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황은수 / 인천남구청 문화예술과 전문위원
작년 10월 15일 인천시민의 날을 기념하며 문학산 정상이 반세기 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물론 ‘조건부 부분 개방’이라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지만, 인천 지역사의 전개과정에서 한 획을 긋는 전환점이었음은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그림-1] 문학산 정상부에서 바라본 도심 전경(출처 : 필자)
지난 상당 기간, 우리는 분단의 현실에서 군부대의 문학산 점유를 너무나 당연시하거나 불가피한 상황이라며 체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1998년 봉제산 미사일 오발 사고를 계기로 지역사회 범시민단체들의 ‘군부대 이전 및 시민공원 만들기 운동, 패트리어트미사일 배치계획 철회 운동’ 등이 세차게 몰아쳤고,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2005년 군부대는 영종도로 이전되었다. 이때부터 문학산 정상은 군사적 기능마저 상실한 채 철조망에 둘러싸여 방치되고 있었다. 그 사이 이렇다 할 큰 움직임은 없었지만, 많은 시민들은 내심 문학산 정상에 올라설 날을 고대했을 것이다.
2015년 초 인천시는 돌연 문학산 개방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미 때가 무르익었던 것일까? 불과 반 년 만에 국방부의 조건부 개방 승낙을 받아내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덕분에 지난 2월 발표한 2015년도 시정 주요업무 종합 평가에서 문학산 개방사업은 유일한 ‘탁월’ 사업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고, 주말 평균 약 1,000명의 시민들이 정상부에 오를 만큼 명소가 되어 가고 있다. 또, 개방 즈음부터 현재까지도 문학산 정상 개방은 언론과 시민들의 큰 관심거리이고, 여러 이슈들을 반복해서 재생산해내고 있다.
그런데 이제야 맞닥뜨린 문학산 정상부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두었는가? 너무나 갑자기 찾아와서일까, 안타깝게도 현재 연속성을 지닌 흐름 속에서 준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올 해부터 인천시와 남구에서 문학산의 역사성과 자연생태를 되살리는 것을 양대 축으로 ‘문학산성 학술조사 및 국가 사적 지정 추진, 문학산 숲 복원 및 활성화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이를 토대로 중장기적인 비전과 목표를 설정하고, ‘문학산(성) 종합정비 추진계획’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 도래하여 일선의 관계자들에게는 부담이 아닐 수 없는 형편이다. 그 와중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문학산 관련 소식에 우려를 감출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먼저 우리의 성숙치 못한 시민의식을 들 수 있다.
문학산 정상부에서 나오는 한 달 쓰레기의 양은 무시 못 할 정도이며, ‘흡연, 취사’ 행위를 하는 등산객들로 인해 금지 현수막을 걸어놓을 지경이다. 원경을 감상하라고 설치해 놓은 망원경은 인근 거주민들의 사생활 침해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현재 문학산 정상부에는 급작스러운 개방에 따라 소규모의 전망대, 파고라, 벤치 몇 개가 있는 것 외에는 편의시설이 충분치 못하다. 전기,상하수도 시설도 모두 끊겼기 때문에 군부대 막사의 화장실도 사용할 수 없다. 올 해 이러한 불편을 일부 개선할 계획을 갖고 있지만, 시민들의 불평은 연일 끊이지 않고 있다.
도심 한 가운데, 넓지도 않은 녹지, 높지도 않은 문학산 정상에 올라 인천 도심을 360° 파노라마로 즐길 수 있게 된 것만으로 만족하자고 한다면 너무 소박한 것일까?
한편, 얼마 전 어느 신문에 인천 가치재창조의 일환으로 문학산에 ‘전망타워’를 세우자는 기고문이 실렸고, 이어서 건립사업을 시민운동으로 확산하자는 제안의 글도 올라왔다. 반대의견도 있었지만, 이와 같은 내용이 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어 시민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고 전한다.
누구나 정상부에 올라서면 꽤 평평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1960년대부터 군사시설이 들어서며 봉우리는 잘려나갔고, 그 과정에서 지표상의 문화유산들은 상당수 사라졌다. 이러한 과거를 경험했음에도 지금 시점에서 문학산 정상에 ‘개발’의 그림자를 드리울 때인가?
[그림-2] 문학산성 동문 및 봉화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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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듯이 문학산(성)은 미추홀에 정착했다는 비류의 일대기를 담은 백제 건국신화가 깃든 공간으로 적어도 18세기 중엽부터는 그렇게 인식해왔던 것(<동사강목> <여지도서>)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 같은 사실을 명쾌하게 증명해 줄 고고학적 증거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1949년 시립박물관의 조사에서 정상부에 있었던 문화유산(터)을 확인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1958년 ‘문학산성동문(文鶴山城東門)’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동문지를 복원하여 역사적 상징성을 회복하려고 했지만, 1960년대 군부대가 들어오며 후대의 노력마저 사라졌다. 이후 1997년, 1999년, 2002년 문학산(성) 일대에 대한 기초 학술조사가 실시되었으나 군부대가 점유하고 있던 터라 정밀한 매장문화재 조사로 이어지지 못 하였고, 2010년 산성의 현상유지를 위한 부분 보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림-3] 문학산성 북측면 사진
※ 2009~2010년 불가피하게도 산성의 더 이상의 훼손을 막고 등산로 정비를 위해 보수정비 공사를 실시했으나, 발굴조사를 선행하지 않고 일부 잔존 성벽 구간에 대해서만 (신)석재를 쌓아 올려 지역사회의 질타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철조망에 가로 막혀있던 장막이 걷혀졌다. 신비로움을 간직했던 공간이 베일을 벗은 것이다. 그런데 정상에 서면 무엇이 보이는가? 깎여나간 너른 공간 외에는 성벽의 일부도 거의 볼 수 없다. 무엇을 선행해야 하는가? 이제라도 문학산성 내외부에 대한 철저한 학술조사와 정비를 통해 본연의 원형을 찾기 위한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것이 초기 백제, 비류의 미추홀 정착을 건국신화에서 역사로 끄집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설사 이러한 노력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관련 유물이나 증거가 나타나지 않아도 낙심할 필요는 없다. 다소 추상적일지 몰라도, 비류의 신화를 배우고 꿈꾸며 자라날 우리 후손들이 우리가 못 다한 숙제를 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금은 '문학산(성)'이 과연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고, 본연의 모습을 찾기 위한 노력과 준비를 시작할 때이다. 올 해 예정되어 있는 문학산성에 대한 학술조사 [정밀 지표조사, 주변 발굴조사] 와 향후 보존방안을 위한 학술회의 등에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이러한 노력과 준비가 관공서나 전문가들만의 몫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우리 모두 너무 조급해하거나 서두르지 말고, 충분한 조사와 고증 그리고 지역사회 공감의 과정을 거쳤으면 한다. ‘문학산(성)’ 그 자체가 인천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되는 그 날이 먼 훗날의 얘기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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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필자는 정상에 올라 동서남북 다 볼수 있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일부 구간은 베니아 판으로 가리워진 상태이며 동 하절기의 개방시간을 가지므로서 여유로운 탐방이 이루어 질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 오를수 있는 탐방길의 일부로 불편한 점..또한 하부에 둘레길이 이루어 진다면 문학산을 찾는 모든이에게 좋은 산 진산의 이미지를 심어 줄수 있는데 그렇지 않음에 아위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