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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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 이재은 기자
  • 승인 2014.04.08 16: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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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날 기념 인터뷰②] 지체장애인 화가 유성우
오는 4월 20일은 제34회 장애인의 날이다.

유엔(UN)은 1975년 ‘장애인 권리선언’을 발표하고 이듬해에는 ‘1981년을 세계장애인의 해로 만들자’고 선포했다. 이후 전 세계는 1981년을 세계장애인의 해로 지키고 있다. 정부는 ˝장애인 복지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촉구하고 장애인을 올바르게 이해하며 장애인의 재활의지를 고취˝할 목적으로 1981년부터 매년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해왔다.
‘어린이 날’이 어린이를 위한 날, ‘어버이 날’이 부모님을 위한 것처럼 ‘장애인의 날’은 장애인을 위한 날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장애인들은 이 날을 축제처럼 즐기지 못하고 집회와 시위를 하며 힘겨운 싸움을 했다. 정부의 장애인복지정책으로 점점 장애인들이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인천in>은 제34회 장애인의 날을 기념해 장애의 아픔을 딛고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분들을 만나 삶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 듣는 시간을 갖는다.<편집자주>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다. 욕창이 생겨서 누구를 만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했다. 언제 건강이 좋아질지 알 수 없었다. 인터뷰를 포기해야겠다고 마음먹을 즈음 유성우 화가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봄날 오후 2시, ‘성촌의 집’ 앞 벚꽃나무에서 하늘하늘 꽃잎이 떨어졌다. 오렌지색 체크남방을 입고 모자를 쓴 화가는 휠체어를 타고 1층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2010년 11월 시청 근처에서 유성우 화가의 첫 전시회가 있었다. 찾아온 사람도 많고 작품도 꽤 많이 팔렸다. 전시가 끝나고 일주일 뒤부터 갑자기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 후 1년 동안 유 화가는 일어나지도 못한 채 자리에 누워있었다. 이후 혼자 몸을 일으키고 뉘일 수 있을 정도가 됐지만 이전만큼 몸이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목발을 짚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 2년 전부터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다.
 
“아예 몸을 못 쓰는 줄 알았어요. 요즘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몸이 좋아지니까 마음도 편해지고 그러네요. 아플 때는 그림을 포기할까도 했는데, 좋아지니까 다시 그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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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우 화가(55). 그는 곰두리 미술대전, 대한민국 장애인미술대전 등에서 입선 10회 이상, 
특선으로는 3회 상을 받았다. 현재 대한민국 장애인 미술협회 회원이다. ⓒ 장덕윤 제공
 
 
유성우 씨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주로 만화를 그렸다. 정식으로 미술을 공부한 적은 없다. 알고 지내던 원장님이 공간을 내줘서 독학으로 공부했다. 원장님이 판본 그림을 갖다 주면 그대로 베껴 그렸다. 혹자는 이게 그림이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
 
순수미술은 84년부터 했다. 공모전에도 냈지만 연거푸 두 번을 떨어지고 나니 그림이 평가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좌절감이 들었다. 그 즈음 장애인 화가를 알게 됐는데 그가 다니는 화실에 찾아가서 곁눈질로 그림을 배웠다. 그렇게 배운 기술(?)을 활용해서 공모전에 출품했고, 입선을 했다. 상을 받으니 희망이 생겼다.
 
“컴퓨터로 공모전 정보를 검색했어요. 미술 공부도 컴퓨터로 했고요. 사이트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 작품도 보고, 인물 구조도 익히고요. 이전에는 보고 베끼는 수준, 묘사하는 수준이었는데 점점 그림이 좋아졌죠. 한번 얼굴을 보면 골격을 기억해서 집에 와서 그릴 정도가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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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인의 사진을 그림으로 그린 것과(사진 위) ‘성촌의 집’ 가족들 모습(사진 아래) ⓒ 유성우 화가 제공
 
 
유성우 씨의 병명은 루마티스 관절염의 일종인 ‘구루증’이다. 보통 사람보다 관절이 커서 어릴 때부터 활동 범위가 좁았다. 나이 먹으면서 점점 더 퇴화되고 활동력이 떨어졌다. 일종의 척추협착증으로, 연골이 사라지고 척추 뼈가 내려앉는 병이다. 뼈와 뼈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면서 위에서 내리 누르는 느낌에 소화도 잘 안 되고, 먹은 게 식도로 올라오는 일도 잦다. 척추협착증이 한두 군데라면 수술을 받았을 텐데 다발성이라 수술을 할 수도 없다.
 
“흔히 새가슴이라고 하잖아요. 가슴이 점점 조여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장기가 눌리는 거죠. 가슴을 펴는 수술은 세계에서 두세 명만 할 수 있대요. 위험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하죠. 지금은 뼈마디마디에 연골이 없는 상태예요. 목뼈와 척추가 없어지는 거죠. 굳어있는 거예요.
 
신장이 안 좋은 지는 오래 됐어요. 일주일에 2번, 장애인 콜택시를 불러서 신장 투석을 받아요. 아시겠지만 한 번 가면 4시간은 기본이죠.”
 
화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지금도 틈만 나면 캐리커처를 그린다. 예전에는 기타도 치고 컴퓨터 앞에 앉아 몇 시간이고 포토샵을 가지고 놀았지만 지금은 힘들다. 유성우에게 그림이란 무엇일까.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에요.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게 하는 힘이고요. 그림만 생각하면 모든 게 풀려요.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어요. 그림만 있으면 돼요.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여기 있는 식구들 얼굴을 다 그려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인물화를 공부하고, 연습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2010년에 전부 완성했고, 그 해에 첫 전시를 했어요. ‘성촌의 집’ 식구들 얼굴 30점하고 기타 추상화 20~25점을 전시했어요. 추상화는 거의 다 팔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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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화로 시작했고, 그림을 조금 알고부터는 수채화를 그렸다. 수정이 힘든 탓에 유화보다 수채화가 더 어렵다. 
ⓒ 유성우 화가 제공
 
 
유성우 화가는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그림 그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작업실이 있느냐 없느냐 같은 환경은 둘째 문제고 일단 자신이 얼마만큼 할 수 있는지, 즉 건강이 우선이다. 요즘에는 캐리커처가 좋다. 사람들의 얼굴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게 재미있다. 그려달라는 사람은 많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응하지 못하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인물화를 먼저 하고 나니까 캐리커처가 제대로 나오더라고요. 유화는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것 같고, 캐리커처는 재미를 주는 것 같아요. 우스꽝스러운 표현도 할 수 있고... 그러고 보면 캐리커처가 더 자연스러운 표현방법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웃어주니까 좋죠. 소통도 되고요.”
 
유성우 씨는 왼손을 사용하지 못한다. 오직 오른손으로 밥을 먹고 그림을 그린다. “이 손은 망가뜨리지 않으려고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어요. 누워서도 들었다 놨다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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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층 현관 옆에 걸려있는 ‘성촌의 집’ 식구들 캐리커처 ⓒ 이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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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우 화가가 생활하는 ‘성촌의 집(우리들의 집)’ 전경 ⓒ 이재은
 
유성우 씨가 1980년 간석동 ‘성촌의 집’에 입소할 당시 그는 스물한 살이었다. 올해로 34년째 한 곳에서 생활한 셈이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몸이 좋아져서 마음껏 그림을 그리는 것. 더 욕심을 부리면 거리에 나가 사람들에게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것이다. 유성우 화가의 평안과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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