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94분/멕시코
개봉 : 2016.04.14.(영화공간주안)
등급 : 15세 관람가
감독 : 미셸 프랑코
츨연 : 팀 로스, 사라 서덜랜드 외
죽음을 목전에 둔 말기 환자들을 정성껏 돌보는 남자 호스피스 데이비드의 일상을 통하여 삶과 죽음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해주는 영화다.
감독 미셸 프랑코는 79년생이라는 영화계에서는 비교적 어린 나이의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연출했는데, 그가 연출한 3 작품 모두 칸의 초청을 받는 쾌거를 이뤘다. 첫 장편 <다니엘&아나>는 2009년 칸영화제 감독주간 초청, <애프터 루시아> 2013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대상 수상에 이어 세 번째 본 영화인 <크로닉>은 2015 칸영화제 공식 경쟁작 각본상을 받으며 차세대 미카엘 하네케로 주목받게 되었다.
주인공 호스피스 데이비드 역의 팀 로스, 본인이 자처해서 출연을 청하게 되었고 시나리오 작업 단계부터 참여했다고 한다. 여성 호스피스의 이야기를 남성으로 바꾸길 원하면서 적극적으로 <크로닉>에의 출연 의지를 밝혔다. 상영 내내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과 가끔씩 등장하는 스크린을 가린 뒷모습, 저녁노을에 투영된 흑백에 가까운 실루엣은 영화 전편을 흐르는 삶과 죽음이라는 대명제를 끌고 갔다.
삶과 죽음을 해석하는 감독의 인생관과 그것을 온전히 수용하여 온 몸으로 연기해 낸 배우의 노련함이 명품을 탄생시켰다.
배우 송강호가 떠오른다. 송강호였기에 가능했던 영화들, 대배우 송강호를 만든 영화들이 생각난다. 영화 <살인의 추억>, <변호인>은 송강호였기에 가능했었고, 명배우 송강호를 만들어 낸 작품들이었다. 명배우의 조건은 무엇인가, 러닝 타임 94분이 다큐멘터리인지 허구인지 영화 속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힘들었다.
팀 로스의 절제된 표현력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으며 또 한 사람의 송강호 탄생을 보는 듯 했다. 또한 영화의 굵은 선을 이어간 마치 실재 인물인 듯이 연기한 환자 역할의 배우들. 그들의 헌신적인 연기에 고개가 숙여진다.
개봉관이라는 대형영화관이 아닌 최신의 다양한 예술영화, 다양성 영화를 상영하는 소규모 영화관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를 광화문에 있는 작은 영화관에서 감상했다. 작은 영화관이 주는 이 안정감과 신뢰감의 원인은 무엇일까? 작은 영화관이 많지 않아 감상이 어려울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가까운 지역에 이러한 문화 공간이 있다. ‘영화공간 주안’에 감사를 드린다.
영화 제목 ‘크로닉(Chronic)’이란 단어를 찾아보았다. ‘만성적인’ 의미로 치유가 어려운 환자들과 그 주변인들의 분위기, 데이비드의 내밀한 정신적인 고통 등을 함축하는 중의적인 제목으로 이해하였다.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본다.
데이비드는 아들을 아프게 보낸 기억으로 맘 한 편에서 늘 삶에 대하여 어둡고 절망적이며, 정신적인 고립에 있었으며 부인과의 이혼으로 무의미한 일상을 보내며 말기 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 일을 하게 된다. 4명의 환자가 등장한다.
남성 호스피스였지만 성을 불문하고 데이비드는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들을 간호하는 것 외에 그 환자의 남편이 되기도 동생이 되기도 하면서 환자에게 위로가 되어 주고 마지막 순간을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싶어 하게 되는 호스피스 그 이상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변치 않는 데이비드의 무미건조한 얼굴, 약간 구분 듯한 어깨가 현실과 격리된 채 홀로 동굴 속에서 살아가는 정신적 고독의 전형을 보여 준다.
말기 에이즈 환자인 사라와 갑자기 쓰러져 정신은 멀쩡하였으나 몸이 차츰 죽음을 향하는 노년의 전직 건축가를 헌신적으로 돌보며 환자들도 그런 데이비드를 믿고 신뢰하게 된다. 데이비드에게 자신의 민낯을 보이며 무한한 신뢰를 보이는 환자들. 죽음을 앞둔 환자가 데이비드를 껴안고 한없이 흐느낀다. 이 환자의 방은 2층, 아래층에서 친척들이 모여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식사를 한다. 삶과 죽음은 공존한다.
세 번째 말기 암 여성 환자. 데이비드가 아들을 안락사시켰다는 사전 정보를 알고 이 환자는 자신도 그렇게 해달라고 압력을 가한다. 고민하는 데이비드의 모습을 롱테이크로 보여 준다. 장면이 바뀌어 이 환자는 침대에서 데이비드의 죽음의 주사를 맞는다. 잠자듯이 눈을 감는 환자의 모습이 일상의 한 장면처럼 나온다. 배경 음악도 주고받는 대사도 없다. 네 번째 환자는 청소년 남자, 이 휠체어 청년에게선 본래의 호스피스로서의 상상 가능한 모습을 보여준다.
백 세 시대라고 흔히들 말한다. ‘백 세 인생’이라는 노래는 무명의 한 여가수를 스타로 만들었다.
백 세 시대에 호스피스가 주인공인 어쩌면 우울한 영화를 봤다. 몇 해 전 고인이 되신 나의 어머니. 요양보호사님들이 우리 집을 출퇴근하며 어머니를 돌보셨던 장면들과 겹쳐 보였다. 데이비드가 맨 몸의 사라를 의료용 의자에 앉혀서 목욕시키고, 자존심 강한 건축가 노인을 침대에서 닦이고, 옷 입은 채로 대변을 본 말기 암 환자를 닦아 주는 장면은 어쩌다 보게 되는 드문 모습이 아니다. 우리 집에서도, 생전에 입원하셨던 병원에서도 매일 보는 장면이었고 환자의 난처해하는 모습과 평정을 찾으려 하는 모습, 간병인들의 무표정 속에서의 익숙한 손놀림이 눈에 선하다. 그들은 비록 말기 환자들은 아니었으나 얼굴은 이미 창백하였고 삶보다는 죽음에 한 발 더 가까워 보였었다.
불교에서는 윤회전생(輪廻轉生), 기독교에서는 영생(永生)으로 삶과 죽음을 말한다. 어떠한 경우든 삶에 마침표가 찍어지면 죽음의 사체가 남게 된다. 현생에 존재하는 살아있는 사람들은 주검을 엄숙하게 거두며 망자의 삶을 마무리하곤 한다.
사람들은 죽음을 얼마나 준비하고 있을까. 마치 천 년을 살듯이, 죽음은 나와는 먼 일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꼭 노년이 아니더라고 고도로 발달한 의술을 믿더라도 예상 못하는 인간의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를 갖춤으로서 제 2의 생명과 인생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백 세 인생을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소멸이 공존한다.
돌보던 환자가 사망한 후 데이비드의 달리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간혹 헉헉 숨소리만 들릴 뿐 스크린에는 장면 바뀜 없이 데이비드의 달리는 장면만 보인다. 힘든 호스피스 일을 해내기 위한 체력 단련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살아 움직이는 삶의 모습과 방금 현실을 떠나 죽음의 세계로 떠난 망자들과의 대비도 있다. 환자가 거주하는 집, 그 중에서도 묵직한 현관 문 앞에 서 있는 데이비드의 뒷모습, 어두운 색깔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삶과 죽음은 결코 별개의 존재가 아니며 삶 속에 죽음이 있는 것이며 그 죽음은 문 하나 열고 들어가면 일상처럼 맞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 돋보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해석이다.
후반부 데이비드가 달리기 하는 장면이 길게 나오다가 한 순간 자동차에 의해 사라지면서 죽음의 세계로 건넌다. 예고도 없었지만 충격적인 죽음이었다. 스크린에는 일부만 보이는 깜빡이는 자동차의 비상등으로 삶의 마감 즉 죽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어떤 음악도 들리지 않는다.
철저히 통제된 감정 연기, 차분하게 그러나 혼신을 다한 연기가 보는 이들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더하기 한다. 데이비드가 원했던 죽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영화는 다소 친절하지 못했던 데이비드의 죽음으로 열린 결말을 보여 준다. 어느 쪽이 결말이든 영화관을 나오면서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진지해지며 삶과 죽음은 공존한다는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다.
먼훗날의 일로 접어 두는 죽음이 아니라 겸허히 성찰함으로써 인생은 더욱 윤택해지게 될 것이다. 생명이라는 유한성은 인간이 신에 근접할 수 없음을 명백히 보여 주며 겸손해 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주제가 너무 무거웠다고.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삶과 죽음처럼 역설로 주제가 다가온다.
내가 숨 쉬는 이 순간을 사랑하고 겸손한 자세로 세월 같은 길을 담대히 걸어가겠다.
무표정한 흑백의 배경, 글자들, 음악 없는 엔딩이 길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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