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기획-인천교육 미래찾기(56)
영화, 디태치먼트! 무심함을 말한다.
김샘은 낄낄 거리며 이상한 말로 수업을 방해하고 있는 아이를 혼내느라 진이 다 빠졌다. 시간마다 아이들을 방해하고 교사의 설명마다 이상한 말로 토를 달아대거나 교사 말투를 흉내내 아이들 웃음을 유발하면서 수업을 훼손시키곤 하는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느라 수업 진행이 어려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몇 번의 제지에도 굴하지 않고 영웅흉내에 흡족해 하는 아이에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김샘은 “그렇게 하면 좋아?”라고 말했다.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이내 비웃듯이 김샘을 째려보며 “뭐요”하면서 마치 ‘네가 어쩔건데’라고 따지는 눈길이 사납다. 김샘은 아이에게 지기 싫어 외면하지 못하고 말려들고야 말았다. “매일 혼나고, 욕 얻어 먹는 게 좋다구?”하며 말싸움이 시작되자 아이는 그 사나운 눈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칠 듯이 ‘네’,‘네’ 하는 대답이 더 사나워졌다. 다시 영웅이 되어가는 아이에게 김샘은 더 이상 아무것 도 하지 못하고 수업을 핑계 삼아 회피해 버리고 말았다. “뭔가 화가 났나보구나. 그렇지만 화가 난다고 해서 그렇게 어른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되는 거야. 마음을 좀 가라앉히렴.” 하면서 능숙하고 차분하게 아이를 유도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하고 휘말린 순간, 마침내 판정패 당했나보다. 시간마다 달래도 보고 칭찬도 하고 격려도 하고 혼도 냈지만 여전히 ‘영웅주의’를 멈추지 않는 이 아이에게는 세상에 대한 분노로 이미 속이 꽉 차 아무것도 들어갈 자리가 없었나보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밖에는. 문제는 그런 아이가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마다 그런 증세를 보이는 아이들에게 김샘은 서서히 지쳐간다.
무심함! 이영화의 제목은 다.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더 이상 지치지 않기 위해 영혼을 이탈시킨 교사 헨리가 등장한다. 불안과 불만, 대인관계가 결여된 학생들은 폭력과, 탈선, 자살에 노출되고, 교사는 교육의 권위를 상실한 채 사회와 학생과 학부모에게 이리저리 휘둘린다.
헨리가 간 학교는 슬럼가 지역의 학교다. 이곳은 아비규환 그대로이다. 길고양이를 잡아다 망치로 찍어 죽이는 모습을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보여주는 끔직한 장면도 나온다. 학생이 선생에게 침을 뱉고 성폭행을 당하게 할 거라고 협박까지 한다. 상담 선생에게 전화를 건 학부모는 자기 아이의 폭력성은 ADHD 때문이라며, 오히려 당당하게 교사를 위협한다. 아이를 책임지는 게 바로 당신들의 일이라 강조하면서 다짜고짜 자기 아들에게 노트북을 사주라고 윽박지르기에 이른다. 이 학부모의 말을 들으니 김샘은 그 와중에 며칠 전 일주일 내내 학교를 뒤집어 놓은 한 학부모가 떠오른다. 방과 후 시간에 초등학교 1학년 여자 아이가 자기를 놀린 2학년 여자 아이를 때린 사건이었다. 그 부모는 감히 2학년인 자기 딸을 폭행했다고 폭력심의위원회를 열지 않은 학교를 고소하겠다고 길길이 뛰었다. 가해자라는 아이 1학년 담임을 찾아가 “니가 선생이냐, 저런 아이를 방치하다니, 돈 때문에 학교 오는 거냐”며 어깨를 치고 교사 명찰을 빼앗는 학부모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하긴 몇 년 전 김샘 후배 학교에선 자기 아이를 다른 아이들이 놀렸다고 교사를 계단에서 밀어버린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열정적인?’ 부모들은 정작 아이들이 학교 안과 밖에서 어떤 짓을 하고 다니는지 관심이 없다. 그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 부모로서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 교육을 학교와 학원에만 맡겨두고 자신은 빠져도 된다고 생각하나보다. 어느 순간부터 문득, 학교는 ‘교육기관’이기보다는 부모가 편하기 위한 위탁 시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와 가족의 관심을 받지 못하거나 이상한 과잉의 도움으로 자란 아이들은 자신의 인생이나 앞날에 대해 아무 희망도 꿈도 없이 무기력하기만 하다. 몸을 팔아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아이 에리카를 집에 데리고 와서 돌보면서 헨리는 울먹인다. "부모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 필요해요. 부모에게도 자격증이 필요해요" "부모들은 어디 있는 거지요?"
사실 헨리 역시 어머니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지닌 불완전한 어른이다. 그래서인지 헨리는 기간제를 자처한다. 잠시 잠깐 땜빵하고 떠나기, 책임지지 않기, 진한 마음의 교감을 나눌 시간을 갖지 않기... 그것은 어린 시절 자살한 어머니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의 남루한 처지에서 비롯된다. 아마도 주인공 헨리는 학교가 두려운 거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고 사람을 만나고 싶은 이면에 자신이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잔혹하게 벌어지는 상황을 견디지 못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해낸 장치가 바로 그 ‘무심함’이었으리라. 끊임없이 소진되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벽. 때문에 거리를 두고 무심하게 있는 것이 이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유일 버팀목이 될 지도 모른다.
‘거리두기’에 실패한 교사들은 하나 둘씩 학교를 나가고 끝까지 학교에 남은 사람은 그야말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태가 된다. 한 여교사는 그나마 학교가 안전한 거라며 자신의 불안을 애써 둘러대며 견디고, 오랜 연륜과 여유로움으로 학생들을 대하고 있는 교사조차 실은 우울증 약을 수시로 복용하고 있었다. 어떤 과학 선생님은 학교에 올 때마다 “내가 보이나요?” 라고 물으며 마치 정신 나간 사람 같은 꼴로 철조망을 부여잡고 절규한다.
김샘은 영화를 보면서 무심하게 있기가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위로를 받는다. 우리는 종종 이상적인 수준의 기대와 책임을 요구 받을 때가 있다. 스스로에게도 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하여 전적인 책임을 지우려 한다.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일들을 자신에게 강박적으로 요구하기도 한다. 여기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고 완벽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에 길들여 져 왔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상처를 숨기려 하거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발판으로 이상적 이미지를 만들거나. 하지만 그 이상이 높을수록 자신의 내면은 무력해지는 것을 바라보게 되고 마침내 와르르 무너져 포기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헨리처럼 때로는 무심하게 감정을 묻어 둘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 선배교사가 절망하고 학교를 나가려는 후배교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 이 직업의 나쁜 점은 아무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는 거야.”
자신을 평생 돌본 할아버지가 죽고 자신을 사랑한 메레디스는 자살을 했고 몸을 팔고 다녀 돌보아준 에리카는 강제로 보호소에 보냈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 아이러니 하게도 헨리는 기간제를 버리고 정교사가 되기 위해 학교로 돌아왔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라도 한 것처럼. 여전히 학교는 시끄럽고 아이들은 말을 안 들으며 온갖 부조리가 난무한다. 울며불며 보호소에 간 에리카는 조금씩 달라져 있고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아이들이 뭔가 변화를 보이기도 한다. 헨리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준다. 책을 읽는 동안 교실에서 학생들은 사라지고 바람이 몰아치고 물건이 날아다닌다. 그러나, 헨리는 그 자리에서 끝까지 책을 읽어준다. 그가 꼿꼿이 앉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은 그 혼돈과 절망 속에 ‘네가’ 희망의 실마리라고 말하고 싶을 것은 아니었을까? 크게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아도, 뭔가 예전보다 나아지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가져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김샘은 영화를 보며 내내 가슴이 먹먹하기만 했다.
저작권자 © 인천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