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추운데
장현기
세월이 가고 세월은 가고 세월은
머얼리 멀리로 지나가기만 하느니…
외로워 외로워 너무너무 외로운데
세월이 이리 많이 지나가기 전에는
찾아갈 수 있는 사람도 찾아오는 사람도
어울릴 수 있는 사람도 많이 있었었는데
이제는 나 늙고 병들어 오래 전부터
내 뜻대로 수족을 움직이지 못하고
남의 도움을 받아야 문 밖 출입을 하느니
나 이리 쓰러져 칠 년을 지나 팔 년째 되는 이제는
찾아오는 이도 없고 걸러오는 전화도 끊어지고
이웃 소식도 모르고 세월이 가는 것도 모르니
오오랜 세월 허구한 나날을 문기둥에 기대앉아
저어만치 바라보이는 거머리산 자락의 사계절과
허허로운 하늘을 – 마음 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창문 흔들며 조롱하고 소리쳐 약올려놓고 도망치는
바람 바람 바람 바람소리를… 바라보고 들으면서
춘하추동 사시사철 어슴푸레한 생각 씹으면서
날씨 꾸물대거나 하루해 기울고 문밖으로 어두움 밀려오면
외로워 외로워 너무 외로워서 시리게 허허로운 외로운 가슴
밀려 덮치는 서러움으로 내 마음은 춥고 춥고 너무 너무 추운데
<시 감상>
장현기 시인은 인천의 시인이다. 시인은 안성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인천에 와서 학교를 다니고 평생을 인천에서 공직생활을 하고 문학 작품을 집필해온 시인이다. 금년 84세인 노시인이 지난해 8월 22번째 시집 『해질녘이면 옷깃을 여미고』를 냈다. 한때는 한국문단의 보편화된 조로현상(早老現狀)을 지적하는 평론가도 있었으나 요새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높은 연세에도 여전히 집필활동을 계속하는 시인작가들이 많다. 황금찬, 김종길, 김남조, 고은, 신경림, 민영, 김광림 등의 시인들이 모두 그런 분들이다. 황금찬 시인은 1918년 생으로 올해 100수를 맞이했다. 39권의 시집과 25권의 수필집을 낸 시인께 또 한권의 저서 상재를 고대하며 건강을 기원한다.
지난해엔 홍윤숙 시인이 91세에 세상을 떠났다. 시인의 나이 88세에 펴낸 시집 『그 소식』을 읽고 나는 큰 감명을 받은 바 있다. 인천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원로시인이 여러 분 있다. 열여덟 번째 시집 『우주의 뜨락』을 펴내고 지난해 봄 84세로 작고한 랑승만 시인, 작년에 열 번째 시집 『너그럽고 풍요롭고 아름다운』을 출간한 85세의 홍명희 시인, 올해 33번째 동시집 『그 바다 그 햇빛』을 펴낸 70대 중반의 김구연 시인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인천의 현역 시인들이다.
장현기 시인의 시집을 꼼꼼하게 읽었다. 생의 우수가 잔뜩 배어 있는 시집을 읽으며 생로병사의 진리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노년의 병고와 고독이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작품마다 배어 있는 외로움과 우수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노년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비로소 노 시인의 시가 완숙의 경지에 도달해 있음을 깨달았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인천에서 행정공무원으로 공직에 오래 있으면서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해온 시인의 인생항로가 멀리 까마득하게 내다보이는 것 같았다.
시인의 시엔 기교가 없다. 무기교의 기교라 할까 그 담백한 문장과 사상이 오히려 더 뭉클하게 감동을 안겨준다. 시의 생명은 진실이다. 아무리 묘사가 절묘하고 언어 선택이 탁월해도 진실이 전달되지 않으면 좋은 시라고 할 수 없다. 마음에 떠오르는 자연스러운 정서와 보편적 진실을 쉬운 언어로 적어 내려간 시에서 비로소 시인의 시세계가 하나의 개성을 갖춘 원숙한 경지에 도달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노 시인들의 작품집을 여러 권 읽었다. 또 외로운 독거노인들의 사는 모습을 많이 보기도 했다. 3년 전 쯤 독거노인들을 찾아다니며 그분들의 사는 모습과 심신의 건강 상태를 살피는 봉시활동을 칠팔 개월 하면서 하루에도 오륙 명씩 독거노인들을 만나보았다. 가족들과 떨어져 가난과 병고, 외로움에 지친 노인들을 보면서 무척 마음이 아팠다. 적나라한 노년의 모습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걸 절감했다.
여러 가지 병고에 시달리며 노후의 심경을 가감 없이 쏟아 놓은 작품들을 읽으니 수많은 다른 노인들의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대변이나 하는 듯 읽는 내내 마음이 울컥하곤 했다. 옆에서 늙은 마나님이 수발을 드시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코 시인만의 얘기가 아니다. 생로병사의 운명을 타고난 우리 모두의 절박한 삶의 문제인 것이다. 시인의 건강한 노후생활을 기원하며 시 한 편 더 읽기로 한다.
병원 갔다 오는 날 · 2
오늘은 병원엘 갔다 왔다
하루 오온 종일을
몇 달 전에 예약한 종합병원에 다녀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강남에서 잠원으로 압구정으로 신사동으로 충무로로 동대문으로 종로로…
헤매다가 헤매다가 헤메이다가
내 집이 있는 아이들이 기두리고 있는
인천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
전동차 안에서
지쳐서 지쳐서 파김치가 되어
헐떡이고 있는 나에게
오랜 세월 허구한 나날의 병원 길을
2급 시각장애로 비틀거리는 내 몸 부추겨주는
마음 착한 아내는
왜 이렇게 방황하고 있느냐며 투덜대며
낄낄낄 웃으며 한숨짓는
흰머리가 부스스한 아내가–아내가-
아내에게 미안했다 너무 너무 미안했다
하루해가 기우는 석양 무렵에서야
전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에는
바람이- 바람이 세차게 불고
먼지나 휴지가 휘날리고
플라타너스 커다란 나뭇잎이 뒹굴고…
낙엽이 뒹굴고 뒹굴고 뒹굴고
정처도 없이 내 마음도 뒹굴고…
뒹굴고 있었다
* 장현기 : 한국문인협회 고문, 한국아동문학회 자문위원장. 한국아동문학연구회 지도위원, 한국시인연대 고문. 중앙대 문인회 지도위원, 서해하동문학회 및 갯벌문학 명예회장.
시집 : 『내 살고 있으므로 』외 21권 출간
동시집 : 『 코끼리 열차 』외 2권 출간