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기획-인천교육 미래찾기(48)
*사진은 컬럼 내용과는 직접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
학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타율적 정책의 고물 창고처럼 보일 때가 있다. 낡은 물건을 처분하지 못하고 자꾸 쟁여 놓다보면 새 집도 헌 집 꼴 나는데, 학교가 딱 그 짝이다. 학교에서 갖추고 있어야 할 장부들을 보더라도 왜 자동화시스템을 도입했는지 의아하다. 파일로 정리되어 있는 문서를 출력해 종이문서로 만들어 학교 평가를 받는데, 서류 종류가 줄지 않는다. 최근에는 증빙 서류들이 부풀려진다고 그 증빙 서류를 입증할 수 있는 원자료를 명기하라고 요구한다. 이미 생산해 정보시스템(NEIS) 안에 들어있던 문서들을 하나씩 출력해 대조하며 보고할 문서를 만들어야 할 판이다.
행정은 어느 정도 하급 기관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이중삼중 감시시스템을 강화해 궁극적으로 행정에 대한 시민들의 만족도를 높이려는 원리다. 하지만 위에서 아래를 감시하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학교 자율성을 강화하는 게 정책 목표가 된 지 오랜데 교육청에서 기안하는 문서는 줄지 않는다.
이를테면 문서를 감축하려 해도 실적을 보고하라는 문서부터 만들어 낸다. 분기별로 감축 실적을 수치화하라는 문서가 따라 붙을 것이다. 실적이 좋지 않으면 강제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학교 평가에 반영하는 방법 등이 있다. 학교 평가는 실적을 입증하기 위해 서류로 검증한다. 문서 감축을 위한 회의록이 구비되어 있어야 하고, 일일 점검표 같은 양식이라도 첨부해 노력했다는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문서를 줄이기 위해 별도의 근거 문서를 만들어 내야 할 판이다.
그 과정에서 교사는 설득 대상이 아니다. 상부의 지시에 따르는 말단 행정 요원이다. 문서로 지시하고 문서로 답변을 올려 결재를 받는 시스템에 부속품처럼 존재한다. 어떤 정책이 새롭게 시행될 때, 교사들에게 묻지 않는다. 왜 묻지 않느냐고 하면 문서로 설문을 내려 통계처리해 보고하라고 한다.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다고 하면 홈페이지에 올려놓고 의견란에 클릭하라고 한다. 개별 교사는 익명화되고 교사들의 의견은 집단적 수치로만 존재한다. 현장의 의견을 수렴했다지만 교사들은 자신의 견해가 정책에 반영되었다고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정책이 쏟아져도 거기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낼 수 없다. 수동적으로 반응해 기능적으로 처리하는 데 익숙하다. 정책을 선별할 능력은커녕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을 구분해 낼 엄두도 못 낸다. 충직한 창고지기처럼 들어오는 물건을 받아두기만 할 뿐이다.
학교를 자율화하겠다고 할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자율은 능동적인 활동을 전제한다. 학교가 자율적으로 움직이려면 구성원들이 자유로워야 한다. 교사도, 학생도, 학부모도 자유롭지 않은데, 학교가 자율을 획득할 수는 없다. 학교자율화는 학교구성원들에게 권한을 주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정책 목표다. 구성원들에게 자율권을 주려면 상부의 행정 통제력이 약화되어야 한다. 통제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학교를 변화시키려다 보니 어정쩡한 타협책이 생겨났다. 학교라는 기관이 자율을 누려야 할 생명체가 되었고, 그 안에 자율권이 없는 구성원들이 자리 잡고 있는 기형적 구도다. 항공기는 제 맘대로 움직이려 하는데, 정작 조종사나 승무원들이 발휘할 주도권은 없다. 자율권을 행사해야 할 학교장조차 불안한 운영 체제다. 수동적인 구성원들을 데리고 학교자율화를 이루려면 모험을 불사해야 하는데, 학교장들이 그 길을 선호할 리 없다. 익히 해 오던 방식으로 운항하는 일 외에 새롭게 갈 수 있는 길이 없을 때, 답습이 최선이 된다. 자율권을 추구한다면서도 실제로 학교가 변화될 수 없는 한계는 거기서 비롯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학교는 권한은 딱히 없으면서 자율화의 결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되었다. 정책대로만 된다면 학교는 자율화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속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겉과 속이 다른 구조다. 타율적이고 하향적으로 강제된 자율화 정책은 자발적인 동력을 끌어내지 못했다. 자율화라는 성과를 내기 위해 일방적인 지시가 늘어나는 이율배반이 학교구성원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타율로 자율을 이뤄야 하는 학교 안에서 교사와 학생들은 이중의 고통을 받고 있다. 위에서 구상한 일이 폭포수처럼 떨어지는데, 자율적으로 이뤄진 것처럼 하려니 서류에 남기는 절차가 일이 된다. 누군가 제안했다는 기록이 회의록에 있어야 하고 집행 과정이 구성원들의 동의 속에 이뤄졌다는 사인이 일지에 남아있어야 한다. 억지 자율은 학교구성원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자율과 타율을 구분하는 일조차 무의미하게 한다. 어차피 ‘진짜 자율’은 해 본 일이 아니므로 학교 안에서는 주어지는 일을 ‘자율로 꾸미는’ 일로 자율을 대체한다.
학교는 ‘웃어도 웃는 게 아닌’ 표정을 자신의 얼굴로 지니게 되었다. 외부의 시선으로 보자면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잘 굴러가는 학교가 사건이 터지면 복마전 취급을 받는다. 문제를 쉬쉬하고 덮으면 문제가 없는 것이고 발각되면, 그 때 가서야 민낯이 드러난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사회를 경악하게 만들 때, 그 일은 어쩌다 생긴 게 아니라 곪아 터진 일인 경우가 많다. 학교장이 여교사를 상습적으로 성추행하고, 낮술에 빠져 있어도 학교는 돌아간다. 겉으로는 멀쩡한 사람이 병이 깊다면 둘 중 하나다. 모르고 있거나 감추고 있는 것이다. 학교는 어느 경우일까?
한 때, 유명 연예인들이 ‘가면우울증’을 앓고 있다며 사회에 호소하는 일이 있었다. 사회가 그들에게 원하는 웃음과 마음속 상태가 겉도는 일이 반복되다 보면 자아가 혼동 상태에 빠진다. 타인이 원하는 감정에 맞추느라 자신을 잃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정신은 깊은 병을 얻는다. 겉과 속이 다른 생활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본모습을 잃을 때, 가면우울증이 찾아온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정신은 속까지 골병이 드는 것이다. 그동안 학교는 사회적 기대에 맞춰 자율성을 발휘한다고 해 왔다. 하지만 자율이 실제가 아니라 꾸며진 연기라면 학교 구성원들은 내면과 외면이 괴리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학교에 문제가 생겨 사회가 혀를 찰 때쯤에 이르게 되었다면 그 속에 있는 교사와 학생은 이미 중병을 앓고 있을 것이다. 그 병은 학교가 사회적으로 짊어 져야할 분열증이 전가된 것이다. 외면은 멀쩡하고 반듯한 가면으로 치장하고 내면은 영혼이 떠나간 공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가면우울증이라면, 지금 학교는 그런 모습일 수 있다. 실체를 드러내야 병증을 발견할 수 있고 치료도 가능하다. 가면을 벗고 타율에 찌든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학교라는 덩어리로 뭉뚱그리지 말고 그 안에서 앓고 있는 이들을 들여다볼 때, 병이 있는지, 있으면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권한도 없이 고물 정책 창고 앞에 세워둔 교사가 아프지 않다면 그것도 문제겠지만, 일단 아픈 지 여부라도 물어야 학교가 건강해 진다. 지금 학교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는 자율이라는 가면을 벗는 데서부터 치유로 나아갈 수 있다.
학교야, 너 혹시 가면우울증에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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