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in]-[시각] 협약' 동구 발품' 연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성전, 천주교 도화동교회
제물포역에서 내려 동구로 향하는 길은 긴 돌담의 연속이다. 선인재단 입구의 사자 두 마리가 뜬금없이 등장하기는 해도 나름 고즈넉한 가로수길이다. 돌담의 끄트머리에는 낡은 나무 명패를 단 인화여고 교문이 수줍은 듯 숨어 있다. 여기서부터는 빨간 벽돌길이다. 이 담장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서 언덕을 오르면 동구의 영역에 가 닿는다. 남구와의 경계를 이루는 그곳에 천주교 도화동교회가 서 있다.
도화동교회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 4. 7∼1552. 12. 3)를 주보성인으로 모신다. 예수회 소속 선교사로 인도, 일본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면서 일본에 로마가톨릭교회를 처음 전한 이로 알려져 있다. 일본을 떠나 중국으로 들어가던 도중 폐렴으로 사망했다. 유럽에서 중국까지, 긴 여정이다. 더구나 당시는 아직 16세기다. 유럽인들이 희망봉을 발견한 게 1488년이고,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게 1492년이니 아무리 대항해시대라 해도 콜럼버스가 세상을 뜨던 해 태어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아시아로의 여행은 위험한 모험이었을 터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가톨릭교회는 그에게 ‘가톨릭 선교활동의 수호성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도화동교회 안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동상이 서 있다. 기단부에 새긴 이름은 ‘성 방지거 사베리오’다. 사베리오는 이탈리아어로 그렇게 읽는다니 그러려니 하지만 ‘방지거’는 좀 낯설다. 시인 정지용의 세례명이 ‘방제각(方濟各)’이란다. ‘프란치스코’를 한자로 옮겨 쓴 거다. 아마 ‘방제각’을 중국말로 읽다 보니 ‘방지거’가 됐나 보다. 그렇다면 이건 성인 모독 아닌가. 국적 없는 이름을 만들어 버렸으니. 아니면 아시아와의 만남을 보여주려는 걸까.
천주교 도화동교회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동상
1962년 말에 준공된 도화동교회의 주소는 이름과는 달리 동구 송림동 103-1번지(동산로 12번길 12-51)다. 이곳과 인연을 가진 이가 또 한명 있으니 인천에 이주해 와서 전교활동을 펼치다 사망한 박순집(베드로, 1830. 10. 9∼1911. 6. 19)이다. 강화도 갑곶순교성지 안에 모신 묘에 적힌 문구처럼 ‘신앙의 증거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천주교 인천교구에서 펴내는 <인천주보>에 박순집에 대한 소개가 간략히 적혀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기해박해(1839)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주교와 신자들이 묻힌 곳을 눈으로 확인했던 박순집은 병인박해(1866) 때도 군인 신분으로 새남터의 순교 장면을 목도하고 이들의 시신을 직접 찾아 안장하는 행적을 보였다. 이로 인해 훗날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힌 곳을 증언할 수 있었고 ‘땀의 순교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박순집 스스로도 부친을 비롯해 일가친척 16명이 병인박해를 거치며 순교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지인의 소개로 1890년 제물포에 정착한 후에는 답동성당에서 전교 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내다 사망하였다. 박순집이 당시 거주했던 곳이 쑥골, 즉 지금의 도화동이었다.
박순집의 유해는 용현동에 처음 묻혔다. 1976년까지 교회묘지였다가 지금은 용현동 성당이 세워진 곳이다. 경인고속도로 연장 공사로 인해 묘지 이전이 결정되자 박순집의 묘도 1970년 서울 절두산으로 옮겼다. 박순집이 다시 인천으로 돌아온 건 2001년이었다. 그해 5월 거주지였던 천주교 도화동교회에 잠시 봉안되었다가 같은 해 9월 강화도 갑곶순교성지에 안장됐다. (<인천주보> 1913·1924호)
신념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일은 숭고하다. 그런 이들을 잊지 않고 세상에 남기는 일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박순집은 순교자들을 기억함으로써 자칫 세상에서 사라질 뻔한 이들의 이름과 행적을 남겼다. 하지만, 도화동교회 안에서 박순집의 흔적을 찾는 건 쉽지 않다. 비록 육신은 갑곶에 있지만 한때 인연을 맺은 마을에서 점차 잊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용현동 교회묘지의 박순집 묘와 용현동 성당 (<인천주보> 1924호, 천주교 인천교구)
돌담 위의 학교, 돌담 아래 마을
도화동교회를 나와 우측으로 발길을 옮기면 다시 높은 돌담길이 이어진다. 마치 긴 성채를 지나는 듯하다. 박문여자고등학교를 감싸 안은 담장이다. 지금은 인천박문여자중학교나 인천박문여자고등학교로 부르면 맞지 않다. 올해 3월에 학교 이름에서 ‘인천’ 두 글자를 모두 떼어냈다. 더구나 인천박문여중은 남녀공학이 되면서 박문중학교가 됐고 개명과 동시에 송도로 학교를 옮겼다. 송도 이전을 단행하면서 ‘인천’이라는 단어를 없앴다는 게 참 묘한 기분이 들게 한다.
두 학교의 송도 이전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거론돼 왔다. 학교 건물이 50년을 훌쩍 넘긴 데다 구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학생 수가 줄어든다는 게 주요 이유였다. 박문여고도 조만간 송도로 갈 예정이다.
인천박문여자중학교가 처음 이곳에 둥지를 튼 건 1956년. 그 전까지는 지금의 부평 경찰종합학교 터에 있었다. 출발은 인천송림초등학교 교사를 빌려 개교한 소화고등여학교. 장석우가 설립해 초대 교장을 맡았다. 이듬해 부평에 교사를 신축해 이전했으나 1945년 4월 일본군에 징발돼 학교가 일본 육군 야전병원으로 사용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이어 주둔한 미군이 학교 부지를 떠난 건 1946년. 이때 다시 부평 교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박문여고 담장을 뚫고 나오다 생명을 다한 나무
박문여자고등학교 담장 밑으로는 조그마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골목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좁고 짧은 길들이 대문들 사이를 가로지른다. 한쪽은 고층의 아파트, 다른 한쪽은 높은 돌담, 다시 맞은편으로는 낮지 않은 구릉과 그 위의 아파트. 마치 골짜기에 숨어 있는 아늑한 산채 같다. 송림3·5동 101번지와 102번지 일대다. 1911년 측량한 지적도를 보면, 이 동네는 본래 채소밭이 대부분이었다. 한두 채 있던 집들이 광복 전후로 해서 늘어났던가 보다. 현재 남아 있는 건축물들 중 신축년도가 이른 것은 1943년부터 시작한다.
학교들이 모두 떠난 후에는 천주교 인천교구청이 들어온다는 얘기도 있다. 성소(聖所) 마을로 변하려는가. 차라리 그렇게라도 가꿔지면 좋으련만.
박문여고 아래, 송림3·5동 101·102번지 일대
송림3·5동 101·102번지 일대의 1960년대 이전 신축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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