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떠난 바람소리
랑승만
먼저 떠난 텅 빈 바람소리야
소란스럽고 넘치고 넘치네만
아주 높으시고 향기로운
바람소리는 드무나니...
선생질 하던
내 도타운
아주 먼 옛날 20대 때
명동 바닥을 휩쓸던 술친구
관식이 술싸움하다
팔을 다쳐
끙끙 앓고 누워 있는
자하문 밖 앵두골 바람소리
내가 한 살 위인데도
형님이라 부르라며 껄껄대던
바람소리 관식이
그가 바람처럼 누워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을 찾아
서로 바람이 되어 앉아
술잔 부딪치던 바람 소리였는데
그의 고운 마나님 방여사를 남겨놓은 채
술 주전자 끼고 너무 일찍 떠난
그의 이쁜 시 <자하문 밖>에서 귀하신 높으신
바람소리 듣고
아쉬워 흐느꼈었네.
예쁜 골무 같은 마나님
목여사가 빨간 버선 신겨주어
두 번째 먼저 떠난 바람소리
상병이 갈갈갈...
웃어대며 막걸리마시러 가자 소매 끌던
바람소리 상병이
그의 절시 <갈대>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 달래며
서로 사무치게 바람소리로 바라보다가
아직 더러운 세상에 남아 있는
늙은 바람이 먼저 떠난 바람소리
관식이와 상병이의 하늘 솟구치는 목소리 듣나니...
그대들 그 머나먼 하늘에서
반가운 빗소리 같은
소식 한 방울 없네만
그대들 두고 간 바람소리는
항상 내 곁을 감돌고 있으니 말일세.
- 시집 <우주의 뜨락>에서
▲ 시집 <우주의 뜨락> 랑승만 시인의 19번째 시집 | |
ⓒ 최일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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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승만 시인은 1933년 태어나 2016년 4월 28일 작고한 인천의 시인이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오랜 세월 병상에서 고통스럽게 지냈으나 맑은 시심만큼은 항상 간직하여 19권의 시집을 펴냈다. 시인은 한국문인협회의 고문으로 계시다가 엊그제 작고하시여 지금은 부평가족공원 평온당 2층에 모셔져 있다. 이 시는 2015년 7월에 펴낸 시인의 19번째 시집 <우주의 뜨락>에 수록되어 있다.
시인은 이 시에서 옛날 어울려 지내던 김관식 시인과 천상병 시인을 회상하고 있다. 시인은 두 시인을 "아주 높으시고 향기로운 바람소리"로 칭하고 있다. 김관식 시인의 시 <자하문 밖>을 읽으며 "높고 귀하고 높으신 바람소리"를 듣고 천상병 시인에게서는 "막걸리 마시러 가자 소매 끌던 바람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더러운 세상에 남아 있는/ 늙은 바람이 먼저 떠난 바람소리/ 관식이와 상병이의 하늘 솟구치는 목소리 듣나니..." 하며 자신이 욕스럽게 남아 있음을 한탄한다.
김관식 시인과 천상병 시인은 우리 문단에 숱한 화제를 뿌린 시인들 아닌가. 지금도 두 시인은 우리 현대시사에 일급의 시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랑승만 시인 역시 당대에 선두주자로 나아가던 언론인이요 시인이었다.
그러나 1980년 한국잡지협회 이사회 참석 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엊그제 별세하기기까지 병석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시인은 <시인의 에스프리>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래서 나는, 시는 내게 있어 생명창조의 승화이며, 정신생명 부활의 영원한 화두임을 터득한다. 그래서 나는 언어의 생명력을 마시며 시를 쓴다. 나는 나의 시에서 맑고 강인한 생명력을 얻는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문학적 신조를 탄생시켰다. 즉, 시 한 편을 쓰면 10년은 더 살고, 시 한 편 발표하면 20년은 더 살고, 시집 한 권 세상에 내놓으면 30년은 더 산다는 문학정신적 정신생명 부활의지이다 이는 내 시력 60년의 경륜이 터득한 진리이며 시의 등불이다."
그리고 시인은 지금의 시단 풍토에 대해 따끔한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그런데 근래 쏟아져 나오는 시를 보면 여과되지 않은 관념적인 단어 몇 개 얼버무려 꿰맞추어 내는 것을 보면 실로 개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에는 적어도 한 편의 이야기 심상이 들어 있어야 한다. 이는 시의 생명이다."
시인은 이제 떠났다. 죽음이란 우리의 숙명이며 인간은 모두 죽을 운명을 타고 났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이다. 죽음은 끝 모를 허무의 심연이거나 절망의 끝없는 나락이 아니다. 죽음의 삶의 완성이요, 고달픈 삶에서 우리를 구원해줄 마지막 희망이 되기도 한다. 죽음이 슬픈 것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추억을 안겨주고 삶의 질곡에서 해방된다는 안도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인천문단은 랑승만 시인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까지 시에 의지해 살고 84세에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으로 명편이 수록된 시집을 상재할 만큼 시를 아끼고 사랑한 시인. 삶이 곧 시였으니 인천문학의 한 전범이기도 한 것이다.
시인의 시를 모아 전집이라도 펴내면 얼마나 좋으랴만 그렇게는 하지 못하더라도 시인의 시편에 담긴 소중한 뜻을 헤아리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인천문학의 전통을 잇는 길이고 인천 문학 발전을 모색하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