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시골 우리 집은 창호지가 발린 문이 있고 문에는 앉으면 딱 키 높이가 맞는 곳에 조그만 유리창이 하나 붙어있었다. 할머니는 늘 방에 있을 때 일 하실 때 외엔 그 조그만 봉창을 통해서 바깥을 내다보시며 앉아 있는 버릇이 있었다.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나는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방 아랫목에 누워 뒹굴다가 밖을 내다보고있는 할머니 곁에 다가갔다. 할머니 뺨엔 눈물이 주르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할매야 우나?” 나는 우는 할매가 이상해서 물었다. “아이다. 눈에 티 껍디기가 들어가가지고 마.” 할머니는 얼른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치시곤 다 빠지고 하나만 남은 이빨을 하얗게 드러내시며 환하게 웃으셨다. “콩 좀 뽀까주까. 묵을래?” 나는 난생 처음보는 할머니의 눈물이 이상했지만 그런가보다하고 볶아주신 콩을 맛있게 먹었다.
우리할머니는 와이셔츠 단추구멍이라고 놀림 받는 아주 조그만 눈에 쪽진 민백의 머리, 커다랗고 하얀 앞 이빨 하나만 남아있는, 그리고 키가 크고 훤칠한 사람이었다. 어지간한 일에 화도 안내시고 자분자분 이웃 돌아다니며 말도 잘 하지 않으시고 누가 말할 때도 크게 “허허.” 한번 웃으시고 그만이셨다. 할아버지와 가끔 다투실 때도 이웃 간에 속상한 일 있으실때도 부엌 한 구석에 단지하나 그 속에 조롱박을 휘휘저어 막걸리 한잔 벌컥벌컥 마시고 입맛 한번 다시며 소매로 휙 훔치고 끝이셨다.
그런 할머니는 뒷마당 텃밭에 “주야 오이하나 따온나. 가지하나 따온나.” 하시면 그거 하나 따오면서 어리고 말랑말랑한 오이와 가지 새끼를 내가 모조리 따먹어 절단을 내어도 절대로 야단치시지 않았다. 부엌 앞 담장에 알록달록한 이파리가 있는 풀이 있었는데 “이파리 서너장 따온나.” 하셔서 따다드리면 그걸로얹어 예쁜 화전을 자주 구워주셨다. 나는 지금도 그때 밀가루 전위에 올라앉았던 예쁜 이파리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그때 그 맛있던 전 맛도 정말 궁금하다.
그 당시 경상도에는 ‘보리문둥이’ 라 하는, 머리나 손을 온통 싸매고 광목으로 된 긴 가방을 메고 싸리문 앞에 와서 서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면 할머니는 얼른 광에 가서 쌀 한 됫박 떠서 나에게 “주야 퍼떡 주고 온나.” 하면서 나를 심부름 시키셨다. 나는 내심 그 사람들이 어린아이 잡아가서 간도 내먹고 잡아먹는다는 소문을 들어 무서웠지만 얼른가서 그 가방에 쌀 부어주고 냅다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오고 했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그런 분들이 오면 한번도 거절하거나 그냥 보내신 적이 없으셨던 것 같다.
<출처: http://blog.naver.com/5555856/220147869310 >
술 잘 담그는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오며가며 들리면 조롱박 휘휘저어 막걸리 한사발 대접하는 걸 참 기쁘게 여기셨던 것 같다. 늘 방 한켠에는 꼬드밥(술 담그기 위해 꼬들꼬들하게 만든 밥)이 있었고 집에는 늘 술 찌개미가 있어서 친구들이 오면 그걸 당원(설탕 대신 먹는 동그란 알약 같이 생긴 것)에다 버무려 달콤하게 만들어 주면 아이들은 약간은 몽롱한 기분으로 그것을 먹고 즐겁게 놀았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자손 귀한 집에 어린 날 시집와서 아들 다섯 낳아 할머니의 울퉁불퉁 손마디가 굵어지도록 애쓰셔서 다섯 명을 다 서울에 유학시키고 그러던 중 6.25가 터졌단다. 밀리고 밀리던 전쟁 속에서 아들 다섯은 다 학도병으로 나가 생사를 모르고 지내야만 하는 시간이 있었고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기 일보직전이라 나라가 아수라장이었을 때 할머니는 누구에게도 하소연 못할 아들들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가슴 타들어가는 걱정을 막걸리 휘휘저어 한잔 마시고 푸셨다고 한다.
어느날 그날도 방안에 앉아 봉창을 내다보고 있는데 거지 두 사람이 들어오더란다. 그래서 동냥주려고 주섬주섬 일어나 광에 쌀뜨러가는데 “어무이요 어무이요.” 아들 둘이 울면서 들어오는 것이었다고 한다. 전장에서 막내 삼촌이 열병으로 앓고 있어 다른 형들이 사정하여 우리아버지와 삼촌은 집으로 보내고 자기들은 최전선으로 떠났다고 하며 그때부터 할머니 돌아가시기까지 나머지 세아들 소식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어느날 봉창을 내다보던 할머니가 한숨 쉬며 독백처럼 어린 나에게(6살쯤 되었을 때) 중얼중얼 들려주던 이야기들이 지금에야 가슴에 사무치며 할머니의 아픔에 공감하고 마음 아픈건 이제 내가 또 할머니가 되었기 때문일까.
어스름 저녁무렵 이른 저녁을 먹고 돌돌이와 저녁산책을 나섰다. 길에 풀도 나무도 꽃도 보고 노래도 부르며 한참 잘 걸어가던 돌돌이가 갑자기 내 다리를 잡아당기며 “할머니 할머니.” 하고 나를 꿇어 앉혔다. 왜냐고 그랬더니 “할머니 안아주세요. 안아주세요.” 아마, 다리가 아픈 모양이었다. “할머니가 업어줄게.” 나는 아이 앞에 등짝을 대고 얼른 업어주었다. 아이는 내 등에 뺨을 대고 부비며 업혀있다가 피곤했는지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아이의 체온이 등에 따뜻하게 전해오며 언젠가 느꼈던 느낌과 비슷한게 있는데 그 따뜻하고 포근하고 말할 수 없이 편안한 느낌은 내가 어린시절 우리 할머니 등에서 느끼던 것 이었다. 내 몸은 잊지 않고 내 잊어버렸던 기억을 다 잡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출처: http://photo.naver.com/view/2006100300481664315>
한동안 바쁘게 사느라 잊어버리고 있던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새롭게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할머니는 그 한 많은 세월동안 내내 방에 앉아서 봉창을 내다보며 아들들을 기다리다 기다리다 끝내 만나지 못하고 가셨다. 그 기다림과 아련한 아픔들이 한이 되어 나의 가슴에도 맴돌고 있을런지...
그래서 영화 ‘국제시장’을 보며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내가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또 울었던 것일까.
할매가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