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되면 앳된 여자아이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피구가 시작되고, 누군가 자신을 불러 주기를 기다리는 말간 얼굴에 기대, 초조, 불안, 실망, 안타까움, 수치가 순간순간 지나가고 섞인다. 영화 『우리들』(윤가은 감독 2016)은 이미 너무 흔한, 일상이 되어버린 ‘왕따’이야기다. 주인공 선은 외톨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툭툭 내뱉는다. “재한테 무슨 냄새나지 않니?” 까르르 웃으면서 아이들이 잘도 그런 말을 주워섬길 때 선은 혼자 슬그머니 자기 냄새를 맡아본다. 이것은 낙인이요, 비참이다. 그런 선이 방학 하는 날, 전학 온 지아를 만난다. 둘은 사전정보 없이, 선입견 없이 친구가 된다. 처음 친구가 생긴(알고 보면 지아도 따돌림 문제로 시달리다 전학을 왔다) 열한 살 소녀들의 여름방학은 얼마나 빛나고, 얼마나 짧은가. 개학한 후 선은 달라진 지아를 만난다.
처음에 왕따 이야기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것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왕따도 관계 맺기의 어려움에서 발생하는 일이지 않은가. 그리고 관계 맺기의 어려움은 아이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른들도 늘 관계라는 덫에 발목을 잡힌다. 사람살이에서 관계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나의 선의는 상대에게 선의로 전달되지 않을 때가 있고, 때로 그것은 악의로 돌아오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선과 지아가 처음으로 어긋나는 장면은 그래서 절묘하다. 선은 지아가 좋아하는 오이김밥을 위해 아침부터 엄마를 조른다. 조르고 졸라 만들어진 오이김밥은 지아를 향한 선의 마음이다. 그런데 지아는 김밥을 먹지 않고, 옆에 있는 과자만 먹는다. 그리고 짜증스레 말한다. “근데, 너희 집은 왜 이렇게 덥냐?” 부모님의 이혼으로 할머니 집에 와 있지만 지아네는 부자다. 그래서 처음 선의 집에 왔을 때 선이 수줍게 “우리 집, 너무 덥지?” 했지만 지아는 아무렇지 않게 “아냐, 안 더워.” 했었다. 그런데 오이김밥이라는 선의는 이 수평적 관계를 깨고, 선에게 짜증과 멸시로 돌아온다.
이렇게만 보면 지아가 이상한 아이 같다. 그런데 카메라는 김밥을 두고 사랑스러운 실랑이를 벌이는 선 모녀를 남몰래 바라보는 지아를 무심한 듯 조심스럽게 잡는다. 카메라의 시선은 말한다. 자신을 서로 맡지 않으려는 부모를 향한 원망이 지아로 하여금 선의 선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선의 선의는 이렇게 미끄러지고, 개학 후 지아는 선을 왕따 시킨 보라네와 한 무리가 된다. 친구라서 나눠가질 수 있었던 은밀한 비밀들이 폭로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씻기 어려운 상처를 주고받는다. 어떤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상황은 의외의 구석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친구와 놀다가 만날 맞고 들어오는 선의 동생 윤에게 선이 화를 내며 말한다. “너도 때렸어야지!” 어린 동생은 혀 짧은 소리로 무심하게 말한다. “그럼 언제 놀아? 난 놀고 싶은데.”
극장에서 저 대사를 들었을 때 나는 정말 입이 딱 벌어졌다. ‘아, 그렇구나! 노는 게 중요하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갚아주고 복수하고 이기는 게 아니라, 같이 노는 거였지!’ 우리는 자라면서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다. 그중 가장 안타까운 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점이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고, 잃어버린다. 그래서 간혹 이기거나, 무언가를 갖거나 이루게 되어도 행복하지 않다. 그건 내가 정말 원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가장 단순하고 담백한 방법으로 우리 삶의 핵심을 찌른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가질 수 있는지. 진리는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피구로 시작한 영화는 피구로 끝난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고 선에게도 지아에게도 남은 것은 없다. 다시 피구가 시작되고 지아에게 ‘아웃’이 선언된다. 영화 초입에 선에게 내려졌던 선고와 똑같은 방식이다. 아니라고, 나는 금을 밟지 않았다고 항변하지만 아무도 지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때 선이 말한다. “지아 금 안 밟았어. 내가 봤어.” 영화는 다소 거리를 둔 채 외야에 나란히 선 두 아이를 비추면서 끝난다. 서로를 슬쩍 쳐다보지만 둘의 시선은 합쳐지지 않는다. 앞으로 이 두 아이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선이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점이다. 희망은 그렇게 조금, 둘이 함께 여름방학에 들인 손톱 끝에 남은 봉숭아물처럼 아주 조금, 남았다.
이 영화는 아이들의 세계를 다룬 기존 영화나 서사들과 비교했을 때 특기할만하다. 감독은 무릎을 꿇고 아이들과 같은 위치에서 같은 것을 바라본다. 덕분에 카메라는 아이들의 일이라고 얕보거나 불쑥 개입하지 않는다. 이 윤리적인 위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서사를 자유롭게 한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는 어른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아이들의 문제는 고스란히 아이들의 세계 안에서 부딪히고, 깨지고, 다시 일어서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실제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른들이 끼어들어 해결해 줄 수 있다면, 왕따나 학교폭력 문제가 왜 사라지지 않겠는가. 현실도, 선악도, 아이들도, 아이들의 세계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선의 선의(오이 김밥)는 처음에 거절되었다. 두 번째 호의(금 밟지 않았어)가 지아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고, 거기에는 정답도 없다. 다만 가능한 희망, 실낱같은 그 희망을 우리가 어떻게 붙잡을 것인가는 윤과 선, 두 남매가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러니 남은 것은 관객인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에 관한 실천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