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에서 6.10으로, 7.8.9노동자투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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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에서 6.10으로, 7.8.9노동자투쟁으로
  • 이희환 기자
  • 승인 2014.06.09 23: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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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 당시 인천산업선교회 일꾼자료실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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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무렵 인천지역 민주화운동의 중심지는 동인천역이었어요. 지금은 백화점 건물이 들어섰지만, 당시에는 조그만 역사 앞에 광장이 있어서 거기서 집회를 가졌죠. 그런데 경찰이 계속 원천봉쇄를 하다보니까 이후 집회가 주안, 석바위, 부평으로 확산됐죠. 6.10 때는 노동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 부평역 앞을 집회장소로 잡았었죠.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 때로 기억하는데, 아마 인천 역사상 가장 많은 시위 군중이 모였을 거예요. 그날은 동인천역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저 너머 용동 마루턱까지 10만 명의 시민들의 빼곡하게 찼었죠.”

87년 당시 인천산업선교회의 일꾼자료실장으로 일했던 이민우 선생은 당시 인천공대위 실무회의에 줄곧 참석했다. 인천지역 6월항쟁의 본부 역할을 했던 인천공대위에는 당시 합법적으로 활동이 가능했던 지역사회단체들이 다 참여했다고 한다. 부평이 노동자단체가 중심이었다면, 동인천은 합법적인 재야단체와 사회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모여 집회를 주도했으며, 여기에 대우중공업과 인천제철 노동자들이 결합하고 대학생들이 함께 하면서 거대한 에너지를 분출했다고 말한다.

“6.10 때의 집약된 구호가 ‘호헌 철폐, 민주헌법 쟁취’였어요. 여기에 시민들이 적극 호응했던 거죠. 그렇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전해에 있었던 5.3항쟁의 영향이라고 봅니다. 5.3은 그야말로 비합법적 운동이 골방에서 거리로 나와 백가쟁명식으로 자신들의 이념을 불출했던 특유한 공간인데요. 물론 당시로서는 대중의 외면을 받았죠. 정권으로부터 탄압의 빌미도 됐구요. 그러나 당시 우리 운동세력들이 5.3으로부터 철저한 반성을 하게 됩니다. 5.3이 있었기에 그로부터 6.10의 집약된 구호가 나올 수 있었다고 봅니다.”

인천민주화계승사업회의 이사로,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의 대표로 여전히 지역사회운동의 일선에 서 있는 이민우 선생은, 5.3인천민주화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직도 지역에서는 5.3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고, 5.3운동이 제자리를 못 찾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5.3이 객관적으로 평가되지 못하고 표지석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 인천이 멈춰있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그런데 87년 6월항쟁에서 소외된 목소리가 있었어요. 바로 노동자들의 목소리였습니다. 인천의 노동자들도 호헌철폐와 민주헌법 쟁취라는 슬로건에 동의해서 6월 내내 거리로 내달렸는데, 덜컥 6.29선언이 발표되고 보니까,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는 아무 것도 반영된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곧바다 7.8.9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납니다. 인천의 경동산업, 남일금속에서 먼저 일어나더니 급기야 대우자동차와 인천제철로 확산되었죠. 더 늦기 전에 이 시기의 역사를 잘 정리해나가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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