ‘아트’적인지 모르면 좀 어떠랴. 그냥 보고 즐기면 되는 것을. 그러다보면 눈물은 마를 테고, 귀동냥 눈동냥이 쌓이면 보는 눈도 좋아질 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