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완 인천대 교수(행정학)는 지난 2013년 1월 3일부터 2014년 1월 2일까지. 365일 간의 세계 일주를 하고 돌아왔다. 중·고등학생이던 두 아이와 아내까지. 온 가족이 함께 1년이란 시간을 붙어 있었다. '24시간 365일'을 꼬박 함께 여행하며 경험하고 느꼈던 감정들의 기록을 <인천in>의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사흘 동안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면...“
Helen Keller Birthplace
300 North Commons West, Tuscumbia, AL 35674
헬렌 켈러의 고향집 아이비그린을 찾았다. ⓒ 서진완
헬렌 켈러의 고향집 아이비그린(Ivy Green)의 주소이다. 처음 알라바마를 지날 때 미리 예약해둔 일정 때문에 이곳에 오지 않고, 동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르기로 한 작은아이와의 약속을 드디어 지켰다.
용기 있는 여성의 상징으로 소개되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아담한 정원으로 들어가자 큰 나무가 보였다. 정원은 너무나 조용했고, 우리 밖에 없어서 한가롭게 느껴졌다. 이곳에서 일하는 자원봉사자가 직접 이 집과 그녀의 가족관계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뒷마당에 있는 펌프 앞에 섰다.
앞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장애를 가진 그녀가 이곳 펌프 앞에서 처음으로 "w-a-t-e-r"라고 하는 말을 알게 된 곳이다. 헬렌은 그 이후 모든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처음으로 깨달았다고 한다.
헬렌 켈러의 집에서 자원봉사를 해 주시는 분은 집안 구석구석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위), 헬렌 켈러 집에 있는 펌프 (아래) ⓒ 서진완
어떤 기적이 일어나서 그녀에게 사흘 동안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면, 어린 시절 내게 다가와 바깥세상을 활짝 열어 보여주신 앤 설리반(Anne Sullivan) 선생님의 얼굴을 오랫동안 보고 싶다고 했던 그녀와 그녀의 선생님을 그녀의 고향집에서 함께 만났다.
헬렌에게 인생이 ‘투쟁과 승리’의 삶이었다면, 설리반 선생님에게는 ‘고난과 헌신’의 삶이었을 것이다. 아기때 걸린 병으로 인해 청각과 시각을 모두 잃어야 했던 헬렌과, 고아로 살아오며 결막염을 앓은 탓에 여러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던 설리반 선생님. 두 사람의 이야기는 ‘기적은 사랑과 함께(the Miracle Worker)’ 라는 말에서 잘 드러나는 듯 하다.
제자를 위한 끝없는 선생님의 사랑을 통해 기적을 만들어낸 사실을 헬렌의 집과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느꼈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헬렌을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헬렌이 사용했던 책과 자필 글씨 등을 보면서 설리반 선생님의 헌신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어둠속에서 자포자기하며 좌절하던 당시의 헬렌을 미국에서 가장 용기 있는 여성으로 이끌어낸 것은 결국 설리반 선생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과 헬렌 켈러에 대해 그녀 스스로의 의지와 용기에 대한 부분도 중요하지만, 그녀를 도와준 선생님과 부모님의 헌신과 지혜에 대해서도 얘기 했다. 작은아이는 그녀가 장애를 극복한 부분에 대해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나 또한 그녀의 집 앞에 있는 큰 나무들과 숲에서 불었던 바람과 꽃향기를 결코 그녀가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이 찡해졌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평범하게 보는 이 나무숲이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보고 싶었을 나무와 숲이었을 테니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 보고 있는 그녀의 고향집을 그녀는 보지 못했다. 헬렌 켈러의 고향마을은 너무나 평범했다. 현재는 그녀의 이름을 딴 건물과 병원들이 주위에 있지만 이전에도 이 정도 규모의 마을이었을 것 같다. 건강하게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우리의 현재 모습이 너무나 감사하게 느껴졌다.
반갑다! 그리고 아쉽다!
플로리다 파나마 시티 비치에서의 여유로운 순간 ⓒ 서진완
이 먼 곳에서 반가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더욱 반갑다. 그동안 페이스북으로 우리 소식을 전하고 항상 반갑게 댓글을 달아주던 분들이기에 건강하게 여행하는 우리를 보고 반가워했다. 함께 해변으로 나갔다. 백사장의 모래는 너무나 하얗고 부드러웠다. 이런 백사장을 보고 그냥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신발을 벗고 파도가 치는 해변에 서서 물에 발을 담갔다. 미지근한 물이지만 뜨거운 햇살 때문에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한국에서 가져온 귀한 컵라면과 과자를 선물로 받았다. 여행을 잘 하라고 서로 격려하며 리조트를 떠났다.
이제는 마이애미로 돌아가는 길만 남았다. 큰아이는 내가 부탁한 프로그램을 설치하느라 늦게 잤다고 불평했다. 그래도 재치 있게 웃으면서 불평하기 때문에 불평처럼 들리지 않는다. 어느덧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큰아이 덕분에 자주 웃게 된다. 무거운 짐은 도맡아 옮기고, 물어볼 말도 알아서 먼저 물어보기도 한다. 그래서 점점 그에게 더 많은 역할을 부여하게 된다. "출발해도 되요!" 숙소에 남겨진 물건을 확인하고, 트렁크에 배낭을 모두 실었다. 큰아이가 최종적으로 점검을 완료하면 안심하고 출발할 수 있다.
세인트 페테스부르크의 숙소 ⓒ 서진완
탐파(Tampa) 시내를 통과해서 세인트 페테스부르크(St. Peterburg)에 도착했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작은아이는 바로 수영장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에 유진이가 돌아왔다. 밖을 보니 비가 내렸다. 후텁지근한 날씨는 여전했다. 그러나 창을 통해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운치가 있다. 야자수 나무에 수영장, 그리고 잔디밭이 앞에 펼쳐져 있고 비가 내린다. 큰아이는 방에서 모기를 잡느라 수선을 떨고 있다. "아빠 맥주 드시지 마세요!" 어제 저녁 뉴스에서 모기는 맥주를 마시는 사람에게 더 많이 달려든다고 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어제 밤부터 내렸던 비가 아침에는 그쳤다. 하늘에는 일부 먹구름이 여전히 있지만 그래도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오늘은 아무런 일정을 잡지 않아서 늦게까지 자도 상관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한번 눈을 뜨면 더 이상 잠을 자지 못하고 일어나야만 한다. 나이가 들어서일 것이다.
여행을 하면서 아이들이 한 단계 더 큰 것 같다. 어제 밤에 안마를 해주던 큰아이의 손아귀 힘을 느끼면서 이제는 나 보다 더 힘이 세졌음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아파서 약하게 주물러 달라는 주문을 할 때면 이 녀석은 일부러 더 세게 주무르기도 한다. "아프다니까!" 내가 아프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제는 나 보다 더 힘이 세다는 것을 확인하는 건가?
야자수 나무 사이로 난 길을 걸어서 식사를 하러 갔다. 짧은 거리지만 아내와 남국의 정취를 만끽했다. 이제 비는 완전히 그치고 햇살이 밝게 비쳤다. 에어컨을 켜고 나도 오랜만에 편안하게 이것저것 자료를 들쳐보았다. 그동안 전혀 보지 못했던 원고를 꺼내서 다시 읽었다. 완전히 새로 읽는 느낌이 들었다. 아내는 그동안 밀렸던 글들을 정리했고 그 덕분에 블로그에 글들을 모두 올렸다고 했다.
아이들 몇 명이 수영장에서 노는 것을 확인한 작은아이는 서둘러 수영하러 나갔다. 이럴 때는 여전히 애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유진이가 투덜거리며 다시 돌아왔다. 갑자기 비가 내렸기 때문이다. 하늘이 까맣게 변하고 주위는 깜깜해졌다. 좁은 공간이지만 우리들만이 함께 머무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행복하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야자수 나무마다 물방울이 가득 맺혔다. 잔디밭은 촉촉이 젖었고, 비에 흠뻑 젖은 토끼만한 다람쥐는 정신없이 잔디밭을 돌아다닌다.
바닷물은 얕은지 사람들이 가슴까지 오는 긴 장화를 신고 물속에 들어가서 낚시를 하기도 한다. 바닷가에는 이름 모를 물새들이 앉아있고 사람들은 차를 세워두고 낚시에 여념이 없었다. 마침 손바닥 크기의 물고기를 건져 올리는 장면도 보았다.
안쪽으로는 탐파 만(Tampa Bay)이 멀리 보이고 바깥쪽 저 멀리 멕시코 만에는 푸른 바다가 눈부셨다. 날씨는 후텁지근하고 모기도 많아서 우리는 이런 환경에 익숙하지 않지만 낚시를 즐기고 보트를 타고 푸른 물살을 헤치고 다니는 이곳 사람들의 모습은 여유롭게 보였다. 해변에 위치한 집들은 선착장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푸른 잔디와 바닷물이 접해있어서 그림같이 보였다.
이런 곳에 살면 근심 걱정도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처럼 잠시 이곳을 여행하는 사람이 더 행복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아내 역시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럴 때는 부창부수다. 저 멀리 마이애미공항이 보였다.
200일
마이애미 공항에서 멕시코로! ⓒ 서진완
우리가 여행을 시작한지 200일이 되는 날이다. 밤늦게까지 짐을 정리했다. 아쉽지만 배낭여행을 위해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렸다. 새로 구입한 물건이 있으면 낡은 것은 버렸다. 그리고 무게가 나가는 책자 등도 필요한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두고 모두 버렸다. 마이애미 공항에서 보안검사는 철저하다 못해 지나친 듯 했다. 이런 일이 계속되는 한 기다리는 사람들과 수색하는데 필요한 인력과 장비들, 모두에게 요구되는 비용은 계속 늘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머무르는 동안 마음은 편했지만 이렇게 공항을 이용할 때마다 테러의 위협이라는 실제 상황에 긴장하는 미국을 볼 수 있다.
낯선 멕시코시티… 정체성은?
비행기가 점차 고도를 낮추면서 내려다 본 멕시코시티는 엄청난 규모로 넓게 펼쳐져 있다. 공항에서 지하철을 타는 곳까지 가는 동안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던 여성분은 카메라와 아이패드를 조심하라고 알려주었다. “아빠, 아이패드는 넣으세요!”
멕시코 시티의 거리는 황량하고 지저분했다. ⓒ 서진완
거리는 황량하고 길거리는 지저분했다.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해발 2,240m의 고원에 위치한 탓에 그렇게 덥지 않았다. 전기선으로 연결된 버스도 다녔고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오래된 차들이 잘 다니고 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아서 활기차 보였다. 길에서 타코와 같은 음식을 팔고 있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음식을 사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숙소를 제외하고 주변에 깨끗한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빈 가게들은 쓰레기더미가 가득 쌓인 장소로 변해있었고 상점에 있는 물건들은 오래된 물건처럼 먼지가 쌓여있다. 작은아이가 개를 무서워하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개를 잡고, 지나가라고 손짓할 때는 다정하면서도 순박하게 느껴졌다. 거리 곳곳에 경찰들이 중무장을 하고 서 있다. 특히 은행 주변에는 방탄복에 기관단총까지 들고 있다. 그래도 우리를 쳐다보면서 웃어주기도 했다. 우리도 손을 들어 고맙다는 표시를 했다.
멕시코 시티의 거리 풍경 ⓒ 서진완
거리를 건널 때는 신호등이 있어서 그 신호등에 맞추어 길을 건널 수는 있었지만 대로변을 무단 횡단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간혹 길가에 자고 있는 노숙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인도가 제대로 포장이 되지 않은 곳도 있고 거리의 간판은 정비가 되지 않아 흉물스럽게 걸려있는 곳도 많다. 천둥소리와 함께 비가 내렸다. 빗방울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강한 소나기로 변했다. 창문으로 내려다 본 거리는 온통 비에 흠뻑 젖었다.
밤새 그렇게 많은 비가 내리더니 아침에는 조용해졌다. 일기예보를 통해 전체 멕시코 일대를 살펴보았지만 어느 곳 하나 맑은 날씨가 없다. 마침 페이스북에서 본 예일대 Shelly Kagan 교수의 죽음에 대해 서울대 강의 내용과 한 학생의 질문이 올라와 있다.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 학생에게, 그는 첫째는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을 잘 돌보는 것이고, 둘째는 풍부하고 값진 경험으로 내 삶의 그릇을 많이 채우는 것이며, 셋째는 나 혼자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일이라고 했다.
죽음에 대한 강의로 유명한 그가 우리 모두가 죽기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고 한 말이 기억나서 이 얘기를 아이들에게 해주었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우리가 여행을 시작했던 중요한 이유와 같은 맥락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아는 듯 모르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큰아이는 전공을 선택하는 문제로 6개월 이상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나에게 질문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계속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왜 공부하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Kagan 교수의 말대로 무엇을 위해 그 공부를 하고 싶은지, 더 나아가 내가 어떤 모습의 사람이 되고 싶은지도 함께 생각해주기를 주문했다. 큰아이에게는 무거운 질문이 되겠지만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한 번 더 생각해보라고 했다.
<정리 = 이미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